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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12화 (12/424)

012화 마녀의 징표

소녀의 인사에 아시테르도 머리를 긁적였다.

누군가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것이 처음이라 어색함이 하늘을 찔렀다.

“다친 곳은 괜찮아?”

아시테르의 물음에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힐끔거리는 시선으로 계속해서 아시테르의 얼굴을 살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아?”

“뭐가 무서운데?”

“난 마녀야. 태어날 때부터 인간과는 달라.”

“미안하지만 난 마녀가 정확히 뭔지 몰라. 내가 보고 배우며 자란 곳엔 마녀가 없었어. 오히려 마수들이 더 많았지.”

“마수?”

“응. 던전에서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안달인 놈들이야. 아주 포악한 놈들인데 그놈들은 말도 안 통해.”

“그렇구나.”

아시테르가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소녀는 아직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는데, 과거 아시테르가 마수들 때문에 두려움에 떨 때면 어머니가 이렇게 걱정하지 말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본능적으로 아시테르도 똑같이 따라한 것이다.

반면 소녀는 누군가 자신의 몸을 만진 적이 처음이라 오히려 당황하고 있었다.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소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시테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난 네가 무섭지 않아.”

“그래?”

“응. 넌 나랑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잖아. 거기다 날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널 무서워 해?”

“그렇네. 네 말이 맞아.”

아시테르의 말에 답하면서도 소녀는 그를 신기해했다.

툭. 투둑.

그때 바깥에서 빗줄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소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비는 언제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씻어 내리는 시원한 빗줄기에 소녀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깨끗한 공기가 폐부를 시원하게 만들어줬다.

반면 아시테르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동굴 입구에서 멀어졌다.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그래?”

“뭐, 뭐야? 위험하니까 떨어져! 놈들이 우리를 붙잡으려고 마법을 사용한 걸 수도 있어.”

“뭐? 마법?”

“우리 어머니가 그랬어. 나처럼 화염을 다루는 마법사들도 있지만 물을 다루는 마법사들도 있다고. 어쩌면 화염마법사인 날 잡기 위해서 그들을 데려왔는지도 몰라!”

심각하게 말하는 아시테르를 보며 소녀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아시테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름 걱정되어서 진지하게 말했는데 소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니 기분이 상한 것이다.

그의 반응에 소녀가 오히려 놀라 물었다.

“뭐야…? 너 설마 방금 진심으로 한 말이었어?”

“그럼 아냐?”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 이건 단순한 비잖아.”

“비?”

“그래! 비!”

소녀의 말에 아시테르가 적잖이 충격 먹은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시테르가 살아온 던전에선 비가 내리지 않는다.

난생 처음 겪는 ‘비’라는 현상에 아시테르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이런 건 처음 봐…….”

“나도 처음 봐. 세상에 비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넌 대체 어디서 살다 온 거야?”

“내가 사는 곳은 비가 내리지 않는 걸…….”

아시테르가 조금은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지만 소녀가 왜 비 오는 것을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켜보고 있으면 시원하니 기분이 상쾌해졌고, 땅을 두드리는 빗줄기 소리는 놀란 마음을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빗줄기에 가져갔다.

차가운 느낌이 손바닥을 투닥투닥 때렸다.

아시테르를 잠자코 바라보던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너 되게 신기하다. 아까는 그런 무서운 얼굴을 해놓고선 비 앞에서는 그렇게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아… 그치만 신기해서…….”

“어쨌거나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내 이름은 세아츠리스야. 혹시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돼?”

“난 아시테르야.”

“아시테르? 예쁜 이름이네. 무슨 뜻이 있는 건가? 내 이름 세아츠리스는 마녀들의 세계에서 ‘지키는 자’라는 뜻이랬거든. 혹시 인간들도 그렇게 뜻 있는 이름을 쓰나 싶어서.”

“나는 하늘. 어렸을 때 비체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어.”

“하늘이라… 뜻까지도 좋다.”

세아츠리스가 은근 슬쩍 아시테르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비가 오니 살짝 몸이 으슬한 느낌이었다.

이를 느낀 아시테르가 슬쩍 손을 들어올렸다.

화륵―.

아시테르는 손바닥의 불꽃을 곁에 있던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옮겼다.

“따뜻해…….”

“추워하는 것 같아서.”

“와아…….”

세아츠리스가 새삼스런 시선으로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비슷한 또래의 이성이 자신을 이렇게 바라본 적은 처음이라 아시테르가 쑥쓰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너 그럼 진짜 비는 처음 보는 거지?”

“응. 이번이 처음이야.”

“좋다.”

“뭐가?”

“나랑 비를 처음 봤잖아.”

“그게 좋은 건가?”

“처음이면 기억에 남잖아.”

“글쎄… 그런가?”

아시테르의 반응에 세아츠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세아츠리스가 갑자기 아시테르의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의 볼뽀뽀에 아시테르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부드러운 감촉에 아시테르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기억에 남을 거야.”

“어… 아아… 어……?”

세아츠리스도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괜히 아시테르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영광인줄 알아. 마녀의 입맞춤을 받았다는 걸.”

“영광인 일이야?”

“당연하지. 오빠.”

오빠라는 말에 아시테르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정수리부터 가슴까지 찌르는 이 짜르르한 느낌에 아시테르는 본인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도 몰랐다.

“아… 아아……!”

아까까지는 분명 시원했는데 갑자기 더워졌다.

아시테르가 열을 식히기 위해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세아츠리스가 고운 손으로 아시테르의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건 날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

세아츠리스가 다시 한 번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는 아시테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아시테르의 귀가 익은 것처럼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난 너에게 줄게 없는데…….”

“아냐. 내가 고마워서 준거니까 괜찮아.”

“그럼 이거라도 줄까?”

아시테르는 품안에 있던 작은 나무조각상을 꺼내며 말했다.

아시테르가 처음으로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을 때, 유미르가 이를 보고 조각해 준 조각상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너무 기쁜 나머지 남겨두고 싶어서 조각해준 거랬어.”

“뭐? 그렇게 소중한 걸 나에게 줘도 괜찮아?”

“응. 줄게.”

“정말 고마워…….”

세아츠리스가 나무조각상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그런 모습에 아시테르도 괜히 코를 쓱 한번 훔쳤다.

“세아츠리스. 우리 친구 할래?”

“친구?”

“응.”

“마녀인 나랑 친구가 되어도 괜찮아?”

“이제 그런 말 그만해. 네가 마녀든 뭐든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래. 그럼 좋아.”

“그거 알아? 네가 내 첫 친구다.”

“나도…….”

세아츠리스가 아시테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슈쾅!

그때 거친 폭음과 함께 누군가 동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들… 여기 숨어 있었구나?”

“……!”

분노한 사내가 두 눈을 부릅떴다.

겨우 이런 어린애들을 찾기 위해서 산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심지어 비까지 내리는 바람에 더욱 짜증이 치솟고 있었다.

빗줄기가 냄새를 감추고 빗물이 발자국까지 쓸어가 버린 바람에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연기가 보였던 것이다.

사내아이가 불 마법을 사용하던 것을 떠올리곤 혹시나 싶어 달려와 봤는데 정말 이곳에 있었다.

옳다구나 싶은 사내가 손마디를 우두둑 꺾었다.

“가만두지 않을 거다.”

사내가 천천히 다가오자 아시테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잠깐의 틈을 이용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압!!”

아시테르가 작은 불씨들을 쏘아냈다.

사내는 가볍게 팔을 휘둘러 불씨들을 털어냈다.

그 사이 세아츠리스가 마법 공격을 이었다.

주먹만한 가시들이 대지에서 솟구쳐 사내의 몸에 박혔다.

사내가 살짝 옆으로 이동하며 가시들을 피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날아온 불씨가 사내의 몸에 옮겨 붙었다.

“크아악!!”

사내가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사이 아시테르와 세아츠리스가 이곳에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날아온 발이 아시테르의 복부를 걷어 차버렸다.

“학……!”

밀려오는 고통에 아시테르가 몸을 웅크렸다.

꺼억꺼억 숨을 힘겹게 내뱉었다.

사내의 일행이 도착해버린 것이다.

아시테르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곧 무자비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 새끼가!!”

“네놈 때문에 우리만 더 고생했잖냐!”

사내들이 분노를 쏟아내며 아시테르를 무참히 짓밟았다.

그들의 시선은 세아츠리스에게로 옮겨갔다.

“그러고보니 네년에게 받은 것도 있었지.”

그들이 세아츠리스를 향해 손찌검을 하려는 찰나 아시테르가 먼저 움직였다.

짜악!!

큼지막한 손바닥이 아시테르의 뺨을 때렸다.

본래 세아츠리스를 노렸으나 아시테르가 그녀 대신 맞아버린 것이다.

“어쭈? 하! 너같이 어린 것도 꼴에 남자라고 여자는 지키겠다 뭐 그런 거냐?”

“아니 애초에 마녀랑 연관도 없어 보이는 네놈이 왜 그렇게 여자를 지키려는 거냐?”

그들의 물음에도 아시테르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실 아시테르의 마음은 지금도 두려워 미칠 것 같았다.

다리는 부들부들 떨려서 이렇게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신이 이렇게 가버리면 세아츠리스는 홀로 남겨지게 되고 만다.

그 생각에 차마 도망칠 수 없었다.

“엄마, 아빠…….”

아시테르는 저도 모르게 아레나와 유미르를 찾았다.

두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바지에 따뜻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나마 다행(?)인건 계속 내린 비 때문에 이미 바지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는 점이다.

세아츠리스가 아시테르의 뒤에 섰다.

“오빠… 저 사람들이 원하는 건 나야. 그러니까 오빠만이라도 도망쳐…….”

“싫어.”

“그치만…….”

세아츠리스의 눈에도 아시테르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눈을 치켜 뜬 사내가 아시테르를 향해 걸어왔다.

“좋다 꼬마야. 이 아저씨가 오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쳐주마.”

그의 두 손에 커다란 얼음송곳이 생겼다.

스륵.

그때 사내들 사이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얼굴에 박혀 있는 기괴한 점들이 눈에 띄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싸늘한 시선으로 주변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거 재밌군. 너희들은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나?”

여인의 등장에 모두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녀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여인의 보랏빛 눈동자가 사내들을 훑었다.

“겁도 없구나. 감히 마녀의 영역에 발을 들이다니.”

“아…….”

“헙……!”

그때서야 사내들이 기함했다.

여인은 대놓고 이마의 깃털문양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로브 또한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마, 마녀다!”

“마녀가……!”

“이런 제길! 실수야… 마녀의 숲에 발을 들이다니!!”

그들은 재빨리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제는 두 꼬맹이를 상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눈앞의 마녀가 우선이었다.

사내들이 곧바로 마법을 준비했다.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여인이 조용히 움직였다.

“어리석은 짓을.”

마녀가 손아귀를 움켜쥐자 사내들이 곧 괴로운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들의 얼굴이 곧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뱀들이 그들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런데도 사내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너희들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죽어라.”

뱀들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아시테르가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사내들의 고통스런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내들의 비명이 잠잠해지고 마녀가 아시테르의 앞에 섰다.

“슈와아―!”

새하얀 비늘의 뱀이 아시테르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부탁이에요!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시테르의 앞을 막아선 것은 세아츠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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