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15살의 아시테르
구릿빛 피부의 오크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놈들은 번뜩이는 두 눈으로 연신 주위를 살폈다.
“취륵!”
“취에에―!”
오크들은 저마다의 신호를 끊임없이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 오크들을 내려다보는 사내가 있었다.
“흐음… 생각보다 숫자가 꽤 되는구나.”
그들을 보던 사내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이신가? 그러면 뭐, 내가 먼저 움직여 볼까?”
사내가 슬쩍 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발에 불꽃이 일었다.
휘리릭―!
빠르게 움직인 사내가 오크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불길이 일며 길이 가로막히니 오크들도 우뚝 멈춰 섰다.
놈들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사내에게 경고성을 울렸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어.”
사내, 아시테르가 오크들에게 말했지만 오크들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놈들은 곧장 병장기를 들고 아시테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시테르도 오크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수많은 적들을 상대할 땐 중앙으로 파고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아시테르의 머릿속에 비체의 말이 떠올랐다.
화르륵!
아시테르는 순식간에 오크들의 중앙으로 들어섰다.
그가 움직인 자리에 작은 불길이 치솟았다.
“취에에!!”
“취륵!”
갑자기 타오른 불길에 오크들이 뒤로 물러났다.
“자아, 그럼!”
아시테르가 양 손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 맺힌 화염구가 오크들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화콰앙!
화염구에 맞은 오크 두 마리가 뒤로 쓰러졌다.
그들의 빈자리를 채운 다른 오크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휘두르며 아시테르에게 달려들었다.
몸을 숙이며 무기를 피한 아시테르가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이번엔 일자로 뻗은 불길이 하늘로 뻗어 오르며 오크의 머리를 가격했다.
“취에―!”
불길에 당한 오크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커다란 몽둥이가 아시테르의 머리를 노렸다.
아시테르는 사선으로 발을 내딛으며 몽둥이를 피해내었다.
이어 그의 손바닥이 오크의 배에 닿았다.
화륵!
아시테르의 손에서 시작된 불길이 오크의 가죽을 불태웠다.
“취에에!!”
강렬한 고통에 오크가 괴성을 질렀다.
그러나 놈은 몸을 피하기보다 오히려 아시테르의 몸을 붙잡는 것을 택했다.
“어, 어라?”
당황한 아시테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악스런 오크의 힘에 뼈가 금방이라도 뭉개질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오기 위해 아시테르가 몸을 바둥거렸지만 오크는 지독하리만치 아시테르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취에!”
“취에엑―!!”
분노한 오크들이 그대로 아시테르를 죽이려 들었다.
돌칼이 날아들고 뭉툭한 나무몽둥이가 날아들었다.
낭패한 기색으로 물든 아시테르가 온 마력을 다해 불꽃을 만들어내었다.
“취에에에에―――!!”
아시테르를 붙잡고 있던 오크가 순식간에 화마에 집어삼켰다.
하지만 놈은 여전히 아시테르를 놔주지 않았다.
“이거 놓으란…….”
파바박!
퍼벅!
오크들의 공격은 가차 없었다.
놈들은 아시테르를 붙잡고 있는 오크까지 함께 공격해버렸다.
무자비한 타격에 여기저기 고통들이 밀려왔다.
아시테르는 그 와중에 돌칼만은 피하기 위해 최대한 몸을 비틀었다.
돌칼에 맞으면 치명상을 면치 못할 터였다.
“커헉……!”
그러나 곧바로 날아온 몽둥이에 정신이 아찔할 만큼의 충격이 전해졌다.
아시테르의 불꽃도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의 정신이 흐릿해질 무렵 오크들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촤라락―!
눈앞에 서 있던 오크가 피분수를 터트렸다.
그 뒤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들아. 먼저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잖니.”
“죄송해요 아버지.”
“어이구…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다.”
유미르가 아시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눈웃음을 짓는 그의 눈가에도 어느덧 세월이 보이기 시작했다.
얕게 번진 주름이 그의 표정을 더욱 온화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속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검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화려하게 반월을 그리며 오크들을 순식간에 도륙했다.
“아들!”
“네.”
“마무리를 부탁한다.”
“네!”
유미르의 부탁에 아시테르가 양 손을 모았다.
그의 손에 맺힌 불꽃이 피어나듯 하늘 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허공에 퍼진 불꽃의 씨앗이 오크들을 향해 떨어졌다
화르륵!
불씨에 닿은 오크들의 시체가 하나둘 불타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오크들은 어떻게 해서든 불씨를 털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런 오크들을 가만히 두고 볼 유미르가 아니었다.
달빛검기가 번뜩일 때마다 오크들의 몸이 고기 썰리듯 잘려나갔다.
무섭도록 빠른 그의 검술에 아시테르도 눈을 빛내며 쳐다보았다.
“쯧. 방심했던 것이냐?”
뒤에서 나타난 비체가 아시테르의 옷을 털어주며 물었다.
그러자 면목 없다며 아시테르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 판단했는데… 죄송해요 할아버지.”
“아시테르야.”
“네.”
“죽음을 각오한 상대는 때로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들을 보이기도 한단다.”
“맞아요. 깜짝 놀랐어요. 다른 마수들을 상대할 때는 제가 공격하고 위협을 주면 몸을 피했는데 이번에 만난 오크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전투가 언제나 내가 원하는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란다. 나와 네 아비가 계속해서 네게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지. 이론만 가득한 녀석보다 경험이 더 많은 자가 오래 살아남는다. 수많은 정보들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그 이론들과 정보들을 충분히 경험 속에 녹여낼 줄 알아야만 해.”
“네, 알겠어요 할아버지.”
비체가 아시테르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는 동안 전투는 완전히 종료되었다.
마지막 오크 한 마리까지 숨통을 끊어놓은 유미르가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검에 묻어 있던 핏물이 바닥에 뿌려졌다.
“스승님. 요 근래에 마수들이 더 자주 튀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런 느낌이 들긴 하는 구나.”
“혹시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요?”
“그렇진 않다. 봉인 상황은 전과 다름없어.”
“그렇군요…….”
유미르가 무언가를 생각하며 답했다.
비체는 아시테르를 향해 손짓했다.
“자아… 너는 다시 특훈하러 가자꾸나. 벌써 15살이나 되었는데 아직까지 이런 오크들 하나 처치하지 못하면 어쩌자는 것이냐.”
“예?”
“나는 너를 이렇게 나약하게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러니 또 특훈이다.”
“네… 네에… 아하하…….”
어색한 웃음을 짓던 아시테르가 유미르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유미르는 바닥을 내려다보느라 아시테르의 눈길을 바라봐주지 못했다.
“일부러다… 일부러 저러시는 거야…….”
유미르는 마지막까지 아시테르의 도움에 응해주지 않았다.
결국 아시테르는 홀로 비체가 마련한 특별 수련동으로 향했다.
그런 아시테르의 뒷모습을 유미르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고민이 있는 게지?”
“예?”
뒤에서 비체가 불쑥 물어오자 유미르는 놀라 되물었다.
“나도 눈치가 있는 놈이다. 너와 아레나의 표정이 요새 안 좋더구나. 무슨 일이냐. 내게도 털어놔주면 안되겠느냐?”
“아… 그게 말입니다 스승님…….”
유미르는 잠시 주저하다가 끝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아시테르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시테르가 왜? 단 한 번도 속 썩이지 않고 잘 크고 있질 않느냐? 거기다 아직 성에 차진 않지만 분명 꾸준한 성장도 이루고 있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은 아시테르가 10살이 되었을 때부터 줄곧 생각해왔던 겁니다만, 저희는 아시테르에게 너무도 미안한 마음입니다.”
“원래 부모의 마음이 그런 것 아니겠느냐?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도, 계속 부족하고 미안한 것 말이다.”
“그런 것도 있지만, 아시테르는 지금까지 던전에서만 자라왔습니다. 저와 아레나가 시간 나는 대로 많은 것들을 가르치긴 하지만 정작 아시테르가 이곳 던전에서만 평생 머물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마음이 너무도 불편할 것 같습니다.”
유미르의 고민을 들은 비체도 침음성을 흘렸다.
사실 비체라고 그런 고민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아시테르가 잠시 던전 바깥을 다녀오게 되었을 때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따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질 않느냐?”
“맞습니다. 저희의 마음대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흐음… 알겠다. 그럼 나도 같이 고민해보마. 혹시나 닫히지 않은 던전의 입구가 있을지도 모르니 오늘부터 시간 나는 대로 찾아보겠다.”
“감사합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그래. 아레나에게도 그렇게 전해주렴.”
“네.”
* * *
비체와 유미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아시테르는 특별 수련동에 들어갔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곤 조금 전 오크들의 움직임을 떠올려보았다.
양옆에서 덮쳐오던 공격 패턴, 한 마리는 위를 노리고 한 마리는 아래를 노리던 협공까지.
자연스레 몸을 움직이며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흐음… 아무래도 난 이런 쪽에 재능이 있는 건가?”
아레나는 불꽃으로 원거리 공격을 가하는데 뛰어났다.
반면 아시테르는 마력을 불태워 자신의 몸에 두르는 것에 더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아레나는 이를 두고 무투 타입의 마법기사라는 말을 붙여주었다.
“어머니가 계시던 왕국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스타일이라곤 하셨는데…….”
똑같이 불꽃 마법을 다루는 마법 기사라도 전투 타입은 다양했다.
거기다 같은 속성이라도 특화된 마법들이 달랐다.
“문제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켜나가는 거라고 하셨지. 하지만 이것도 포기할 수 없는걸!”
아시테르가 끌어 모은 마력으로 불꽃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서 피어난 불꽃이 곧 허공으로 날아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슬비처럼 내리는 불꽃비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초반엔 강렬하게 불타오르던 불꽃도 아시테르가 있는 만큼 내려오면 그 힘이 확 줄어들었다.
덕분에 이 마법은 언젠가부터 공격마법이 아닌 뒤처리(?)용 마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유미르가 종종 마수 시체들을 태우는데 아시테르의 마법을 애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아버지지만 정말 너무하신다니까. 하아… 그나저나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
이런 불꽃으로는 어떤 적들도 태울 수 없었다.
자그마한 불씨쯤 털어내면 그만이니까.
그는 다시 한 번 비가 오던 그 날을 생각했다.
장대비가 퍼붓던 그 날의 광경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날의 모습에 영감을 받아 고안해낸 마법이었다.
아시테르가 다시 한 번 불꽃을 일으켰다.
불꽃은 아시테르의 손에서 뜨겁게 타올랐다.
“자아, 그럼!”
꽃이 피어나듯 불꽃이 번지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불씨가 하늘을 수놓듯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것 역시도 아시테르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다.
아시테르는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고 같은 마법을 되풀이했다.
“후우…….”
그렇게 몇 번이나 연습했을까.
고갈된 마력 때문인지, 지친 체력 때문인지 아시테르가 두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광범위에 걸쳐 불꽃을 퍼트리는 만큼 소모되는 마력의 양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털썩 주저앉은 아시테르가 팔짱을 끼며 누웠다.
눈에 보이는 것은 시커먼 돌들.
“역시 여기보다는…….”
아시테르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한쪽 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가 조용히 집중하자 곧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눈앞의 공간이 비틀어지며 게이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