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굴욕을 당하다 (1)
아시테르는 망설임 없이 게이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후우…….”
처음 던전 밖을 나갔다 온 그날 이후부터 아시테르는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어비스 던전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혹시나 싶어 그 후로 몇 번을 시도해 봤더니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 어머니 아버지가 말씀해주신 신수의 축복 덕분인거겠지?”
던전의 신수.
이곳 어비스 던전을 관리하는 존재.
어쩌면 그 녀석이 아시테르에게 이런 권능을 내려준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기껏 받은 권능을 썩혀두면 너무나도 아까운 짓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아시테르는 종종 부모님과 비체의 눈을 피해 던전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보니 점차 던전 밖의 풍경들도 눈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여기가 마음이 편하고 좋아.”
그는 무성하게 피어난 꽃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뭉게구름들을 보고 있으면 머릿속을 차지하던 많은 생각들이 잊어지곤 했다.
거기다 이곳에 있으면 몸의 회복도 더욱 빠르게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너무 무리했나.”
아시테르는 파르르 떨리는 양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몸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을 텐데 아직까지도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멈추질 않았다.
그만큼 이번엔 무리해서 마법을 연습했다는 말이었다.
“하아… 뭐 됐어. 어차피 좀 더 쉬다 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아시테르는 연신 주위를 살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전 밖으로 나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녀봤지만 다시 한 번 세아츠리스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거기로 들어갈 용기는 안 나고…….”
마녀의 숲에 함부로 들어갔다간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곳에서 살아나온 자신은 상당한 행운아였다는 것을 어머니인 아레나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혹시나 말하지만 마녀의 숲에는 함부로 발을 들이면 안 돼.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마녀의 숲에서 죽음을 맞이하니까.”
아레나는 삼엄한 어조로 아시테르에게 경고했었다.
그것 때문인지 아시테르는 마녀의 숲 쪽으론 아예 걸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그 근처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세아츠리스가 걸어 나와 주진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세아츠리스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뭐, 그 애도 바쁠 테니까…….”
이만 생각을 마치기로 한 아시테르가 두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자신을 감싸는 산들바람에 절로 잠이 쏟아졌다.
거기다 푹신하게 느껴지는 땅바닥이 자신의 피로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일단 한 숨 자볼까.”
아시테르는 스르륵 감기는 눈을 거부하지 않았다.
향기로운 내음이 코끝을 간질이고 부드러운 바람까지 몸을 감싸주니 더없이 좋은 휴식 장소였다.
단잠에 빠진 아시테르를 위하듯 주위의 산새들과 곤충들도 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그의 단잠은 오래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시테르는 귓가에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틀림없는 사람 발자국 소리였다.
몸을 일으킨 아시테르가 우거진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과거의 경험 때문에 우선은 사람들을 경계하는 습관부터 들였다.
이윽고 그가 있던 곳으로 앳된 얼굴의 소년소녀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뭐야?”
놀란 아시테르가 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
가끔 몇몇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긴 했지만 자신과 비슷한 나이 또래는 처음이었다.
“여기면 괜찮겠지?”
“보는 눈도 없을 걸?”
“흐흐, 그래 맘 편히 할 수 있겠어.”
여러 명의 소년소녀가 중앙에 있던 한 소년을 밀쳤다.
이미 얼굴에 멍 자국으로 가득한 소년이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다른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야, 에스파.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난처했는지 아냐?”
“그래. 도움이 안 되는 걸 알면 알아서 빠졌어야지.”
“하아… 이래서 천민은 안된다니까.”
“제기랄. 도대체 왜 이런 천민 따윌…….”
천민이라는 단어에 아시테르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도 일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아레나는 이스트 왕국의 귀족 가문 출신인 반면 유미르는 천민 출신이었다고.
물론 아시테르에게 이 얘기는 그다지 감흥 있는 얘긴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나고 자란 어비스 던전에서 귀족이니 천민이니 하는 것들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숙한 단어가 나오니 절로 관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너희들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려고…….”
에스파라 불린 금발의 곱슬머리 소년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겁에 잔뜩 질린 상태였다.
짧게 머리를 자른 비취색 머리의 소년이 에스파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나?”
“그건…….”
“너 같이 하등한 천민 따위는 애초에 우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래. 도움을 줄 수 없으면 최소한 방해라도 하지 말았어야지.”
“나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흐읍……!”
갑자기 날아온 수은 덩어리가 에스파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고통에 헛바람을 집어삼킨 에스파가 몸을 웅크렸다.
“누가 너 따위한테 대답을 듣고 싶대?”
“너 때문에 우리 에이브릴만 고생했잖아.”
“하아… 그러니까 일단 좀 우리 화가 풀릴 때까지 맞자.”
그들은 각자의 마법으로 에스파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한 명은 수은을 다루는 마법을 펼쳤고 다른 한 명은 마법으로 날카로운 종이를 만들어 에스파의 몸에 상처를 냈다.
다른 한 명은 마법으로 끈적한 점액을 만들어 에스파의 몸을 붙잡아 두었다.
뒤에 서 있던 여인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에스파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만, 그만해 줘… 제발… 내가 잘못했어…….”
에스파가 힘 잃은 목소리로 애원하듯 빌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법은 멈추질 않았다.
여인 또한 딱히 그들을 말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뭐야 저게…….”
결국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아시테르가 몸을 움직이고 말았다.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제 그만해.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뭐냐 너는?”
갑자기 나타난 아시테르를 보며 다른 이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만히 지켜보던 여인도 낯선 인물의 등장에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아, 나는…….”
그러고보니 자신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왕이면 저들이 겁을 집어먹을 수 있는 것이면 좋았다.
그래야 대화가 편할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아시테르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나는 이 근처를 지나던 마녀인데…….”
“뭐!?”
“마녀?”
“아하하하!!!”
아시테르의 소개에 다른 녀석들이 모두 코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관심을 보이던 여인도 아시테르의 말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네가 마녀라고?”
“이거 완전 도라이 아니야.”
“세상에 마녀 중에 남자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는데?”
그때서야 아시테르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만 지어보였다.
“그래서 아무튼 마녀야, 지나가던 길이면 조용히 지나가라.”
“크흐흐흐, 이거 골 때리는 놈이네 진짜.”
“아, 너무 웃었더니 배가 아파 배가.”
“…….”
여인을 제외한 다른 소년들은 모두 아시테르를 대놓고 비웃고 있었다.
그러건 말건 아시테르는 에스파의 몸 상태부터 살폈다.
여기저기 괴롭힘을 당한 탓에 성한 곳 하나 없어보였다.
“괜찮아요?”
그는 소년들은 신경 쓰지 않고 에스파에게로 다가가 말을 건넸다.
그의 다정한 말투에 소녀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다가오는 아시테르의 손을 본 에스파가 움찔거렸다.
두려움에 그가 몸을 한층 더 웅크렸다.
“시, 신경 쓰지 말고 가세요. 괜히 함부로 나섰다간 당신도 큰일나요…….”
“어떻게 그래요? 여럿이서 이렇게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데. 비겁하게.”
다른 것보다 아시테르의 마지막 말이 그들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여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비겁해?”
그녀의 목소리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시테르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안 비겁해? 한 명을 상대로 여러 명이서… 이건 너무 하잖아?”
아시테르가 그들의 면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수은마법을 사용하던 소년이 앞으로 나서며 웃었다.
“크하하!! 뭐라는 거냐. 너 설마 우리가 겨우 이깟 놈 하나 어쩌지 못해서 여러 명이서 이렇게 괴롭히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아니었어?”
“설마! 그런데 넌 이름이 뭐냐? 난 레기아스 가문의 체레드다.”
“너한테 알려주긴 싫은걸?”
“왜지? 자신 있으면 너도 가문과 이름을 밝혀봐라.”
체레드의 말에 다른 소년들이 입을 열었다.
“포포메 가문의 자토다.”
“난 핸더슨 가문의 도거스.”
다른 소년들도 자신의 가문와 이름을 밝혔다.
그들 모두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체레드가 한쪽 손으로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쪽은 레프레시아 가문의 에이브릴이다.”
체레드의 소개에도 아시테르는 그저 멀뚱멀뚱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애초에 아시테르는 귀족 가문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소개를 들어봤자였다.
반면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생각한 체레드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들어본 적조차 없나? 하… 대체 얼마나 변두리에 사는 천민인거야? 쯧.”
그는 이미 아시테르를 천민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체레드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주변으로 은방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조, 조심해요…….”
그래도 아시테르를 걱정한 에스파가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시테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피식 웃어보였다.
“걱정하지 마.”
아시테르의 말을 들으면서도 에스파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이들은 주변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는 학생들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게다가 귀족도 아닌 같은 천민 출신의 소년이 저들을 감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에스파가 연신 불안한 눈빛을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시테르가 자신을 포위하는 체레드와 자토, 도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나 보자.”
“뭐냐.”
“어째서 너희는 친구를 괴롭히는 거야?”
“친구? 아하하하!! 친구!?”
그들이 한 번 더 비웃음을 흘렸다.
아시테르는 그들보다 뒤쪽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눈앞에 있는 체레드보다 저 뒤에 있는 에이브릴이 더 리더 격임을 알 수 있었다.
안 그런척해도 이들은 은근하게 에이브릴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아시테르의 시선을 느낀 에이브릴이 입을 열었다.
“글쎄… 쓸모없으니까?”
“뭐?”
“게다가 친구라니. 저런 쓸모없는 놈은 내 동료도, 친구도 될 수 없어.”
“하……?”
아시테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브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러자 체레드가 아시테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누구한테 그딴 시선을 보이는 거냐? 감히!”
체레드가 빠르게 마력탄을 발사했다.
그의 손짓을 읽은 아시테르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파앙!!
그러자 뒤편에 있던 에스파가 마력탄을 맞고 말았다.
“커헉……!”
에스파가 고통스런 비명을 토해냈다.
아시테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체레드는 이것까지 노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자책했다.
순간 뒤에 있던 에스파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시테르가 시선을 빼앗긴 틈을 타 자토랑 도거스가 합공을 가했다.
점액 마법이 아시테르의 두 팔을 붙잡으려 했다.
“조심……!”
이를 본 에스파가 황급히 소리쳤다.
다행히 아시테르도 그들의 공격을 눈치 채고 있었다.
몸을 피한 아시테르가 반격을 위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