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세 가지 미션
“흐음… 에스파. 넌 이번에도 승급전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냐?”
“네.”
홀로 의자에 앉아 있던 에스파가 고개를 들었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갈색 머리의 중년 사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승급전에 도전하지 않는 거냐.”
“아, 그건… 누군가를 좀 기다리고 있어서요.”
“누구를?”
“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요.”
“호오… 혹시 다른 교관이 오기라도 하는 거냐?”
“아니요. 저랑 비슷한 나이의 친구예요.”
“그렇구나. 보아하니 그 친구는 아카데미의 학생이 아닌 모양이구나. 기다린다고 말하는 걸 보면.”
교관, 윈더의 말에 에스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후로 벌써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었다.
계속해서 찾았지만 이번 신입생 중에 아시테르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번에도 아카데미 시험을 보지 않았나 봐요.”
“그 친구가 시험에 떨어졌을 수도 있지 않니?”
“아뇨. 그럴 리 없어요. 그 친구는 저보다도 훨씬 대단한걸요. 그런데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부터 떨어질 리가 없어요.”
“그럼 너는 그 친구가 아카데미 시험을 아예 치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냐?”
“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흐음, 네가 그렇게 말하니 어떤 친구일지 궁금하구나.”
“진짜… 멋있는 친구예요.”
에스파의 말에 윈더가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그동안 윈더는 에스파의 지도교관으로 오랫동안 그를 지켜봐왔었다.
처음 에스파는 아카데미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동기들에게 은근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도 윈더는 잘 알고 있었다.
은근하게 그를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 효과도 잠시 뿐이었다.
그들은 윈더의 시선을 피해 더욱 교묘히 에스파를 괴롭히곤 했다.
1년 전에는 에스파가 넝마가 된 모습으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같은 학생이라고 해도 귀족 가문의 자제들은 평민이나 천민 출신의 학생들을 인정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라 생각했다.
더구나 평민 출신은 몰라도 천민 출신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의 표적이 되어버리곤 했다.
특히나 아카데미가 설립된 초창기에 이 같은 문제가 가장 심했었는데, 이러한 문제 때문에 학장과 교관들은 최대한 실력만을 중시하려 노력했다.
아카데미에선 천민 출신이든 평민 출신이던 중요치 않고 오직 결과와 과정만을 중요시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아카데미의 등급 제도였다.
가장 처음 입학한 학생들은 수련생이라 불렸다.
기초적인 수업을 한 달 정도 듣고 나면 간단한 시험을 치르는데 사실상 이것은 명목상의 시험에 불과했다.
오히려 기초 수업 한 달 동안 아카데미에 적응하지 못하는 수련생들을 다시 돌려보내는 유예기간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기초 시험을 치른 이들은 곧 5등급에 오르게 된다.
아카데미 내의 등급은 5등급, 4등급, 3등급, 2등급, 1등급 순으로 숫자가 적을수록 더 뛰어남을 증명했다.
학생들은 각기 등급에서 승급하기 위한 승급전을 치를 수 있고 승급전에 통과한 학생들은 비로소 다음 등급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등급에 오른 이들만이 졸업시험을 치를 수 있는데, 이들을 바로 챌린저(Challenger)라 불렀다.
당연한 말이지만 높은 성적을 거둔 챌린저일수록 마법기사단에 들어가는데 유리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거둔 성적을 토대로 왕국 내의 마법기사 랭크가 정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아카데미의 학장과 교관들은 이 같은 시스템이 원활히 돌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보였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아카데미의 분위기도 초창기보다는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분의 벽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초반보다 좀 더 나아진 것에 감사할 수준은 되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 초창기부터 다른 동기들에게 꾸준한 괴롭힘을 당해온 것이 바로 에스파였다.
“너도 충분히 대단한 학생이란다 에스파.”
“네?”
“다른 녀석들은 네가 5등급의 만년낙제생이라며 욕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넌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니 정말이야.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해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지. 칭찬받아 마땅한 거란다. 물론 모종의 이유로 그것을 감추는 것 같지만?”
“아…….”
윈더의 말에 에스파가 조금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의 반응에 윈더가 에스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거겠지? 그래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구나.”
“그게 무엇인가요?”
“마력의 속성 변환 말이다. 그걸 못하는 것은 연기인 거냐, 아니면 진짜인 거냐?”
“그건 진짜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마력의 속성 변환은 이루어낼 수 없었어요.”
“그렇구나…….”
“하지만 괜찮아요. 저는 윈더 교관님께서 주신 이 마도서만으로도 전 충분해요.”
에스파가 한쪽에 놓아둔 마도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윈더가 에스파에게 처음 건넸을 때보다 한층 더 낡아 있었다.
그만큼 이 책을 오랫동안 괴롭혀 왔다는 얘기였다.
“조금은 도움이 되었나 보구나.”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요. 기대하세요 교관님. 저는 그 친구와 함께 꼭 마법기사단에 들어갈 거예요.”
“꼭 그 친구와 함께여야 하는 거니?”
윈더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천민 출신인데다 속성 변환도 못하는 에스파를 인정해주는 다른 학생들은 없었다.
순간 그 사실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괜히 미안해진 윈더가 코를 킁킁 거렸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그… 말이다… 네가 그동안 노력해온 것들을 선보이면 다른 학생들도 충분히 너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다른 학생들이 제 능력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전 다른 누구보다 아시테르에게 먼저 지금까지의 노력을 인정받고 싶거든요.”
“그 친구의 이름이 아시테르인 모양이구나.”
“네. 제 재능을 알아봐준, 저를 제일 먼저 인정해준 친구예요.”
밝은 얼굴로 말하는 에스파를 보며 윈더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에스파를 찾아온 데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불편한 말이지만 그래도 전달은 해야 했다.
“하지만 에스파. 이제 두 번 남았다. 다음번까지는 어떻게 된다 쳐도 그 다음 승급전에는 도전해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아마 아카데미에서도 네게 퇴학을 권고할 거다. 그것만은 알아두었으면 좋겠구나.”
“네. 명심할게요 교관님.”
“후후, 그래. 부디 네 친구가 꼭 우리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너와 함께 성장해나갔으면 좋겠구나.”
* * *
“으아아―!!”
아시테르는 있는 힘껏 눈앞에 보이는 벽을 향해 달렸다.
그의 뒤편으로 바위 파편들이 날아들었다.
쿠웅―!!
아시테르가 조금 전까지 있던 곳으로 커다란 마수가 뿔을 들이받았다.
“진짜 이건 절 죽이기 위한 미션이 맞는 것 같다니까요!?”
아시테르가 원망어린 시선으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유미르와 아레나, 비체가 서 있었다.
그들은 아시테르의 마지막 미션을 지켜보기 위해 그곳에 있던 참이었다.
“어머, 우리 아들이 어느새 저렇게 성장했다니까요.”
“그러게 말이야… 두 번째 미션을 해냈을 땐 어찌나 감격스럽던지. 누구 아들인지 정말 잘 컸어.”
“누구 아들이긴요. 제 아들이죠.”
아레나와 유미르가 서로를 껴안으며 대화를 오갔다.
이런 때에도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비체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저토록 아시테르를 대견해 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첫 번째 열매를 터트리는 시험.
이것부터가 사실은 쉽지 않은 시험이었다.
아레나는 아시테르가 그것을 해내는데 최소 1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보란 듯이 반년 만에 첫 번째 미션을 해내고야 말았다.
두 번째 미션도 반년을 조금 넘기며 완벽히 통과해내었다.
이를 보며 아레나와 유미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마지막 미션만 클리어하면 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나보네요.”
“오르보어 우두머리는 나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상대지.”
유미르가 과거를 떠올리며 말했다.
오르보어는 피부가 광석처럼 단단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마수였다.
멧돼지처럼 생긴 외형에 코 쪽에 돋아나 있는 두 뿔은 엄청난 강도를 자랑했다.
거기다 덩치만큼 갖고 있는 힘도 상당해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녀석이 아니었다.
“특히나 아시테르에겐…….”
유미르는 조용히 아시테르쪽을 바라보았다.
한창 달아나던 아시테르가 힘껏 몸을 도약했다.
그는 커다란 바위 위에 서서 오르보어를 내려다보았다.
“후우… 진짜 무식한 녀석이네.”
바위 파편에 맞은 이곳저곳이 욱신거렸다.
그나마 지금까지 공격을 모두 피해내서 다행이지 만약 저 뿔에 한 번이라도 들이받혔다간 온몸의 뼈가 부서져버릴 것 같았다.
아시테르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마력을 끌어 모았다.
“나도 당하고만 있진 않아……!”
그의 손아귀에 모인 불꽃이 하늘높이 치솟았다.
허공에 솟은 불꽃이 개화하듯 피어나며 오르보어를 향해 쏟아졌다.
이를 본 유미르와 아레나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언제 저런 마법을 익혔지?”
“호오… 그 사이에 저렇게나 발전시켰구나.”
그러나 곧 유미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광범위한 공격 마법이었지만 그 위력이 너무나도 미약했다.
“근데 저런 불꽃으로는…….”
그가 조금 실망감을 비추려는 때 아시테르가 힘껏 팔을 뻗었다.
손아귀에 맺힌 화염구가 오르보어를 향해 날아갔다.
화염구는 허공에 맺힌 불씨들을 흡수하며 위력을 더해갔다.
불씨들이 옮겨 붙으며 그 몸집을 키운 것이다.
“아…! 저런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구나!”
감탄한 아레나가 새삼스런 시선으로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비체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 쓸데없는 짓일 뿐이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오르보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염구를 받아내었다.
녀석은 더욱 성난 울음을 토해내며 아시테르를 향해 질주했다.
아시테르는 침착하게 오르보어의 앞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놈의 바로 앞에서 작은 불기둥이 솟구쳤다.
“됐어!”
아시테르가 크게 소리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오르보어의 피부 중 가장 약한 곳이 바로 배 쪽이었다.
조금 전 땅에서 솟구친 불기둥으로 녀석의 배를 정확히 공격했으니 분명 타격이 있을 터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오르보어가 처음으로 휘청거렸다.
그러나 놈은 바닥에 쓰러지지 않고 네 다리로 굳건히 버티고 섰다.
“퀘웨에에에―――!!”
오르보어의 불같은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꽂혔다.
분명 데미지가 있었지만 놈은 여전한 기세로 아시테르를 위협했다.
오르보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시테르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역시 안 되는 구나. 나는 이런 쪽엔 재능이 없는 건가…….”
그동안 숱하게 노력했지만 그가 낼 수 있는 위력은 이 정도였다.
어머니 아레나는 아시테르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위력의 화염구를 쏘아냈고, 더욱 커다란 불기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아시테르는 그녀의 마법에 반절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비체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놈 참, 고집 한 번 쎄구나.”
“예? 스승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시테르 저놈은 이미 오르보어를 쓰러트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애초에 오르보어는 아시테르의 특기를 살리면 금방 쓰러트릴 수 있는 마수야. 그것은 분명 아시테르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도 저놈은 끝까지 자신이 약한 분야로 저 오르보어를 이겨 내보려 하질 않느냐. 저 쓸데없는 승부욕만큼은 널 꼭 닮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