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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3화 (23/424)

023화 가족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너의 그 재능은 굉장한 거다.”

오르보어의 사체를 살피던 비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서부터 파괴된 탓에 오르보어의 내부는 말이 아닌 상태였다.

그는 말없이 허리춤의 검을 들어올렸다.

후웅―!!

스르릉――!!

비체가 검을 휘두르니 오르보어의 피부가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마, 말도 안 돼…….”

오르보어의 피부를 너무나도 간단히 잘라내는 비체를 보며 아시테르가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동안 자신이 고생한 것이 무색하리만치 간단한 일검(一劍)이었다.

“후후 너무 상심마라. 오르보어는 너랑 상성이 안 좋았을 뿐이니까.”

유미르도 검을 들어 오르보어의 사체를 자르기 시작했다.

핏물이 흥건히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그는 능숙히 오르보어의 사체를 부위별로 잘라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시테르의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아레나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지막은 정말 대단했어. 엄마도 깜짝 놀랐어. 설마 그런 방법으로 공격을 시도할 생각을 하다니.”

“그래요? 어머니도 놀라실 정도였나요?”

“물론! 왕국에도 우리 아들 같은 타입의 마법기사는 흔치 않을 거야. 대부분의 귀족 가문 자제들은 몸 쓰는 것을 싫어하니까. 마력으로 신체 강화를 하거나 보호하는 마법 정도는 있지만, 보통 원거리 공격을 선호하긴 하지.”

아시테르는 마력으로 자신의 신체능력을 보강한 것도 모자라 그대로 방출해내며 공격으로 변환시키기도 했다.

아마 그동안 꾸준하게 몸을 단련시켜온 덕분에 이 반동을 견뎌냈을 것이다.

게다가 실전에서 이런 걸 해내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마력 컨트롤에 꽤나 자신 있는 아레나조차 아시테르처럼 완벽히 해낼 자신은 없었다.

“불꽃의 폭발을 이용해 몸을 움직이거나 공격하는 것… 말은 쉬워도 컨트롤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술사 본인이 다치고 말아. 혹은 마력의 흐름이 흐트러지며 마법이 도중에 깨지고 말거나.”

어렸을 때부터 마력을 컨트롤 하는데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발전해낼 줄은 아레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테르의 이만한 성장은 아레나로 하여금 더더욱 뿌듯함과 대견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축하한다 우리 아들. 이제 드디어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겠구나.”

“감사해요 어머니.”

아시테르가 아레나의 품에 안겼다.

성장기가 찾아오고 몸이 크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아레나에게 안겨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아레나는 오랜만에 보이는 아들의 어리광에 두 팔로 한껏 끌어안아주었다.

어느새 덩치가 커져 품안으로 다 끌어안을 수 없었다.

오르보어의 고기를 한 짐 짊어진 유미르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외쳤다.

“아들!! 오늘은 고기파티다!”

고기파티라는 말에 아시테르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이 허기짐과 피로를 달래기에 고기만큼 탁월한 선택은 없었다.

더욱이 이번엔 비체도 괜히 헛기침을 하며 한 마디 거들었다.

“내 특별히 오늘은 축하도 해줄 겸, 아껴뒀던 술을…….”

비체가 말끝을 흐리며 슬쩍 아레나의 눈치를 보았다.

아레나도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특별히 허락한다는 뜻 같았다.

“으하하하!! 기분이 좋구만!”

아레나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비체가 크게 웃어젖혔다.

유미르도 둘 사이에 오가는 무언의 대화를 봤기 때문에 함께 기뻐했다.

“드디어 내가 우리 아들과 술잔을 한 번 기울여 보는구나.”

“대신 조금만이에요. 기분 낼 정도만.”

“그 정도만 해도 어디야!! 가자 아들아!! 너의 승전을 기념하자꾸나!”

벌써 분위기에 취해버린 유미르가 한껏 팔을 치켜들며 앞장섰다.

비체도 흥에 겨운지 연신 콧노래를 불렀다.

“저렇게도 좋으실까, 하여간…….”

말은 그렇게 해도 아레나 역시도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렇게 아시테르 가족의 성대한 고기파티가 벌어졌다.

아시테르가 잡은 오르보어의 크기가 어찌나 크던지 해체하고 손질하는 데만 한세월이었다.

그동안 비체는 아껴두었던 술까지 가져와 아시테르에게 따라주었다.

“원래 술은 가족들에게 배우는 거란다.”

유미르가 아시테르에게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자 아시테르도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동안 유미르와 비체가 마시는 모습들을 눈대중으로 보며 배웠기 때문에 크게 어색하진 않았다.

“호오, 요놈 봐라.”

아시테르의 행동을 보며 유미르가 괜히 눈을 찡긋거렸다.

비체도 함께 술잔을 들며 술을 마셨다.

아시테르가 술잔을 코끝에 가져갔다.

알싸한 향기가 코안쪽까지 찔렀다.

혀끝을 술에 가져가니 짜르르한 느낌이 전해졌다.

비체와 유미르가 술잔을 비우는 것을 보고 아시테르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술잔을 마저 기울였다.

“으앗……!”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술방울이 그 존재감을 드러내듯 알싸함을 전해왔다.

뱃속이 뜨거워지는 이상한 느낌에 아시테르가 손으로 배를 어루만졌다.

“흐흐, 처음 술을 마셔본 소감이 어떠냐?”

“써요…….”

“그렇지?”

유미르는 그저 재밌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비체도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아시테르에게 새로 잔을 따라주었다.

“할아버지랑 아버지는 이런 걸 대체 왜 마시는 거예요?”

“글쎄다. 감성에 좀 더 젖어들기 위해서?”

“에?”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아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비체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쉽게 말하면 오늘처럼 기쁜 날 더욱 순수하게 기뻐하기 위함이다.”

“아아……!”

조금은 감이 잡혔는지 아시테르가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어도 가슴에 와 닿는 말은 아니었다.

유미르가 그런 아시테르를 향해 큼지막한 고기를 건네주었다.

발갛게 잘 익은 고기가 맛있는 냄새를 잔뜩 풍겼다.

“자, 네가 직접 잡은 맛있는 고기다. 술만 먹으면 금방 취해. 그러니 안주도 꼭 잘 챙겨먹어야 한다.”

“네!”

아시테르는 고기를 받아들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안에 있는 육즙이 입 안 가득 진하게 퍼졌다.

별다른 양념도 안했는데 고기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맛있지!? 그때 바로 한 잔 걸쳐야 하는 거다!”

“에!? 그럼 고기 맛이 사라지잖아요!”

“아냐. 그게 아니고 황홀한 고기 맛에 이 기특한 술맛을 더해주는 거다!”

유미르가 술잔을 높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분주히 먹을 것들을 준비하던 아레나도 함께 잔을 들어올렸다.

“자꾸 나만 빼고 마시면 섭섭해요 정말.”

“오늘은 당신도 마시려고?”

“그래야죠!”

“좋아 좋아! 오늘은 내일이 없을 것처럼 마시자고!”

한껏 기분이 좋아진 유미르가 아레나와 잔을 부딪쳤다.

아레나가 술을 마시는 것은 처음 보는 장면이었기에 아시테르가 유미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머니가 술을 마시는 건 처음 봐요.”

“아하하! 그러냐? 근데 걱정마라. 아레나는 마법기사단에서도 술 잘 마시기로 유명했어.”

“네? 어머니가요?”

“그래! 멋모르고 덤벼들었다가 길바닥에 나뒹군 기사단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흐흐.”

유미르의 얘기에 아레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에겐 아직까지도 볼이 화끈해지는 과거 일화들이었다.

“너는 모를 거다. 그때 네 엄마가 얼마나 아름답고 섹시해 보였는지!”

“당신 벌써 취했어요? 아시테르 앞에서 별소릴…….”

아레나가 유미르의 어깨를 괜히 툭툭 때리며 말했다.

비체는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이런 화목한 분위기를 느끼며 아시테르도 절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에 가득 담아가야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제가 던전 밖으로 나가면 이렇게 또 언제 온 가족이 밥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아하하!! 걱정마라 아들아. 엄마아빠 그리고 비체 할아버지는 언제고 이곳에서 널 기다릴 테니까. 아니면 네가 보고 싶다고 하면 우리가 가면 되는 거고. 그게 가족 아니겠니.”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비체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이곳을 오래 비우면 안 되니까 제가 종종 어비스 던전으로 찾아오는 것으로 할게요.”

“그래 알겠다.”

아시테르의 말에 유미르와 아레나, 비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잔을 내려놓은 비체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시테르. 아직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너는 이미 굉장한 실력을 지니고 있단다.”

비체의 말에 유미르와 아레나가 동의했다.

두 사람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아시테르는 놀라울 만큼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어비스 던전은 대체적으로 마력을 다루기에 쉽지 않은 장소였다.

다른 이들이라면 제약을 느끼는 장소에서 아시테르는 태어나고 자라왔던 것이다.

비체가 아시테르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말했다.

“너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어비스 던전과 바깥은 달라. 아마 모르긴 몰라도 너라면 바깥에서 이곳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다. 또래 중에서 널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녀석들도 많이 없을 거고.”

“정말 그럴까요?”

“물론! 요령 한번 피우지 않고 하루도 빠짐없이 단련 해온 만큼, 이렇게 훌륭한 스승들을 둔만큼! 너는 이미 여러모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단다. 다만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또 너는 그 힘을 왜 필요로 했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네!”

“그래 그거면 됐다. 내가 한 말들은 잘 새겨두었겠지?”

“물론이에요 할아버지.”

“후훗, 똘똘한 너니까 이 할애비도 잘 해낼 거라 믿으마. 이제 이 어비스 던전 밖으로 나가서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고 느끼고 또 배워봐라.”

다정한 비체의 목소리에 아시테르가 울컥 눈시울을 붉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입술의 들썩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녀석…….”

그런 아시테르를 비체와 유미르, 아레나가 위로해주었다.

아시테르가 들고 있던 잔을 한 번에 비워버렸다.

“오우야… 우리 아들 벌써부터 술꾼의 기질이 보이는 것 아니야?”

“당신?”

유미르가 놀라 말하는데 아레나가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유미르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것이 얄미웠는지 아레나가 그의 살을 꼬집었다.

“아얏!”

따끔함에 유미르가 소리치자 아시테르가 그새 웃음을 터트렸다.

“자아 우리는 마저 마시도록 하자꾸나.”

비체가 다시 한 번 잔을 권하며 술자리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일찍 취한 유미르는 어느새 자리에 드러누워 잠에 들었다.

“아시테르.”

얼굴이 불콰해진 비체가 아시테르의 이름을 불렀다.

술잔을 마저 비운 아시테르가 그를 돌아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계속 듣는 것도 지겨울 테니 딱 한 마디만 더 하고 싶구나.”

“아니에요 할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해주시는 말씀들이 너무나 좋아요.”

“후후, 녀석.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힘들 땐 언제든 이 어비스로 돌아와 쉬어도 좋다는 거다. 너는 언제까지고 내 손자고 유미르와 아레나의 아들이니까. 얼마든지 응석부리고 어리광을 피워도 좋다는 얘기야.”

“네 알겠어요 할아버지.”

비체가 아시테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의 두툼하고 거칠게만 느껴졌던 우악스런 손이 오늘따라 다정하게 느껴졌다.

“고맙다. 강하게 잘 자라주었구나.”

해맑게 웃어 보인 비체가 서서히 옆으로 쓰러졌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올라 그도 이제야 잠에 든 것이다.

아시테르가 유미르 쪽을 바라보았다.

아레나도 어느새 유미르의 곁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슬쩍 몸을 움직여 유미르와 아레나의 사이로 몸을 끼워 넣었다.

잠꼬대를 하던 유미르가 아시테르의 목을 감았고 아레나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아시테르도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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