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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4화 (24/424)

024화 세상 밖으로

아시테르가 손가락을 돌리자 천천히 게이트의 문이 열렸다.

그동안 부지런히 게이트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던 아레나가 곁에 섰다.

그녀의 시선은 유미르에게로 향해 있었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 아레나를 보며 유미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심히 다녀와요.”

그는 천천히 다가가 아레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유미르의 품에 안긴 아레나가 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금방 다녀오도록 할게요.”

“아니야. 천천히 와도 돼. 그동안 던전에서 고생만 했는데 이번에 왕국까지 가서 편안히 쉬다 와야지. 나 만나고 늘 고생만 했는데 말이야.”

“그런 말 말아요. 그리고 고생은 저 혼자만 했나요.”

아레나가 유미르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미안해하거나 어쩔 줄 몰라 할 때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어쨌거나 가서 푹 쉬다 오라는 얘기야. 거기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만날 수 있잖아. 아시테르에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소개시켜주고 일가친척들도 소개시켜줘야지. 다들 얼마나 기뻐하시겠어.”

유미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레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 오기 전까지 아레나의 머릿속을 괴롭히는 걱정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 바로 부모님의 반응이었다.

“정말 기뻐하실까요? 되려 엄청 화를 내시는 것은 아닐지…….”

“아냐, 분명 기뻐하실 거야. 세상에 어느 부모가 이런 일로 화를 내시겠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알겠어요.”

위로가 되었는지 아레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시선이 이번엔 비체에게로 향했다.

비체도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그동안 이 되먹지 못한 던전에서도 잘 살아왔잖니. 어디 그뿐일까. 이곳에서 강해진 것은 비단 아시테르와 유미르만이 아니야. 아레나 너 또한 굉장한 성장을 이루었다. 너는 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잘 모르고 있어. 독에 중독되었던 그때의 첫만남 때 보다 말이야.”

“늘 감사해요 비체님.”

“너는 유미르의 아내이자 아시테르의 어머니이기 전에 네 어머니, 아버지의 소중한 딸이다. 내가 비록 자식은 없지만 죽은 줄 알았던 딸이 오랜 세월에 걸쳐 돌아온다면 틀림없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거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걱정마라. 이곳에 우리가 있지 않느냐. 아시테르만이 아니라 네게도 이곳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장소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볼일이 끝나고 나면 저는 먼저 돌아올 거예요. 그러기 위해 우리 아들이 깜찍한 선물을 준비해주었잖아요.”

아레나가 아시테르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아시테르가 쑥스러움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이곳을 떠나기 전 가족들을 위한 선물을 남기고 싶었다.

던전에서 선물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기에 그는 유미르와 아레나, 비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그리하여 도달한 결론이 바로 게이트였다.

당장 아레나와 아시테르가 나가면 유미르와 비체는 또다시 어비스 던전에 갇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아레나도 자신이 함께 하지 않으면 어비스 던전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들을 위한 상시 게이트를 만들어주는 것이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몇 달을 고심한 끝에 아시테르는 끝내 상시 게이트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냥 만든 게이트는 금방 사라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마력이 깃든 마석을 이용한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마석을 매개체로 이용한 게이트는 오랫동안 유지가 되었다.

거기에 비체의 특별한 힘과 마법진이 더해지니 놀랍게도 어비스 던전의 게이트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제 유미르와 비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비스 던전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거기다 던전 밖에도 던전의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놓았으니 아레나도 언제든 돌아오고자 하면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던전 밖으로 가는 것이 마냥 설레지만은 않았던 아시테르였는데, 상시 게이트가 완성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비체가 아시테르를 한 번 끌어안아주었다.

“조심히 다녀오너라. 막상 이렇게 보내려니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구나. 나도 많이 늙었나…….”

“너무 걱정마세요 할아버지.”

“그래그래. 아무튼 이제 슬슬 가보렴.”

비체와 인사를 나눈 아시테르가 이번엔 유미르의 품에 안겼다.

유미르도 말없이 아시테르를 꼬옥 안아주었다.

“잘 다녀와라 아들.”

“아버지는 제게 하실 말씀이 그것뿐이에요?”

“이것 말고 더 말할게 뭐가 있니? 어차피 우리 아들은 다 잘해낼 텐데. 그다지 걱정 없다.”

“역시 우리 아버지.”

“아! 한 가지 걱정이 있기는 하구나.”

“그게 뭔데요?”

“상대가 누구든 살살해라. 그 친구들도 남의 집 귀한 자식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당차게 대답한 아시테르가 이만 게이트로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아레나도 아시테르와 함께 게이트를 나섰다.

슈와악!

바람이 부는 소리와 함께 게이트의 문이 닫혔다.

아시테르와 아레나의 모습이 사라지자 유미르가 괜히 입맛을 다셨다.

“갔군요.”

“왜? 아쉬우냐?”

“조금은요. 아쉽고 섭섭하고 서운하고 기대도 되고… 뭐 이런저런 기분들이 다 느껴지고 있습니다.”

“후후, 다 그런 것 아니겠느냐.”

비체도 이만 몸을 돌렸다.

말은 안 해도 그 또한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눈치였다.

이에 유미르가 피식 웃으며 비체의 가까이로 붙었다.

“스승님. 그래도 제가 이렇게 곁에 있지 않습니까?”

“시끄럽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곁에 있으니 외로워 마시고 기운 내십시오!”

“네가 있어서 더 기운 빠진다. 대체 언제쯤이면 속 시원하게 마수들을 다 처리해낼 거냐?”

“크흠… 이 못난 제자가 더 열심히 해보이겠습니다!”

“결과로 보여라 결과로! 아시테르는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지 이 녀석은… 에잉.”

말과 다르게 비체의 입꼬리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가끔 이렇게 살갑게 굴어오는 유미르가 싫진 않았던 것이다.

한편, 던전 밖으로 나온 아시테르와 아레나는 곧바로 이스트 왕국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시테르는 처음 가보는 곳들에 잔뜩 신나있는 모습이었다.

아레나도 오랜만에 돌아가는 고향에 조금은 상기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숲길을 헤치며 걸어갔다.

“근데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는 어떤 분이세요?”

“흐음… 외할아버지는 한 마디로 강직하신 분이시고 외할머니는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분이시지?”

“마침내 두 분을 뵐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레요.”

“두 분께서도 우리 아들의 모습을 보면 반가워하실 거야.”

아시테르와 아레나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먼발치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레나와 아시테르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 개의 짐수레를 끌고 이동하는 것으로 보아 상단의 인물들 같았다.

“마침 잘 되었구나. 저 사람들과 함께 갈 수 있을지 물어봐야겠는걸.”

아레나는 거침없이 상단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갑자기 숲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오자 상단 사람들이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중년의 사내가 두 눈을 끔뻑였다.

“저어… 누구십니까?”

사내는 질문을 하면서 아레나와 아시테르의 행색을 살폈다.

차림새를 살피는 사내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제야 아레나는 자신과 아시테르의 행색이 어떤지 깨달았다.

팅!

사내의 뒤편에 있던 누군가가 아레나를 향해 은화를 튕겼다.

짧게 머리를 자르고 눈꼬리가 올라간 모습의 사내가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상단이 지나가는 걸 보고 구걸이나 하러 온 거지들 같은데. 그 정도면 되었지?”

“도우지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페르모님. 더 상대할 가치도 없습니다.”

“허어…….”

페르모가 아레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행이 아레나는 도우지의 행동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페르모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일행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게, 혹시 어디로 가는 길이신지 여쭈어도 될까요?”

아레나의 목소리에 페르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 외로 그녀의 힘 있는 목소리와 기품이 느껴지는 어조에 놀란 것이다.

“우리는 왕도로 가고 있던 길입니다.”

“아…! 그렇다면 잉그레시아로 가는 길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동행해도 될까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가는 산길은 험준할 겁니다.”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아들과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들이라는 말에 페레모가 놀란 표정을 보였다.

다른 일행들도 사뭇 놀란 눈치였다.

그들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낀 아레나가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아들? 동생이 아니고?”

“그러게. 저렇게 큰아들을 두기엔 너무 젊어 보이는데.”

이제야 그들이 왜 놀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상인들이 뒤편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월이 꽤나 흘렀다곤 하나 아레나의 미모는 여전했다.

어비스 던전의 험한 환경도 아레나의 미모만큼은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어비스 던전에서 비체와 유미르가 가져다준 몇 가지의 영약들 덕분에 아레나는 지금까지도 상당히 젊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남모를 배려(?)였지만 아레나는 그들이 가져다준 영약들이 어떤 효과들을 지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그런 유미르와 비체의 노력 덕분에 아레나는 지금도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들이 이렇게 이상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농담이 너무 심한 것 아냐? 아들이라니. 그보다 진짜 천민치고 너무 아까운 미모이긴 한 걸?”

조금 전 은화를 던졌던 도우지란 사내가 아레나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말했다.

은근하게 입술을 핥는 그를 보며 페르모가 고개를 내저었다.

“도우지님. 더 이상 실례되는 말들은 그만 멈춰주십시오.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아무튼 상황은 알았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잉그레시아까지 함께 가도록 하시죠.”

“감사합니다.”

아레나가 짧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아시테르와 함께 상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도우지가 아레나 쪽으로 다가왔다.

“이 근처엔 흉포한 몬스터들이 많다. 간혹 상단을 노리는 도적단 녀석들도 등장하고.”

“그렇군요.”

“참고로 우리 하알로 용병단은 그런 상황이 와도 너희 두 사람은 지키지 않아. 우리에게 보호를 받고 싶으면 비용을 지불해라. 뭐, 보아하니 돈은 따로 없을 것 같고… 하지만 괜찮아. 다른 쪽으로 성의를 보이면 되거든.”

도우지가 음흉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아레나는 도우지를 포함한 하알로 용병단원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세상에 나와도 여전히 이 같은 삼류 용병단은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들을 상대할 필욘 없었다.

아니,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이들이었기에 아레나는 깔끔하게 그의 말을 무시했다.

다행이 아시테르는 다른 것들을 살펴보느라 도우지의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레나의 생각과 다르게 아시테르도 도우지의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알로 용병단이 아레나와 자신을 두고 계속해서 수군거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레나가 직접 나서지 않았기에 그도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아레나는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레나가 참는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분위기를 눈치 챈 페르모가 먼저 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두 사람의 보호비라면 우리가 지불하도록 하겠네.”

“페르모님.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도우지가 손사레를 쳤지만 그의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의 노림수는 다른 데에 있었지만 페르모에게 이렇게 의뢰비용을 받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때 아레나가 돈을 건네는 페르모를 말렸다.

“맞아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와 제 아들은 알아서 몸을 지킬 테니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요. 그럴 수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아레나의 단호한 태도에 페르모가 입맛을 다시며 돈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못내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아레나는 이번에도 역시 괜찮다는 신호를 취해보였다.

“하! 꼴에 자존심은 있다 이건가?”

돈을 받을 수 있었던 기회이건만 아레나 때문에 무산되자 도우지가 대놓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뒤에 가서 지켜달라고 해도 우리는 진짜로 안 지켜줍니다?”

“크흐흐, 살려 달라 울며불며 애원해도 말이야.”

“우릴 너무 원망하지 말라고.”

하알로 용병단원들이 이죽거리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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