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왕도로 가는 길 (2)
도우지에 이어 다른 하알로 용병단원들도 아레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 모두가 어찌하지 못했던 그레이베어 무리를 아레나는 너무도 손쉽게 정리해버렸다.
그녀의 경이로운 마법실력 앞에 그들 모두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아레나가 마음만 먹으면 하알로 용병단쯤은 아무렇지 않게 몰살시켜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놀란 것은 하알로 용병단만이 아니었다.
상인들도 아레나의 마법실력에 기함하고 있었다.
특히나 페르모는 손까지 부르르 떨며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레나의 시선이 도우지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도우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어서세요.”
“아… 아, 네!”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여러분들의 보호는 필요 없을 거라고.”
“그렇군요… 제가, 제가 정말 경솔했습니다…….”
깊이 고개 숙인 도우지가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전했다.
이후로 도우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왕도로 향하는 동안 아레나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아레나뿐만 아니라 아시테르도 지극 정성으로 신경 써 주었다.
덕분에 페르모나 다른 상단 사람들이 아레나와 아시테르의 곁에 다가가기를 어려워했다.
그레이베어를 그렇게 쓰러트릴 실력이라면 당연히 예사 인물이 아니란 얘기였는데, 안하무인처럼 행동하던 하알로 용병단까지 저렇듯 아레나와 아시테르를 귀하게 모시니 선뜻 다가가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아레나가 오히려 그들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아레나는 자신과 아시테르에게 잘해준 상단 사람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몇 없는 식량까지도 나눠주었던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마음인지 잘 알기 때문에 그녀는 상단 사람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했다.
“실례되는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두 분은 어디서 오셨는지…….”
대화를 나누던 도중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마 그레이베어를 처치했을 때부터 물어보고 싶었을 터였다.
하지만 아레나는 본인과 아시테르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저는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이에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물론 그렇게 말한들 곧이곧대로 알아들을 인물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불편해하는 것 같았기에 굳이 더 묻지 않았을 뿐이다.
어쨌든 그레이베어 무리가 습격한 이후로 다행히 다른 몬스터들의 습격은 없었다.
자주 출몰한다는 도적단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상단 상인들이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도 만약 그들이 나타났다 해도 또다시 아레나가 있으니 안심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상단 행렬은 왕도 잉그레시아가 보이는 곳까지 당도했다.
“고맙습니다.”
아레나와 아시테르가 잉그레시아로 도착해 감사인사를 표했다.
그러자 페르모가 손사레를 쳤다.
“아닙니다. 두 분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편하게 왕도까지 왔는지 모릅니다. 그나저나… 혹시 신분을 증명할만한 것은 가지고 계십니까?”
“네?”
“아아… 역시 모르셨군요. 현재 잉그레시아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철저하게 신분 검사를 합니다. 신분을 증명 받은 이가 아니면 잉그레시아 안으로는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아레나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확인한 페르모가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마침 길드의 상인을 증명하는 신분패가 남아 있었다.
“만약에 신분을 증명할만한 것이 없다면 이거라도 사용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단과 함께 들어오는 거니까 아주 정밀하게 검사하진 않을 겁니다.”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누님! 원하신다면 저희들의 용병패를 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 분야로는 저희들이 또 전문이라 충분히 경비병들의 검사를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도우지가 자신 있게 손을 번쩍 들며 말했지만 아레나가 오히려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자랑은 아닌 것 같군요.”
“앗, 아아…….”
“그리고 누가 누님이에요?”
“하하…! 저희가 아직 그 정도 사이는 또 아니었나보군요…….”
도우지가 돌아서며 인상을 구겼다.
그렇지만 곧 표정을 풀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아레나와 아시테르의 비위를 맞췄던 이유는 저 수도 안으로만 들어가면 다른 동료들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암살에 자신 있는 몇몇 용병들을 불러온다면 제아무리 아레나라도 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스스로가 아레나에게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도우지는 남몰래 아레나를 향한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우리가 잉그레시아로 들어가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
아레나가 담담하게 말하자 페르모는 하는 수 없이 상단을 출발시켰다.
어차피 아레나의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자신이 도와주면 될 일이었다.
페르모가 아레나의 곁으로 슬쩍 다가갔다.
그는 품에서 작은 돈주머니를 꺼내 아레나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요?”
“받아두세요. 잉그레시아 안으로 들어가면 생활할 돈이 만만치 않게 들어갈 겁니다.”
“그래도 이건…….”
“뭣하면 이곳까지 우리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준 비용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다들 말은 안 해도 하알로 용병단보다 아레나 씨가 곁에 있어서 더욱 마음 편히 올 수 있었습니다.”
“마음만 받도록 할게요. 다들 이곳까지 어렵게 오셨고 또…….”
“아유, 저희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아레나 씨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그레이베어의 밥이 되었거나 놈들을 피해 달아나느라 잉그레시아까지 무사히 도착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주시고 넣어주세요.”
페르모가 억지로 아시테르의 품에 돈주머니를 넣어주었다.
아레나가 끝까지 거부할 것을 생각해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아시테르의 품에 넣어준 것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아레나도 더는 그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동안 상단은 곧 잉그레시아 성문에 다다랐다.
그들을 발견한 경비병들이 상단을 멈춰 세웠다.
갈색머리칼에 다부진 체격을 갖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저는 이곳의 임시 경비대장을 맡고 있는 가록스라고 합니다. 어디에서 온 상단입니까?”
“저희는 카푸아로에서 온 상단입니다.”
페르모가 신분증명서를 꺼내며 말했다.
가록스가 신분증명서를 받아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동안 페르모는 그가 걸친 로브에 주목했다.
남색깔의 로브는 순록 마법기사단의 상징이었다.
“마법기사단의 단원 분께서 이곳에 계시다니…….”
“후후, 현재 왕국 상황이 좋지만은 않지 않습니까. 여기저기 일손이 부족하니 저희 마법기사단도 다방면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가록스가 신분증명서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뒤쪽을 살폈다.
“흐음… 그런데 적혀 있는 인원과 차이가 있군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도중에 합류한 인원들이 있습니다.”
“본래 합류하기로 한 일행들이었습니까? 보아하니 상단 쪽 인물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가록스가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그의 기세에 조금 위축되었는지 페르모가 슬쩍 아레나와 아시테르의 눈치를 살폈다.
금방이라도 도와줄 것처럼 얘기하던 도우지와 하알로 용병단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싹 닫고 있었다.
‘후후, 이곳에 마법기사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겠지. 어디 한 번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보자고.’
도우지는 사실 동료들을 통해 이곳에 마법기사단이 있다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본래 이곳에 있는 경비병들은 몰래 돈을 찔러주는 식으로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들이 있었지만 마법기사들은 달랐다.
도우지는 팔짱을 끼며 이 상황을 조용히 지켜봤다.
가록스가 아레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뒤편에도 사람들이 이어졌지만 양옆에도 대기중인 사람들이 서 있었다.
“빠른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가록스가 아레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그녀의 얼굴이 왠지 낯설지 않음을 느꼈다.
아레나는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그에게 건넸다.
“이거라면 신분이 증명 될까요?”
그녀에게서 물건을 건네받은 가록스가 그것을 살폈다.
붉은 화염이 양각된 배지였다.
이를 본 가록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실례했습니다.”
가록스가 배지를 다시 아레나에게 돌려주며 고개를 숙였다.
마법기사가 고개까지 숙이자 상인들과 하알로 용병단원들은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행색으로 상단 사람들과 함께 오신건지…….”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이제부턴 저희가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가록스가 아레나를 데리고 가려하자 아시테르가 함께 움직였다.
그러자 가록스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이를 눈치 챈 아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일행입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렇다 하더라도 신분 검사를 진행했을 테지만 상대는 프로메테 가문이었다.
잉그레시아 내에서도 강한 힘을 자랑하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가록스로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가 손짓하자 경비병들이 상단을 그대로 통과시켜주었다.
그곳을 통과하면서도 페르모는 경직된 얼굴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프로메테 가문이라니…….”
이스트 왕국에서 엄청난 성세를 자랑하는 가문 중 하나가 바로 프로메테 가문이었다.
거기다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화염을 다루는 강력한 마법을 사용했다.
“아, 그래서 그때…….”
페르모가 뒤늦게 일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아레나가 보여준 무시무시한 화염 마법들.
그녀가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이라면 그 마법들도 자연스레 설명이 되었다.
“허어… 그간 엄청난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구나.”
페르모뿐만 아니라 다른 상인들도 아차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헛바람을 집어삼킨 것은 바로 도우지였다.
그는 아레나가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인 것에 그 누구보다 놀란 일인이었다.
“아주 엿 될 뻔했잖아? 아니 이미 엿 된 건가?”
그제야 스쳐지나가는 기억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본인이 아레나에게 행한 말과 행동들을 떠올렸다.
그는 자연스레 두 손을 자신의 목에 가져갔다.
순간 자신의 목이 떨어져나가는 상상을 하자 간담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반면 프로메테 가문에 대해 잘 모르는 몇몇 단원들이 도우지의 곁에 다가와 말했다.
“단장. 우리 저 건방진 여자한테는 언제 복수할 거야?”
“닥쳐.”
“뭐? 갑자기 왜 그래?”
“오래 살고 싶으면 닥치라고!! 우리는 모두 저 녀… 아니 저 분에 대해서 전부 잊는다!”
“하?”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해! 계획이 바뀌었어. 나머지 잔금만 받고 우린 신속히 여길 떠나자.”
마른 침을 삼킨 도우지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지금까진 아레나가 죽을 자리로 들어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까놓고 보니 죽을 자리로 들어가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제기랄, 재수가 없을 라니까…….”
페르모에게 의뢰비를 청구한 도우지가 서둘러 하알로 용병단을 이끌고 왕도 잉그레시아를 벗어났다.
그는 잉그레시아에서 멀어지면서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이 따로 추적해오는 사람들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알로 용병단이 부리나케 왕도에서 벗어나는 동안 아레나는 페르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아이고,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페르모가 허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런 페르모를 아레나가 일으켜 주었다.
“제게 이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일 뿐이에요.”
“하지만 귀족인 아레나님에게 어찌…….”
“귀족이니 평민이니 천민이니 하는 것은 더 이상 제게 중요치 않아요. 중요한 것은 제가 어려울 때 페르모님과 다른 상인 분들께서 기꺼이 도움을 주셨다는 거죠. 저는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거구요.”
“은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게다가 도움이라면 저희도…….”
“아니에요. 밖으로 나와서 여러분들의 따뜻한 마음씨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아레나가 페르모를 비롯한 다른 상단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상단 사람들이 감동받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프로메테 가문의 귀족이 이렇게까지 자신들에게 예를 차리며 말해주니 몸 둘 바를 몰랐던 것이다.
아레나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들과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