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프로메테 가문의 연회
크리울로스의 물음에 아레나가 식사를 멈추었다.
마침내 이 시간이 다가오고 말았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식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들고 있던 식기를 차분히 내려놓았다.
입가를 닦은 아레나가 입을 열었다.
“아이의 아빠는 아버지께서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고?”
크리울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번뜩 한 사람 스쳐가는 인물이 있었다.
“너 설마……!”
크리울로스가 알만한 인물이면서 아레나와 함께 사라진 인물.
그것만 종합 해봐도 아레나가 말하려는 인물이 누구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네 맞아요. 그 사람이에요.”
쿠웅!!
그동안 웃음 짓기만 하던 크리울로스가 처음으로 정색하며 탁자를 내리쳤다.
쌍심지가 켜진 그를 보면서도 아레나는 담담하기만 했다.
어느 정도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었다.
테레니스도 누군지 짐작한 듯 얼굴을 굳혔다.
그 사이에서 아시테르만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떠올린 사람은 유미르다! 정말 그 놈이 맞는 거냐!?”
“네.”
“이럴 수가!”
크리울로스의 불같은 시선이 아레나를 쏘아보았다.
푸글이 안절부절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자식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그 사람은 죽었어요.”
아레나의 말에 크리울로스뿐만 아니라 아시테르도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레나가 아시테르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잠자코 가만히 있으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크리울로스가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죽었다고……?”
“네. 그 사람은 마지막까지 모두를 살리다 결국 전장에서 전사했어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크리울로스가 씁쓸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유미르의 아이라… 하필이면…….”
“아버지께서도 유미르를 좋게 보셨잖아요.”
“그래. 그랬지. 우리 왕국을 위해 온 몸을 바쳐 싸워온 훌륭한 마법기사였으니. 거기다 그 출신으로 단장의 직위까지 오른 것도 대단했고. 충분히 인정할만한 사내였다.”
“하지만 제 남편감으로는 아니란 건가요.”
“…미안하구나.”
“그가… 천민 출신이기 때문이겠죠.”
아레나의 말에 크리울로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아레나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과거 유미르를 마음에 두고 있을 때도 크리울로스는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가 훌륭하고 대단한 사내인 것은 맞지만, 천민출신은 가문에 들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애석하게 되었구나. 천민이 아니었다면 더욱 재능의 꽃을 피워 충분히 더 높은 곳까지 노려볼 수 있을만했는데.”
과거 언젠가 크리울로스가 유미르를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동시에 아레나가 유미르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천하의 크리울로스가 그런 말을 꺼내게 하는 사내가 누구인지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어쨌거나 결국 유미르는 크리울로스의 예상을 깨고 마법기사단을 세워 당당히 단장의 자리에 올라섰다.
크리울로스는 그때도 유미르의 일에 진심으로 축하를 전하긴 했으나, 그가 아레나와 엮이는 것엔 그다지 달갑지 않아 하는 눈치를 보였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어쩌면 그때당시 유미르가 아레나와 거리를 두려 했던 것도 크리울로스의 은근한 압박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런 쪽으론 지나가는 말이라도 전혀 꺼내지 않는 유미르였으니 어디까지나 아레나의 추측일 뿐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은 잘 알겠어요.”
더 이상 물어볼 필요도,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 크리울로스가 어떻게 행동할지 눈에 훤히 보였다.
“아레나.”
“네, 아버지.”
“나는 천민의 핏줄이 섞인 아이를 우리 가문에 들일 수 없다. 하지만. 네가 다른 귀족가의 자제와 결혼하여 저 아이를…….”
“죄송해요 아버지. 그럴 순 없어요.”
“아직 내 얘기가 다 끝나진 않았다만.”
“더 들어볼 필요도 없는 얘기예요.”
“아레나 너……!!”
크리울로스가 발끈했다.
그러나 이 꿈같은 자리에서 불같이 화를 내며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크리울로스가 말을 이었다.
“유미르는 죽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제 남편은 오직 한 명뿐이에요. 다른 새로운 사람을 마음에 둘 순 없어요.”
“또 이렇게 말을 끊는구나.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냐?”
인상을 쓴 크리울로스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아레나의 표정이 단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크리울로스가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후우… 네가 이제는 어린 아이도 아니고 다 큰 아들까지 두고 있는 네게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우선은 알겠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해보자꾸나.”
크리울로스가 먼저 한 수 접어주었다.
이런 경우도 흔치 않았기에 테레니스도 곁에서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이 오랜 세월 끝에 돌아왔기 때문인지, 세월이 많이 흐르며 그가 유(柔)해진 것 인진 몰랐다.
어쨌거나 크리울로스가 물러나주었기에 아레나도 자연스레 한 발 물러섰다.
그녀 역시도 이런 일로 크리울로스와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아시테르를 위해서도 이런 얘기를 계속 나누고 싶진 않았다.
“참. 이렇게 된 것 너와 아시테르 모두 곧 있을 연회에 참석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반가운 얼굴들이 여럿 참석할 거다.”
“죄송해요.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진 않아요.”
“그러냐…….”
크리울로스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 머물렀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아시테르를 보니 문득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아시테르라도 참석하게 해주는 것은 어떻겠느냐?
“아시테르를요?”
“그래. 그동안 나도 생각을 좀 해보겠다.”
“알겠어요.”
* * *
“우와…….”
준비되고 있는 만찬들을 보며 아시테르가 연신 감탄을 흘렸다.
난생 처음 보는 요리들이 오색찬란한 접시들에 올려졌다.
“후후, 맛있어 보이지요?”
“네. 저것도 이것도. 진짜 다 맛있어 보여요.”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연회가 시작되면 다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작은 도련님.”
“그런데 왜 제가 작은 도련님이에요?”
“아, 그렇군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아시테르 도련님께는 형님이 계십니다.”
“형님이요?”
“네. 마침 저기 오고 계시는군요.”
푸글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카데미의 학생복을 입은 훤칠한 청년이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시테르를 본 청년이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네가 아시테르구나?”
“네 맞아요.”
“안녕. 내 이름은 테오도라라고 한다. 만나서 정말 반갑다.”
테오도라라고 자신을 밝힌 청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시테르도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테오도라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시테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바로 고모님의 아들.”
그는 두 팔을 들어 아시테르를 안아주었다.
갑작스런 반응에 아시테르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정은 나도 대충 들었어. 누가 뭐라고 하든 이제부터 너는 내 동생이야.”
“네?”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부드러운 인상의 테오도라는 목소리까지도 다정함이 가득했다.
덕분에 아시테르의 경계심도 조금은 누그러지고 있었다.
아시테르를 본 테오도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네. 할아버지의 말씀 때문에 너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 동생이라고 당당히 밝히질 못하니…….”
“전 괜찮아요.”
“그래. 혹시나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물어보렴.”
그러나 다른 귀족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차례차례 도착하는 손님들이 그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테오도라는 아시테르의 곁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는 아쉬움이 남는 얼굴로 아시테르의 곁을 떠났다.
“금방 돌아올게. 그동안 구경 좀 하고 있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알겠지?”
“네, 다녀오세요 형.”
형이라는 말에 테오도라의 광대가 한껏 승천했다.
그는 다른 수행인의 팔에 붙들려 끌려가면서도 계속해서 아시테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테오도라의 태도에 아시테르도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푸글이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떠십니까?”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
“후후, 테오도라님이 저렇듯 좋아하는 모습도 오랜만에 보는군요. 아시테르님께서는 아직 잘 모르시겠지만 테오도라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어떤 점이요?”
“쟁쟁한 인재들이 즐비한 아카데미에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이고 계십니다. 게다가 최근 아카데미 최고 등급인 1등급으로 승급하시기도 했고요. 듣자하니 아카데미 내에서도 테오도라님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오오…….”
“마법 실력만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밖에 여러 방면으로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자신을 발전시켜나가는 분이시니, 아시테르님께서도 앞으로 테오도라님께 배울 점이 많을 겁니다.”
“정말 멋있는 형이네요.”
아시테르가 테오도라 쪽을 바라보았다.
연회장을 찾은 아카데미 학생들이 그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때 테오도라가 있는 곳으로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테오도라!”
“너희들 왔구나.”
그가 반갑게 맞이하는 이들은 바로 테오도라의 아카데미 동기들이었다.
테오도라의 기수는 아카데미 내에서 영광의 기수라고 불렸는데 그 이유는 바로 뛰어난 인재들의 향연 덕분이었다.
특히나 테오도라를 비롯한 마르쿠드, 자토, 세밀리아 네 사람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유명한 인사들이었다.
네 사람 모두 전례가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아카데미 내 최고 등급인 1등급에 올라선 인물들이었다.
테오도라 한 명만 해도 다른 기수에서는 독보적인 인물인데 해당 기수에 그런 인물들이 세 명이 더 튀어나온 것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인물이 바로 테오도라였다.
그가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뛰어난 실력은 물론 리더십까지 겸비하고 있어 다른 세 명이 은연중에 그를 리더 격으로 따라온 덕분이었다.
그런 테오도라의 가문에서 연회를 주최한다고 하니 이들이 오지 않을 리 없었다.
“화려하고 넓구나.”
“좋다.”
“어머, 역시 프로메테 가문.”
세 사람은 한 마디씩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프로메테 가문의 가주, 크리울로스가 연회장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좌중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 집중되었다.
“많은 귀빈 여러분. 모두 이 연회에 참석해주어 정말 고맙소.”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몇몇 귀족들의 감탄사가 들렸다.
이에 아랑곳 않고 크리울로스가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순 없으나 근래 우리 가문에 아주 큰 경사가 있었소. 그런 가운데 우리 가문에서 이렇게 연회를 열게 되었으니 더욱 기쁘지 않을 수 없소! 모두 함께 기꺼이 축배를 들어주시겠소?”
대부분의 귀족들은 크리울로스가 말하는 경사가 테오도라에 관련된 것인 줄로 짐작했다.
그가 자부심을 느껴도 될 만큼 테오도라는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크리울로스와 함께 축배를 드는 사이 아시테르는 다양한 음식들에 좀 더 집중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새로운 맛들이 그의 혀를 자극했다.
얼마나 맛있는지 점점 배가 차오르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사이 누군가 연회장의 중앙으로 나섰다.
“이렇게 모두 모였는데 마법 시연회가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오오!!”
“좋지요!”
사내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하나둘 반응하기 시작했다.
술과 음악이 함께 하고 있으니 이제 눈이 즐거워질 차례였다.
“이곳에 마법기사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와있으니 그들이 실력을 뽐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요?”
사내는 자연스럽게 시연회의 주인공을 아카데미 학생들 쪽으로 넘겼다.
사실 그는 일부러 테오도라를 위한 판을 깔아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