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밤중의 수련
“이게 뭐야?”
생명이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염호를 보며 아시테르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의 호기심에 테오도라가 뿌듯함을 느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때, 대단하지?”
“살아 있는 것 같아…….”
“살아 있어. 적어도 내 안에서는.”
테오도라의 알 수 없는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건 말건 테오도라가 염호의 머리를 만졌다.
불꽃이 넘실거리며 테오도라를 감싸 안듯 움직였다.
염호도 머리를 흔들며 그에게 기댔다.
“이 녀석의 이름은 카쿤이야. 예전에 내가 키우던 강아지 이름인데… 지금은 죽고 곁에 있지 않아.”
“카쿤을 못 잊어서 이렇게라도 함께 하고 싶었던 거야?”
“맞아. 조금 못나 보이나?”
“왜? 난 형이 너무나도 멋있어 보이는 걸?”
“후훗,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가문의 다른 분들은 이 마법의 뒷이야기를 모르셔. 그러니까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하자.”
“응.”
아시테르는 새삼스레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마침 테오도라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심심한데 마법 대결이라도 펼쳐볼까?”
“나랑 형이랑?”
“그래. 누가 더 강한지 한 번 승부해보고 싶지 않아?”
“좋지!”
아시테르가 당차게 답하며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휘링!
테오도라가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먼발치서 볼 땐 몰랐는데 막상 그를 앞에 두고 보니, 테오도라의 엄청난 마력량이 주는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아시테르의 두 손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자아, 그럼 간다!?”
“좋아 형!!”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불꽃이 허공으로 쏘아져나가기 시작했다.
* * *
잠이 오질 않아 밤잠을 설치던 아레나는 몸을 일으켜 뒤뜰을 산책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내리비치는 달빛을 보고 있으니 절로 유미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이는 지금 뭘 하고 있으려나. 설마 나 없다고 비체님이랑 마음껏 술판을 벌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레나의 걱정은 불행히도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미르와 비체 모두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그녀가 어비스 던전을 떠나가자마자 아껴두었던 술병을 마음껏 털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레나는 손에 끼워진 레티나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의 푸르스름한 색깔을 보고 있으면 그래도 마음이 안정 되었다.
“정말 신기한 반지야.”
언젠가 레티나의 반지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감돈 적이 있었다.
평소처럼 생활하던 아레나도 반지가 다른 빛을 띠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는데, 그날이 유미르가 마수들에게 된통 당해서 돌아온 날이었다.
그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레티나 반지가 붉은 빛을 띠며 알려준 것이다.
비체도 혀를 차며 유미르가 마수들 앞에서 방심했음을 핀잔했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로도 유미르가 마수들에게 크게 다칠 때면 반지는 어김없이 붉은 빛을 띠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찬란한 푸른빛을 유지하고 있으니 유미르에게도 별다른 일이 없다는 얘기였다.
투둥!
그때 아레나의 귓가에 거친 소리들이 들려왔다.
밤중이라 그런지 소리는 더욱 선명했다.
“누구지? 이 밤중에…….”
그녀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무장 쪽?”
어렸을 때 아레나가 숱하게 마법을 연습하던 장소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소리 차단 마법진까지 있는 연무장이건만 이 정도의 소리가 들린다는 얘긴 그만큼 안에서 강력한 마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설마 아시테르가?”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시테르는 연무장 쪽으로 걸음을 한 적이 없었다.
거기다 아시테르가 묻지 않는 이상 푸글이 이곳을 가르쳐줬을 리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시테르가 푸글에게 말하고 연무장으로 향했다면 푸글도 아레나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을 터였다.
그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우리 조카가 열심히 마법 수련을 하는가보네.”
테오도라는 얼마 전 아레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으니, 그것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 지금 시간에도 연무장에서 마법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막상 연무장에 도착해보니 안에 보이는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그녀가 예상한대로 테오도라였고 맞은편에 있는 다른 한 명은 아시테르였다.
둘을 본 아레나가 천천히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아레나가 이곳까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흐아압!”
“하압!!”
테오도라의 염호가 질주했고 불꽃나선이 허공을 갈랐다.
이어 아시테르의 두 주먹에 거센 불꽃이 피어났다.
파쾅!
아시테르가 두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불꽃나선이 흩어졌다.
테오도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쪽 손아귀를 펼쳤다.
“잘 봐. 이건 고모님께 배운 거다.”
테오도라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화염구슬 수십 개가 아시테르를 향해 빠르게 쏘아져나갔다.
“헙!”
헛바람을 집어삼킨 아시테르가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자 그의 발끝에서 뻗어 나온 불길이 하나의 장벽처럼 세워졌다.
이어 아시테르가 대지를 박차자 엄청난 속도로 그의 몸이 튕겨나갔다.
“미쳤다……!”
아시테르의 마법을 본 테오도라의 입 밖으로 절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는 지지 않겠다는 듯 세 개의 불꽃나선을 일으켰다.
아시테르가 회전하며 화염구슬들을 모두 막아내었다.
이어 그의 두 주먹이 불꽃나선을 부쉈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아름다워 마치 일렁이는 불꽃과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림없어!”
테오도라가 두 손을 내리자 허공에 떠올랐던 화염구슬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아시테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내… 내 마법이잖아!”
“응 맞아! 미안!”
“너무해!”
아시테르가 화염 장벽을 만들며 화염구슬들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그가 깜빡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염호의 존재였다.
화르릉!
바깥으로 돌아온 염호가 아시테르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으압……!”
아시테르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염호가 아시테르의 위로 날렵하게 올라탔다.
“아이고!”
바닥에 부딪힌 탓에 아시테르가 통증이 느껴지는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그를 내려다보던 염호가 곧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하하, 염호도 네가 마음에 드나봐.”
“그러게. 진짜 신기하네.”
염호의 얼굴을 두 팔로 끌어안은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했다.
염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테오도라의 마음처럼 따뜻했다.
“두 사람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연무장으로 들어선 아레나가 말했다.
그녀가 오는 줄도 모르고 마법 대결을 펼치던 테오도라와 아시테르는 이제야 놀란 얼굴을 했다.
“고모님!”
“어머니!”
두 사람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아레나의 앞에 우뚝 섰다.
아레나가 눈매를 좁히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설마 벌써부터 형제 싸움을 한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맞아. 그럴 리가요 어머니!”
아레나의 물음에 테오도라와 아시테르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 와중에 아시테르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아레나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테오도라 형은 정말 대단해요!”
“음?”
“조금 전 마법 대결을 펼쳤는데 제가 져버리고 말았어요. 마법 실력이 워낙 대단해서 못 당하겠어요.”
아시테르의 말에 아레나가 피식 웃었다.
테오도라는 이미 마법기사단에 들어가도 손색없을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
그런 테오도라와 호각으로 마법 대결을 펼쳤다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정작 아시테르 본인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대체 어떻게 하면 그 나이에 그런 실력을 가질 수 있어? 정말 감탄의 연속이었다고… 특히나 마지막에 보여준 마법들은 예상치도 못했어. 세상에 신체능력을 그렇게 강화시키다니. 솔직히 무서울 정도였어. 아카데미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전투스타일이었는걸.”
테오도라도 아시테르의 실력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머리위로 불꽃의 비를 만들어낼 때랑 불기둥을 형성해 낼 때는 아직 서툰 면이 보였는데, 몸에 불꽃을 두를 때는 테오도라도 바짝 긴장해야만 했다.
“불꽃을 몸에 두르고 육탄전을 벌이다니…….”
그동안 테오도라로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설사 생각해내었다 한들 그로선 시도조차 하지 못할 방법이기도 했다.
“위력이면 위력, 마력 컨트롤이면 컨트롤… 거기다 다른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유니크한 전투 스타일까지. 진짜 대단하잖아 아시테르.”
테오도라가 새삼 감탄하며 말했다.
아직 마법기사 아카데미에 들어오지도 않은 아시테르가 벌써부터 이런 실력을 보이니 나중엔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테오도라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이어 그는 아시테르의 옷도 털어주며 말했다.
“지금은 내가 이겼지만 앞으로도 그러란 법은 없겠지. 그동안을 반성하며 나도 더욱 노력해야겠어. 이거 정말 좋은 라이벌이 한 명 생겼는걸.”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아시테르를 향한 기대가 숨어 있었다.
그러한 감정이 느껴졌는지 아시테르도 미소를 보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레나가 한꺼번에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그래, 너희 두 사람은 프로메테 가문의 형제들이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네 물론이죠.”
“알겠어요.”
“어떤 일들이 닥쳐도 두 사람의 우애만은 변치 않았으면 좋겠어. 테오도라 내가 너에게 한 말도 기억하고 있지?”
“네. 아시테르를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 기억해주니 고맙다. 아시테르 너도 테오도라 형을 잘 따라야 해.”
“네!”
아시테르의 힘찬 대답에 아레나도 만족스런 웃음을 보였다.
그녀가 앞으로 팔을 뻗으니 허공에 불꽃이 일었다.
“기분이다. 둘 다 저녁 이 시간마다 이곳으로 와.”
“네?”
“에?”
붉게 타오르던 불꽃이 점점 푸른빛으로 물들어갔다.
아름답게 타오르는 청염(靑炎)을 보며 테오도라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불꽃이었다.
반면 청염에 익숙한 아시테르는 멀뚱멀뚱한 얼굴로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화륵!
청염이 소용돌이치며 나선으로 뻗어나갔다.
이어 아레나가 손끝을 움직이니 나선으로 뻗어간 불기둥이 여러 갈래로 나뉘며 춤을 추듯 움직였다.
이 엄청난 마법에 테오도라는 물론 아시테르까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어때, 배우고 싶지?”
아레나의 말에 두 사람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귀여운 모습에 아레나도 자연스레 입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이 날 이후로 매일 밤마다 아시테르와 테오도라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테오도라는 배우는 내내 두드러지는 재능으로 아레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재능적인 측면에서는 아시테르보다 테오도라가 한 수 위인가…’
하지만 아시테르도 이번 기회를 통해 눈에 띄는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테오도라의 존재가 그에게 기폭제가 된 모양이었다.
아시테르는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다른 때보다 아레나의 가르침을 흡수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매일 하는 마법 대련은 두 사람의 성장을 더욱 빠르게 했다.
테오도라의 재능은 뛰어났지만 실전 경험이 현저히 부족한 편이었다.
반면 아시테르는 어렸을 때부터 어비스 던전에서 자라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대신 그가 부족한 것은 마법에 대한 고찰이었다.
마력과 마법의 운용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보다 몸으로 먼저 배우는 스타일이었기에 아시테르에게 테오도라는 확실한 자극제가 되어주고 있었다.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며 수련하다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 테오도라도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 아레나와 아시테르에게 인사를 전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고모님.”
“그래. 부디 훌륭한 마법기사가 되길 바란다.”
“네!”
매일 밤 연무장에서 행했던 수련은 대외적으로 비밀이었기에 테오도라와 아레나, 아시테르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테오도라의 감사 인사가 일전에 잠깐 마법을 가르쳐 준 일에 대한 것으로 여겼다.
테오도라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아시테르.”
“응.”
“다음엔 아카데미에서 보자.”
“알겠어.”
테오도라가 아시테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듣자하니 알렌시아는 이미 아카데미에 합격했다고 하던데?”
“아…….”
테오도라가 짓궂은 미소를 보이며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