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프로메테 가문의 결정
무거운 분위기 속에 아레나와 아시테르가 중앙에 섰다.
한 차례 무거운 침음성을 흘린 크리울로스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회의 결과를 알려주마.”
크리울로스가 참담한 표정으로 아레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표정에서부터 아레나는 크리울로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네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가문에서 정해주는 사람과 결혼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던지, 그게 싫다면 아시테르를 데리고 우리 가문을 떠나는 거다.”
“결국 그렇게 되는 건가요.”
“프로메테 가문은… 천민의 핏줄을 받아들일 수 없다.”
크리울로스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레나도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프로메테 가문은 이스트 왕국 내에서도 상당한 권위를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그런 프로메테 가문에 천민의 핏줄이 들어온다면 그동안 쌓아온 명성에 상당한 흠집이 될 수 있었다.
아마 가문의 원로들도 이 같은 이유로 아시테르와 자신을 거부하는 것일 터였다.
사실 그들로선 아레나가 가문을 떠나는 것을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
가문의 명예만을 중시하는 자들.
집단을 위해 얼마든지 개인을 희생시킬 수 있는 자들.
이것이 아레나가 기억하는 프로메테 가문의 원로들이었다.
제 아무리 크리울로스라고 해도 가문의 원로들을 함부로 거스를 순 없었다.
여기엔 크리울로스의 대쪽 같은 성정도 한 몫 했다.
아니나 다를까 크리울로스가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원로들의 결정도 있었지만 나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반은 유미르의 피를 이은 아시테르를 있는 그대로 우리 가문에서 받아들일 순 없다. 다른 가문들에 웃음거리가 될 거다.”
곁에서 테레니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문에서 이 같은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 아레나가 선택할 선택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레나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곧장 아시테르를 데리고 돌아섰다.
“결국, 가는 것이냐?”
“죄송해요. 하지만 제 뜻은 이미 충분히 전달 드린 것 같아요.”
“못 이기는 척, 가문의 결정에 따라줄 순 없는 것이냐?”
“…죄송해요.”
“그래… 넌 그런 아이였지.”
크리울로스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결국 아레나와 아시테르는 떠날 준비를 했다.
그들이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에도 크리울로스는 단 한 번도 이들 앞에 얼굴을 내비추지 않았다.
테레니스는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며 아레나와 아시테르의 얼굴을 봤다.
“아레나. 이제 어디로 가는 거니?”
“어머니께선 절 붙잡지 않으시네요?”
“내가 우리 딸을 모를까. 붙잡는다고 해서 이곳에 머무를 네가 아니잖니. 오히려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 네 모습을 보니 안심했다. 이제 어디에서든 잘 살겠지. 다만 가끔은 소식이라도 전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역시나 테레니스는 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아레나의 마음을 안아주었다.
“그리고 유미르에게도 안부 잘 전해주고.”
“네?”
테레니스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듯 했다.
아레나가 못 당하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치 채셨어요?”
“그럼. 우리 딸은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제일 잘 알지.”
“역시 우리 엄마는 못 당하겠네요. 아버지는 잘 속아 넘겼는데.”
“그런데 어째서 거짓말을 한 거니? 아버지가 그 사람을 잡아들이기라도 할 까봐?”
테레니스의 물음에 아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버지 때문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원하는 일이었어요. 심연의 기사단원들이 혹시나 자신을 찾고 있을지 모르니 이미 죽었다는 소문을 내달라고요.”
“어째서… 그 사람은 누구보다 마법기사가 되고 싶어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게다가 우리 왕국을 누구보다 사랑하기도 했고. 그러니 살아 있다면 금방이라도 달려와 다시 마법기사로서의 생활을 이어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레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테레니스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어렸을 때부터 테레니스는 아레나에게 든든한 정신적 지주이자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언니처럼 다가와준 어머니였다.
그런 테레니스였기에 아레나도 마음 터놓고 많은 얘기들을 할 수 있었다.
대충의 사정을 들은 테레니스가 조용히 아레나를 끌어안아주었다.
“마음고생이 많았겠구나. 정말 수고했다 내 딸.”
아레나가 테레니스의 품에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어머니의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 찐한 향기가 바짝 잡고 있던 정신마저 아득하게 만들었다.
마음이 느슨해지자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테레니스는 말없이 아레나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많은 걱정들을 안겨다주던 너였는데… 어느새 그런 훌륭한 사람을 남편으로 맞아 이렇게 멋진 아들까지 키워 내다니. 이제 우리 딸도 다 컸어.”
그녀는 담백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 딸도 다 컸고, 한 아이의 어머니까지 되었으니 나는 너의 모든 뜻을 존중한다. 네가 어떠한 길을 걷든 그 앞엔 언제나 광명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나는 늘 너의 뒤에서 응원하고 있으마.”
테레니스의 말에 아레나가 어머니를 한껏 끌어안았다.
아시테르가 말없이 다가와 그런 아레나와 테레니스의 품에 안겼다.
“어머? 이 녀석 눈치 없게… 나도 내 딸 좀 제대로 안아보자꾸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테레니스는 이 사랑스런 손자를 대놓고 귀여워해주었다.
아시테르는 테레니스가 진심으로 아레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레나를 바라보는 테레니스의 눈빛이 그동안 비체나 유미르, 아레나가 자신을 바라볼 때의 그것과 똑 닮았다.
“아버지를 너무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말은 저렇게 해도 너를 가문에 들일 수 없다는 것에 누구보다 괴로워 할 사람이야.”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정말? 우리 딸 정말로 다 컸구나.”
“거기다 아버지를 곤란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자식이 부모를 곤란하게 할 만한 일이 뭐가 있겠니.”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엄마.”
“응?”
“부탁 하나만 드리고 싶어요.”
“그게 뭐니?”
“이건 제 부탁이라기보다는…….”
아레나의 시선이 슬쩍 아시테르를 향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싶어요.”
* * *
끼익―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인기척만으로도 크리울로스는 안으로 들어선 이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레나와 아시테르는… 잘 갔나?”
“그렇게 걱정되었으면 직접 나와 보시지 그랬어요?”
“크음…….”
“하여간.”
테레니스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크리울로스는 아레나와 아시테르가 지나간 곳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못내 아쉽지요?”
“아쉽기는.”
“당신 마음은 제가 더 잘 알아요. 말은 안 해도 가문의 원로들이랑 대판 싸워서라도 아레나를 안으로 들이고 싶었겠죠.”
“…….”
“그런 마음을 아레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표현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만. 그 얘기는 이제 되었어.”
크리울로스가 굳은 얼굴로 욱신거려 오는 관자놀이를 만졌다.
그의 마음을 헤아린 테레니스가 몸을 일으켜 크리울로스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참… 아레나를 그대로 옮겨놓은 얼굴이더군.”
“아시테르 말인가요?”
“응. 거기다 말은 안 해도 눈빛이 아주 좋았어. 녀석의 눈동자가 너무도 마음에 들더라니까.”
“눈빛은 자기 아버지를 빼다 막았던데요?”
“맞아. 내가 그래서 유미르를 좋아했지. 그 친구가 천민으로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면…….”
“알아요. 당신이 아레나와 유미르를 이어주려고 몰래 부단히도 노력했다는 것을. 때로는 우리가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들이라는 것이 원망스럽네요. 좀 더 평범한 가문이었다면… 사랑하는 우리 딸이 마음 편하게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살았을 텐데.”
“후후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할 줄 알았나?”
“그럼요?”
테레니스가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크리울로스도 무겁기만 하던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잘 되었어. 아레나는 가문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더 어울려. 그동안 그것이 평생 마음에 걸렸었는데…….”
“당신 말이 맞아요. 그 아이에겐 오히려 프로메테 가문이 올가미 같은 존재였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아레나가 당신에게 따로 무슨 말을 한 건 없었나?”
“어떤……?”
“뭐, 부탁이라든지…….”
“있었죠.”
“있다고? 그게 뭐지? 나한테는 도통 아무런 말도 꺼내질 않아서 말이야. 분명 속으로 많은 고민들이 있을 텐데도… 아무튼 뭐든지 좋으니 내게도 말해줬으면 좋겠군.”
“정확히는 아시테르의 부탁이었어요. 뭐… 아시테르의 부탁이 곧 우리 아레나의 부탁이 아닐까요?”
“그렇지. 그래서 우리 귀여운 손자 녀석은 무슨 부탁을 하던가?”
“아카데미에 입학 신청을 하고 싶다더군요.”
“크하하하!! 그 녀석도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마법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건가?”
크리울로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레나와 유미르 모두 마법기사단의 단장들이었다.
그런 훌륭한 두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이니 훌륭한 마법기사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더군다나 아시테르가 보여주었던 그 눈빛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명했다.
크리울로스가 곧 잔뜩 들뜬 얼굴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보니… 우리 손자놈의 마법 실력은 어떻지?”
“글쎄요. 뭐가 어찌되었건 유미르와 아레나의 아들인데 마법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을까요?”
“하긴! 그렇겠구만. 그런데 마법기사 아카데미의 입학 신청 기간은 이미 끝나지 않았나?”
“아, 그렇네요. 그걸 깜빡 잊고 있었어요.”
“흐음… 지금 아카데미에 입학시험을 신청하려면 적어도 귀족 가문의 추천장이나 마법기사단장의 추천장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크리울로스가 피식 웃었다.
돌연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 스쳐지나간 것이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 친구가 있었어.”
“누구죠?”
“우리만큼이나 아레나와 유미르를 그리워한 사람.”
크리울로스는 곧바로 그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테레니스도 그때서야 크리울로스가 누굴 만나러 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사람이라면…….”
“우선은 급히 다녀오겠네.”
“당신이 직접 가시는 건가요?”
“아쉬운 사람이 먼저 찾아가야 하지 않겠나?”
크리울로스는 뭐가 기쁜지 연신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렇게나 즐거우신가요?”
“즐겁지! 이렇게라도 딸아이와 손자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게! 다만 아쉬운 점도 있어.”
“그게 뭐죠?”
“우리 손자를 당당하게 우리 가문의 이름을 걸고 아카데미로 들여보내지 못하는 것 말이야. 우리 가문의 손자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음? 그게 무슨 말이지?”
“아시테르는 똑 부러진 아이에요. 거기다 듣자하니 테오도라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시테르와 많이 친해졌다고 하더라구요. 친동생처럼 아시테르를 아끼다 갔다고 하니 비록 프로메테 가문에서 아시테르와 아레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곤 하나 테오도라는 변치 않고 아시테르를 아껴줄 거예요.”
“하긴 테오도라라면 충분히 그래주겠어. 어쨌거나 나도 다녀오도록 하지. 그런데 그 친구가 순순히 부탁을 들어줄까도 걱정되긴 하는군.”
“모쪼록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
테레니스의 말에 크리울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자신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