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테르세우스의 조건
아시테르가 다시 호흡을 골랐다.
그의 눈빛이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아시테르가 손짓하자 불길이 함께 움직였다.
불길은 곧 테르세우스의 발밑에 빠르게 번졌다.
“호오, 이건…….”
화릉!
테르세우스의 발밑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테르세우스가 뒤로 물러났다.
“아레나의 마법이로군.”
그가 감상에 젖은 눈빛으로 불기둥을 바라보았다.
테르세우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에서 불꽃이 비처럼 쏟아졌다.
“호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테르세우스가 턱을 매만졌다.
그가 손짓하자 주변으로 쏟아지던 불꽃이 하나둘 사그라들었다.
“훌륭한 마법이야. 하지만 이런 마법은 마력을 크게 소모하는 데다 개인을 상대하기엔 지나치게 효율성이 떨어지는데.”
파밧!
테르세우스의 시선이 뒤편으로 향했다.
그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그렇군. 이 화려한 마법은 눈속임이었나?”
뜨거운 불길이 테르세우스의 옆을 스쳤다.
연이은 주먹질이 테르세우스를 비켜 갔다.
정확히는 테르세우스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아시테르의 공격을 피한 것이었다.
테르세우스는 빠르게 움직이는 아시테르를 보며 웃음을 보였다.
“이것 봐라.”
이렇게 직접 몸을 움직이는 마도사는 근래에 보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아시테르는 자신의 마법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시키기까지 하고 있었다.
파앙!!
불꽃을 머금은 아시테르의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무래도 진짜 주특기는 이쪽이었나보군.”
그전에 보여주었던 마법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고 날카로웠다.
거기다 어디서 배운 것인지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이 정도로 몸을 잘 사용하는 마도사라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테르세우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충족시키기엔 아직 부족했다.
아시테르에 대해 더 알고 싶었기 때문에 테르세우스가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파앙!!
순식간에 흘러나온 마력이 아시테르의 몸을 때렸다.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아시테르가 두 눈을 부릅뜨며 몸을 뒤로 물렸다.
머리로 생각하기보단 몸이 먼저 반응한 행동이었다.
“호오, 감이 좋구나.”
파르릉!!
아시테르가 있던 자리로 강한 마력이 지나갔다.
대지를 긁은 그의 마법에 아시테르가 마른침을 삼켰다.
“단순히 마력만으로도…….”
속성 변환 같은 것은 없었다.
순수한 마력의 사용만으로 이런 위력을 낸 것이다.
“마력의 속성 변환은 하나의 색깔일 뿐이야. 중요한 것은 백지에 그려지는 선. 그 선에 따라 내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네.”
테르세우스가 가볍게 팔을 들어 올리자 마력의 파도가 밀려왔다.
아시테르가 재빨리 방어에 들어갔다.
그의 주변으로 불꽃이 번지며 커다란 장벽을 만들었다.
파르릉!!
“크윽…….”
아시테르의 입에서 절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대한 태산이 자신을 짓누르는 느낌에 팔이 저절로 부들거렸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테르세우스의 마법을 받아내려 했다.
이에 흥미를 느낀 테르세우스가 자신의 마력을 일부러 흩트렸다.
‘어디, 이제 어떻게 하는지 볼까.’
마력이 흩어지며 찰나의 틈이 생겼다.
테르세우스는 당연히 아시테르가 이틈에 자신의 공격 범위를 벗어나려 들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반대의 선택을 했다.
팟!
발에 불꽃을 피워낸 아시테르가 테르세우스가 있는 곳으로 단숨에 파고들었다.
그의 두 팔에서 피어난 불꽃이 테르세우스를 노렸다.
테르세우스는 한 손으로 불꽃을 걷어내는 한편 다른 한 손으로 반격을 가했다.
휭!
몸을 회전한 아시테르가 테르세우스의 공격을 피했다.
정말 놀라운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깨우친 건가?”
파콰앙!!
마력의 폭발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동시다발적인 폭발에 아시테르가 몸을 보호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는 천천히 호흡을 내뱉었다.
화륵!
주먹에서 피어난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올라 팔 전체를 휘감았다.
처음 보는 마법에 테르세우스는 물론 아레나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시테르가 몸을 튕기듯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볼까.”
테르세우스는 직감적으로 이번 공격이 아시테르가 갖고 있는 비장의 무기임을 알아차렸다.
그가 두 손을 뻗자 거대한 마력 장벽이 나타났다.
아시테르는 멈추지 않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두 주먹이 장벽과 부딪히자 거친 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꽤나 묵직한 충격에 테르세우스가 순수한 감탄을 쏟아냈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이런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놀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화르릉―!!
불줄기가 나선모양으로 회전하며 마력 장벽 내부로 침투했다.
“허어…….”
아시테르가 주먹을 회전시키자 나선모양의 불꽃이 테르세우스를 노리고 들어왔다.
쩌저정!!
마력 장벽이 깨어지며 불꽃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앗!”
아시테르가 뒤늦게 마력을 걷으려는 찰나 테르세우스가 움직였다.
그가 두 팔로 원을 그리자 중앙으로 검은 구멍이 생겼다.
“공허의 안식.”
슈와아―!!
테르세우스가 만들어낸 구멍 안으로 아시테르의 마법이 빨려 들어가 버렸다.
거세게 타오르던 불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아시테르가 그 자리에 우뚝 굳어버리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이건 단순히 막아낸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마법을 통째로 없애버린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아시테르의 곁으로 아레나가 다가와 말했다.
“이게 테르세우스님의 마법이다.”
난생 처음 보는 마법이었다.
이런 마법이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기에 아시테르는 놀란 마음을 쉽게 진정시킬 수 없었다.
소름이 쫙 돋는 중에 테르세우스가 해맑게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으니 나도 재밌는 것을 하나 보여주마.”
슈앙!
테르세우스의 손가락 위로 떠오른 구멍에서 거센 불길이 하늘 높이 승천했다.
아시테르가 좀 전에 선보였던 마법이었다.
그런데 그 위력이 아시테르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이건……!”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마법을 흡수해서 더욱 강한 힘으로 돌려줄 수도 있지.”
마법을 다 흘려보낸 테르세우스가 천천히 다가와 아시테르의 어깨를 짚었다.
“정말 훌륭한 마법이로군. 앞으로의 미래가 너무나도 기대될 정도야. 어떻게 그런 마법을 익힌 거지?”
“아, 그게… 어머니께 마법을 배우고 비체님께 또 다른 것들을 배우다보니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사용할 순 없을까 고민하다가…….”
아시테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테르세우스의 두 눈이 어느새 반짝 빛나고 있었다.
“솔직히 놀랐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그 정도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니. 당장 마법기사단에 들어가도 손색없을 정도야.”
“네? 제가 그 정도인가요……?”
“그래. 하지만 분명 아카데미에서도 배울 점 또한 많을 거다. 비단 마법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그 말씀은…….”
“아하하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은 농담이다. 여자친구를 보러 가기 위해서든 뭐든, 자네처럼 대단한 인재가 아카데미에 입학해 마법기사가 되는 길을 걷는다면 우리 왕국에 그보다 좋은 일은 없지.”
“가, 감사합니다……!”
아시테르가 테르세우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테르세우스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니 어떤……?”
“첫 번째로는 너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을 것. 너는 나의 추천장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겠지만 평범한 신분으로 아카데미 학생이 될 거다. 네가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도 몰라야 해. 그래야 감독관들도 오롯이 너의 실력을 바라봐줄 테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당분간 너의 속성 변환을 제한하겠다.
“예……? 그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속성 변환을 제한한다는 얘기는 아시테르의 주력 마법을 봉인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카데미는 실력을 인증받고 좋은 성적을 거두어 마법기사가 되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속성 변환을 제한하면 아시테르에게도 상당한 제약이었다.
“지금의 너라면 너무도 쉽게 아카데미의 시험들을 통과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질 않겠나?”
테르세우스가 다른 설명들을 덧붙이지 않아도 아시테르는 어느 정도 그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거 비체가 해온 말들과도 비슷했다.
게다가 아시테르에게도 이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시원시원해서 좋구나.”
테르세우스가 웃으며 말했다.
아시테르의 표정을 읽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초반에 내게 보여준 마법들 말이다.”
“네.”
“너는 그 마법들에 욕심이 더 많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처음엔 단순한 눈속임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더구나. 말 그대로 너는 내게 네가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야. 하지만 그런 마법들에 취약했던 거지.”
“맞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더라구요…….”
아시테르가 조금은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다.
테르세우스가 그런 아시테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후후, 2등급까지다. 내 조건을 지키면서 네가 올라서야 할 등급이.”
“네!”
“2등급까지 올라섰을 때, 너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거다. 그동안 네가 그 마법들에 왜 취약한 모습을 보였는지! 그리고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는 마음으로 임하거라. 그래야 더 발전할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가 마침내 2등급에 올라섰을 때, 그때부터는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감사합니다!”
“유미르를 닮아 대답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구나.”
테르세우스는 아시테르와 아레나를 데리고 다시 거처로 돌아갔다.
곧바로 책상으로 간 테르세우스가 종이에 이것저것 적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
다 적고 나서 테르세우스가 종이를 아시테르에게 건네주었다.
아시테르의 두 눈에 가장 먼저 보인 단어는 ‘추천장’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가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시테르의 인사를 받은 테르세우스가 뒤편의 아레나를 바라보았다.
“아레나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다시 마법기사단으로 복귀하는 건가?”
“아뇨. 죄송하지만 저는 다시 마법기사단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그렇군. 그렇다면 역시 유미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아레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르세우스도 아레나의 선택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듯 쉽게 수긍했다.
하지만 씁쓸한 마음을 완전히 지울 순 없었다.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구나. 너와 유미르는 우리 왕국에 있어서도 훌륭한 인재들인데… 하지만 너희들을 애써 붙잡을 생각도 없다.”
“감사해요 테르세우스님.”
“네가 이곳에 다녀간 것도 비밀이겠지?”
“그걸 눈치채셔서 이렇게 조용히 데려오신 것 아닌가요? 아시테르에게 그런 조건을 내거신 것도요.”
“후후, 아시테르가 너와 유미르의 아들이라는 것이 언제까지 비밀로 지켜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너와 유미르가 원하는 일이라면 나도 최대한 그 비밀을 지켜주도록 하마.”
“늘 감사해요 테르세우스님. 그리고…….”
아레나가 아시테르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아직 부족한 것들이 많은 녀석이에요. 제 아들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테르세우스님.”
“너와 유미르의 아들이라면 내게도 특별한 녀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에 이끌려 오냐오냐 해주진 않을 거야.”
“바라던 바에요. 그리고 그건 테르세우스님의 스타일도 아니잖아요?”
“아하하하!! 잘 알고 있구나. 어쨌거나 너무 걱정마라.”
테르세우스가 아레나를 안심시켰다.
사실 그가 따로 안심시킬 것도 없었다.
현재 이스트 왕국 내에서 테르세우스만큼 아레나가 믿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레나에게 테르세우스는 각별한 존재였다.
테르세우스가 추천장을 써준 것을 보았으니 아레나도 이제 안심하고 어비스 던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멀뚱히 서 있는 아시테르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겠구나. 힘내렴 우리 아들. 마법기사의 자리도, 사랑도 둘 다 쟁취하는 거야!”
“네!”
“참고로 둘 중 하나라도 이루지 못하면 어비스 던전으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렴?”
아레나가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아시테르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