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마지막 시험 (2)
아시테르는 수정체를 중심으로 돌담을 쌓고 있었다.
그는 용케도 큼지막한 바위들을 힘으로 옮기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라빈이 물었다.
“안 힘들어요?”
“이 정도야 뭐.”
보기와 다르게 탄탄한 그의 팔뚝을 보며 라빈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아시테르는 시간이 잠깐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벌써 많은 돌을 옮겨왔다.
그는 계속해서 바위를 나르며 쌓아 올렸다.
보다 못한 라빈이 슬쩍 말을 붙였다.
“뭔가 도와줄 것 없어요?”
“흐음… 그럼 여기 사이사이에 진흙을 좀 발라줄래?”
“알겠어요.”
라빈은 군소리 없이 근처 진흙을 가져가 돌담 사이사이에 고르게 발라주었다.
주변에 물이 흐르는 덕분인지 진흙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시테르는 말없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의외네.”
“뭐가요?”
“이런 일엔 안 나설 줄 알았는데.”
“솔직히 쓸데없어 보이긴 하는데 재밌어 보여서 하는 거예요.”
라빈의 말에 아시테르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과거에 일부러 마력을 바닥내고 마수들을 상대하는 훈련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비체가 알려준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마력이 다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 배운 것들.
그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아시테르는 수정체를 중심으로 돌담을 모두 쌓고 바깥에는 따로 함정들을 만들어두었다.
혼자 했다면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테지만, 라빈이 옆에서 도와준 덕분에 일찍 끝마칠 수 있었다.
“다 했다……!”
마지막 함정까지 준비한 아시테르가 뿌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가 한껏 기지개를 켜자 라빈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또 그렇게 웃어?”
“그냥 재밌잖아요. 대체 이런 건 왜 만드는 거예요?”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없는 것보다 있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돼. 믿어 봐.”
“하여간 특이해.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니까요. 본인도 그거 알고 있죠?”
돌담 위로 가볍게 올라간 라빈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시테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라빈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특이하다고?”
“그럼요. 완전!”
“전혀 모르겠는걸…….”
“다른 사람들이랑 뭔가 분위기가 달라서 그게 뭘까 했더니… 이제 좀 알겠어요.”
“뭔데?”
“안 가르쳐줘요. 헤헤.”
활짝 웃은 라빈이 폴짝 뛰어내려 아시테르에게 안기려 들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슬쩍 발을 빼내며 그녀를 피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안기려 들지 마.”
“너무해!”
“어림없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애가 안기려 하는 건데 못 이기는 척 받아주면 안 돼요?”
“응 안 돼.”
“치이… 뭐 여자친구라도 있어요?”
“아니 난 없지만 넌 정혼자가 있다며.”
“아…! 그것 때문이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걔랑 난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요.”
라빈이 자신의 머리칼을 배배 꼬며 답했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도 생각하던 반응이 아니었기에 라빈이 혀를 찼다.
“재미없어. 좀 더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라빈이 공중제비를 돌며 돌담 위로 올라갔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에 아시테르도 순간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너 움직임이 되게 좋구나.”
“그걸 알아볼 수 있어요?”
“응. 다른 사람들과는 움직임이 달라. 너도 검술을 배운 거야?”
“글쎄요?”
라빈이 알 듯 모를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하지만 속으론 아시테르의 말에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시테르가 처음이었다.
라빈은 무릎을 굽히며 한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아시테르를 내려다보았다.
“오빠.”
“왜 불러.”
“미안해서 어떻게 해요?”
“뭐가?”
“다른 사람들과 팀이 되었다면 훨씬 더 좋았잖아요. 보다시피 저는 마력도 하급이고 힘도 오빠만큼 좋질 못해요.”
“그래서?”
아시테르가 하던 일을 멈추고 라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순수한 그의 얼굴에 라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라뇨… 저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랑 팀을 이루었다면 저기 있는 사람과 함께 좀 더 쉽게 팀미션을 치렀을 것 아니에요. 심지어 이번 최고 난이도 미션도 제가 뽑아버렸는걸요.”
“아하하. 그런 건 상관없어.”
“네?”
“뭐가 어떻게 되었건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내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할 뿐이야.”
“흐으음…….”
라빈이 좀 더 빠져드는 눈빛으로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괜히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 제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걸림돌 같은 애라면… 그땐 절 버리거나 두고 가실 거예요?”
“아니. 그럴 일은 없어.”
“왜요?”
“왜라니. 당연한 것 아냐? 우린 팀이잖아. 그리고 세상 모든 존재는 저마다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했어. 너도 분명 무언가에 재능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런 말로 스스로를 낮추려 들지 마.”
아시테르의 말에 라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돌담에서 내려왔다.
“…재미없네요.”
라빈이 다시 수정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때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키야아―!”
“끼이이!”
소리를 듣자마자 아시테르가 돌담 위로 올라갔다.
라빈이 반응하기도 전에 움직였을 정도로 그의 움직임은 날렵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자다가 놀란 베네피트도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허겁지겁 달려 나온 베네피트를 보며 라빈이 피식 웃었다.
바깥을 살펴본 아시테르가 입을 열었다.
“고블린들이에요.”
“뭐!? 아직 미션 시작하려면 12시간이나 남았는데 벌써 왔단 말이야?”
베네피트가 고블린들을 확인하기 위해 힘겹게 돌담 위로 올라갔다.
가슴 높이까지 쌓아 올린 돌담은 겹겹이 쌓은 덕분인지 생각보다 훨씬 튼튼했다.
“그사이에 이런 걸…….”
새삼 놀란 베네피트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돌담 위로 올라온 라빈이 두 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말했다.
“어때요? 당신이 저기 누워서 쉬고 있을 때 아시테르 오빠는 이런 걸 만들어냈다고요.”
“흥. 그래서 뭐? 나도 충분히 휴식한 값을 하면 될 것 아니야.”
베네피트가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가 영창을 외우기 시작하자 마력이 그의 손끝으로 모여들었다.
“잘 보라고!”
“헤에?”
공격 마법을 준비하는 베네피트를 보며 라빈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크게 기대하진 않았는데 제법 그럴듯한 공격 마법이 완성되고 있었다.
파앙!
베네피트의 화염 마법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앞으로 뻗어나갔다.
손을 떠난 화염탄이 고블린 무리의 한가운데 떨어졌다.
“캬악!”
“키에――!”
두 마리의 고블린이 화염탄에 맞으며 쓰러졌다.
곁에 있던 고블린들이 빠르게 움직여 쓰러진 고블린들을 향해 모래를 뿌렸다.
그러자 불길은 더 이상 번지지 않고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고블린 주제에!”
이를 악문 베네피트가 한 번 더 화염 마법을 준비했다.
그의 마법이 쏘아져 나가자 고블린들이 비명을 토해내며 죽어 나갔다.
“크하하! 어떠냐!?”
베네피트가 가슴을 펴며 한껏 고개를 치켜올렸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라빈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잘한다, 잘한다 베네피트 씨!”
“야! 쟤는 오빠고 왜 나는 베네피트 씨야!?”
“그건 내 마음!”
“이게……!”
베네피트가 괜히 역정을 내며 말했다.
그래도 라빈의 응원이 싫지만은 않은지 솔직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의 화염 마법은 효과적이었다.
연속된 화염탄에 고블린 무리가 주춤하기 시작했다.
베네피트가 다시금 화염 마법을 준비하며 소리쳤다.
“내가 말했지? 너희들 모두 아카데미로 데려가 준다니까! 이 베네피트님만 믿으라고!”
아시테르의 시선이 고블린들에게로 향했다.
화염탄이 분명 위력적이긴 했지만 아직 남은 고블린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거기다 화염탄 마법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꽤나 걸리기도 했다.
“키에에!”
“캬아!”
잔뜩 성난 고블린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며 달려왔다.
놈들이 돌담 쪽에 점점 가까워지자 베네피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이제 어떻게 하지…!? 내 마법만으로 다 처리하기엔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그러자 라빈이 지켜보라는 얼굴로 앞쪽을 가리켰다.
푸슉!
쿠당당―!
일제히 달려들던 고블린들이 갑자기 꺼져버린 땅에 볼품없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아시테르가 미리 만들어 둔 함정에 빠져버린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제법 구덩이를 깊게 파놓은 데다, 뾰족한 나무들까지 있어 떨어진 고블린들이 몸을 꿰뚫리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저도 배운 겁니다.”
“대체 누가 이런 걸 가르친단 말이야…? 이건 마법도 아니잖아?”
휘둥그레진 눈으로 구덩이를 쳐다보던 베네피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마력을 한껏 끌어올려 구덩이 쪽으로 화염 마법을 날렸다.
화륵―!
화염 마법이 구덩이 속에 빠지자 점점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우와……!”
“어때? 괜찮았지!?”
베네피트가 아시테르와 라빈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 보였다.
쿠궁!
그때 이번엔 다른 쪽에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베네피트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또 뭐야!?”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각기 다른 방향에서 고블린들이 동시에 다가오고 있었다.
“완전 난리네.”
“이제 어떻게 해?”
“이 돌담을 이용해서 최대한 막아봐야죠.”
아시테르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는 곧바로 미리 준비해두었던 바위를 들었다.
바로 아래 돌담 가까이로 다가온 고블린들이 보였다.
아시테르는 고블린들을 향해 들고 있던 바위를 던졌다.
“참신하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빈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여기까지 와서 몬스터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을 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동안 베네피트가 다시 화염 마법을 준비했다.
“혹시 모르니까 마력을 아껴두세요.”
아시테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러자 베네피트가 조금은 신경질적인 어투로 답했다.
“지금 상황에 그게 무슨 말이야!?”
“고블린 말고 다른 적들이 더 있을지 몰라요. 여기서 가장 위력적인 공격을 펼칠 수 있는 건 베네피트 형밖에 없으니까 마력을 아껴달라는 얘기예요.”
“다른 적?”
베네피트가 화염 마법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시선이 라빈 쪽으로 향했다.
라빈은 우두커니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넌 그렇게 가만히 서서 뭐해?”
“전 응원하고 있어요!”
“자랑이다!”
한차례 웃어 보인 라빈이 아시테르를 쫓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팟!
아시테르는 애써 세운 돌담을 넘어가려 했다.
“어어? 거기 아시테르 오빠! 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올게! 너랑 베네피트 형은 혹시나 돌담을 넘으려는 고블린들이 있다면 저지해줘!”
아시테르의 말을 들은 라빈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착지한 아시테르가 곧바로 고블린 무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아시테르의 행동을 본 베네피트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저 녀석 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니 애써 세운 돌담에서 왜 자기가 스스로 내려가? 제정신이야? 저렇게 고블린 무리에 섞여 들어가 버리면…….”
“저기 봐요.”
라빈의 말에 베네피트가 눈매를 좁히며 아시테르쪽을 바라보았다.
아시테르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고블린들의 공격을 피해내며 반격을 가했다.
훙!
검격을 피해낸 아시테르가 고블린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그는 두 손을 움직여 단숨에 고블린의 무기를 빼앗아버렸다.
그 화려한 솜씨에 라빈은 물론 베네피트도 순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