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오크들의 습격
아시테르가 고블린 무리 가운데서 싸우는 동안 베네피트는 간단한 마법들을 사용하며 고블린들이 담장 가까이로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라빈도 부지런히 움직이며 고블린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아시테르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대단해…….”
아시테르는 고블린 틈에 섞여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블린들이 중앙으로 파고든 아시테르를 포위했다.
쉬리링―!
슈웅!!
고블린들의 무기가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그런데도 아시테르의 털끝조차 건드릴 수 없었다.
“느려 느려.”
고블린들의 움직임을 살핀 아시테르가 검을 휘둘렀다.
촤락―!
목을 베인 고블린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시테르는 고블린들의 약점을 철저히 공략했다.
작은 움직임과 힘만으로 적을 무력화하기 위함이었다.
“마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니까 확실히 불편하긴 하네…….”
평소 같았으면 훨씬 더 빠르고 위력적인 움직임을 보였을 테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어비스 던전에서 수준 높은 마수들을 상대해 온 덕분인지 고블린들을 상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래도 방심해선 안 되지. 어떠한 적을 상대하든 최선을 다한다.”
아시테르가 쉼 없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술은 고블린들의 급소를 사정없이 베어버렸다.
전장의 사신처럼 고블린들을 도륙하는 아시테르를 보며 베네피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요즘 세상에도 저렇게 검술을 배우는 사람이 있구나… 저런 쓸데없는 짓을.”
“왜요? 멋있잖아요.”
“멋있기는 뭐가!?”
라빈의 말에 베네피트가 괜히 한마디 쏘아붙였다.
그러나 이내 라빈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고블린들의 사이에서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아시테르를 보고 있으면 몸속의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아시테르가 고블린들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때마다 베네피트의 표정도 시시각각 변했다.
라빈은 두 눈에 이채를 띠며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근데 진짜 흥미로와요…….”
그녀는 아시테르의 움직임을 두 눈으로 쫓으며 새삼 감탄했다.
아시테르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움직임으로 고블린들을 상대했다.
쓸데없는 움직임이 없으니 체력 소모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럼에도 고블린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 아시테르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고블린들의 공격이 주춤하자 아시테르가 검을 땅에 짚고 섰다.
벌써 몇 번째 빼앗은 검인지 몰랐다.
“이왕이면 좋은 검 좀 들고 다니면 안 되겠냐…….”
고블린 몇 마리만 베어도 검은 금방 이가 나가버렸다.
검날이 상할 때마다 아시테르는 다음 고블린의 무기를 빼앗아 들었다.
때로는 바닥을 뒹굴며 떨어져 있는 검을 줍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전투를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아시테르 주변에 고블린의 시체만 수십 구를 이루었다.
“후우… 후욱…….”
뜨거운 숨을 내뱉은 아시테르가 고블린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살기에 서서히 고블린들이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아시테르에게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덤벼보던지.”
숨을 고른 아시테르가 다시 고블린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러자 고블린들이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놈들의 시선이 한 번씩 수정체 쪽을 향했다.
“키에…….”
“키에에!!”
“캭! 케이―!”
서로 말을 주고받던 고블린들이 공격을 멈추었다.
백 마리는 족히 넘어 보였던 고블린들의 숫자가 대폭 줄어 있었다.
고블린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시테르는 굳이 놈들을 쫓지 않았다.
“다시는 오지 마라!”
대신 고블린들을 향해 힘껏 외쳐주었다.
촤락!
아시테르가 들고 있던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검에 묻어 있던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아, 오랜만에 제대로 몸 좀 푼 느낌이네.”
두 팔을 들어 기지개를 쫙 펴준 아시테르가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빈과 베네피트가 시선에 들어왔다.
“끝났어요!”
아시테르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고블린들의 시체 사이에서 해맑게 손을 흔드는 아시테르의 모습이 참으로 괴이한 장면이었다.
라빈이 담장 아래로 내려가 아시테르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녀는 곧바로 아시테르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뭐야?”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보다시피 멀쩡해.”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진짜 멋있었어요! 그런 대단한 검술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셨어.”
“오호… 대체 어떻게 배우면 그렇게 검술을 잘할 수 있죠?”
라빈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시테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지 정말…….”
아시테르가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미르나 아레나와 달리 비체는 모든 훈련에 사정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늘 바짝 긴장해야 했다.
“단언컨대 이 나이까지 나보다 사선을 많이 넘은 사람은 없을 거야…….”
아시테르가 돌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축 늘어트렸다.
급격히 어두워진 그의 표정에 라빈이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혹시 제가 뭘 잘못 물은 건가요?”
“아냐… 아니야…….”
고개를 흔들어 보인 아시테르가 돌담 위로 올라갔다.
위에 있던 베네피트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 뭐… 천민치고는 잘했다. 내가 나설 수고를 덜어주었네.”
“베네피트 형도 멋졌어요.”
“뭘 이 정도 가지고. 후훗.”
아시테르의 칭찬에 베네피트가 곧바로 미소를 보였다.
참으로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베네피트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것으로 미션 종료인가? 잔뜩 겁준 것 치곤 별로 어렵지 않은데?”
“아시테르 오빠가 세운 돌담 아니었으면 벌써 고블린들한테 수정체가 파괴되었을걸요?”
“무슨 소리. 이게 도움이 된 건 맞지만, 돌담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을 거야.”
“에이… 마법 하나 만들어내는데 상당히 오래 걸리더만.”
“야! 너는 아무것도 안 해놓고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베네피트가 핀잔을 주며 말했다.
그러자 라빈이 아시테르의 뒤로 숨어 버렸다.
“아하하. 어쨌거나 잘 끝났으니 된 것 아닌가요.”
“쳇…….”
라빈이 뒤에서 두 사람을 두드렸다.
베네피트가 돌아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왜 그래?”
“저기… 저길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라빈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시테르가 눈매를 좁히며 라빈이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저건… 오크잖아……?”
“뭐!? 오크라니!! 그게 정말이야!?”
화들짝 놀란 베네피트가 부리나케 몸을 돌렸다.
정말로 먼발치서 오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전 고블린들보다 훨씬 더 흉흉한 기세였다.
“이게 진짜였나……?”
아시테르가 몸을 풀며 말했다.
라빈이 오크 무리를 둘러보았다.
“이번에도 대략 백 마리 정도예요.”
“고블린에 이어 오크라니…! 이건 너무한 것 아니냐고!”
베네피트가 크게 소리치며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반면 아시테르는 재빠르게 돌담을 넘어 고블린들의 무기를 주워왔다.
이제 보니 활을 갖고 있는 고블린들도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활과 화살을 챙겨왔다.
이를 본 라빈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활도 다룰 줄 알아요?”
“응. 어느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는 아시테르를 라빈이 빤히 응시했다.
“왜?”
“혹시 더 놀랄만한 사실이 있어요? 그러면 미리 얘기해줄래요? 지금 다 놀라버리게. 아무래도 심장에 무리가 올 것 같아요.”
“그런 시답지 않은 말 할 시간 있으면 이거나 도와줄래?”
“네!”
라빈이 힘차게 답하며 움직였다.
베네피트가 새삼스런 시선으로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아시테르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제 할 일을 찾았다.
게다가 상황 판단도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마치 이런 상황을 숱하게 겪어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네?”
“아냐… 아니다. 그나저나 너 아까 나한테 마력을 아끼라고 했던 말은 혹시나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얘기한 거냐?”
“네. 만일의 상황을 생각해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안 나오네…….”
베네피트가 진심으로 감탄해 말했다.
게다가 아시테르의 말투는 아까부터 음의 높낮이가 없었다.
그 말은 조금도 흥분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냉철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말이 쉬운 일이지 실제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손이 부르르 떨려 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 한 명 더 있었네. 이런 상황에서 전혀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헤실헤실 웃고 있는 게.”
베네피트가 라빈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라빈은 아시테르가 부탁한 일들을 하나둘 척척 해내고 있었다.
그동안 아시테르는 오크들의 동향을 쫓았다.
“아무래도 전면돌파를 해올 모양이에요.”
오크들은 고블린들처럼 수를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이쪽으로 돌진해 왔다.
베네피트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오크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보며 아시테르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그리고 오크들은 고블린처럼 영악하지도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시테르가 직접 보라는 듯 앞쪽을 가리켰다.
베네피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시테르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매서운 기세로 질주하던 오크들의 앞을 불타는 구덩이가 막아섰다.
고블린의 시체와 나무가 타고 있어 아직까지도 구덩이 속의 불길은 거셌다.
그러나 오크들은 이것을 피해서 가지 않았다.
놈들은 그대로 구덩이로 직진했다.
“저… 저 미친놈들 왜 저래……!?”
“저게 오크들의 특징이에요. 오크들은 다른 마수들보다도 특히나 번식력이 강하죠. 먹을 것이 풍부하고 안전한 보금자리가 제공된다면 놈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숫자를 늘릴 수 있어요.”
“그런데……?”
“그래서 그냥 숫자로 밀어붙이는 전술을 쓰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처럼요.”
“뭐……?”
“저 녀석들이 저 구덩이를 피해 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요. 다른 오크들이 구덩이에 빠져 죽고 또 죽다 보면… 결국 저렇게 될 거라 생각하는 거죠.”
오크들의 시체가 어느덧 구덩이를 가득 메워버렸다.
뒤에서 질주해 오던 오크들이 그 시체를 밟으며 지나갔다.
“이런 미친…….”
베네피트의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수십 마리의 시체가 구덩이를 메운 덕분에 다른 오크들은 상처 하나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더군다나 동족을 밟고 지나가는 오크들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죽으면 또 다른 오크들이 태어나면 그만이다. 동족이 죽으면 그만큼 부족한 식량을 메울 수 있다. 이게 오크들의 머리에 박힌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하… 완전 미친놈들이잖아 저거…….”
“네. 그게 저 녀석들의 가장 무서운 점이기도 하죠.”
오크라면 아시테르도 어비스 던전에서 수없이 상대해온 마수들이었다.
그는 오크들의 습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아시테르가 무기를 챙겨 들고 다시 돌담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놀란 라빈이 아시테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또 가게요?”
“그래야지.”
“이번엔 위험할 것 같은데요?”
“그래도 가야지. 별수 없잖아?”
한차례 웃음을 보인 아시테르가 돌담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는 곧바로 오크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아시테르의 뒷모습을 보며 베네피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