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선택과 결정
“취에엑!”
가장 선두에 있던 오크가 몽둥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녀석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가소로운 인간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우람한 팔뚝에 탄탄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몽둥이가 허공을 가르며 눈앞의 인간을 곧바로 짓뭉개버리는 듯 했다.
쿠웅!!!
하지만 오크의 몽둥이는 애꿎은 대지만 때렸다.
당황한 눈동자가 서둘러 인간을 찾았다.
푸슉!
뜨거운 느낌이 복부에 전해졌다.
“쿠룩……?”
오크가 고개를 숙여 복부 쪽을 바라보았다.
배의 정중앙을 뚫고 나온 검날이 핏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오크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검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아시테르의 손속이 훨씬 빨랐다.
촤락!
아시테르는 검에 힘을 가해 그대로 오크의 몸을 갈라버렸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아시테르는 홀로 오크들을 상대하기 위해 과감히 뛰어들었다.
몽둥이가 날아오고 검날이 아시테르의 곁을 스쳤다.
아시테르의 팔이 움직이고 검날이 번뜩일 때마다 오크들의 피가 허공에 솟구쳤다.
오크들은 건방진 인간을 처리하기 위해 더욱 사기를 드높였다.
“취에에!”
아시테르의 뒤에서 오크 한 마리가 무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
파앙!!
어디선가 날아온 화염탄이 오크의 상체를 정확히 가격했다.
“크륵……!”
오크의 몸이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오크를 확인한 아시테르가 시선을 돌렸다.
돌담 위에 있던 베네피트가 이곳을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
“뒤에는 내가 있다!! 걱정하지 말고 싸워!”
그의 외침이 아시테르가 있는 곳까지 들렸다.
아시테르가 말없이 미소를 보였다.
“든든하네요.”
휘릭―!
촤르륵!!
아시테르의 검이 오크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몸을 돌린 그가 사선으로 검을 쳐올렸다.
그러자 그의 옆을 노리던 오크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후욱……!”
아시테르가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몸을 움직였다.
녀석들에게 붙잡히면 그것은 곧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는 오크들이었기에 아시테르는 조금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아시테르를 붙잡으려 했다.
휘릭!
그의 검끝이 바로 앞에 있는 오크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시테르라도 고블린에 이어 오크들까지 다수 상대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인 일이었다.
거기다 마력의 도움도 제대로 받을 수 없으니 더더욱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아… 벌써부터 다른 의미로 한계 극복이네…….”
아시테르의 시선이 검끝으로 향했다.
오크들을 몇 번 베고 나니 검날이 벌써 많이 상해버렸다.
더군다나 날에 묻은 오크들의 피 때문에 더 이상 질긴 가죽에 날이 들어가질 않았다.
휘릭―!
미련 없이 검을 버린 아시테르가 다시 바닥에 있는 검을 주워들었다.
검을 꽉 쥐자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려 왔다.
스각!
덮쳐오는 오크를 베어버린 아시테르가 사선으로 몸을 날렸다.
쿵!
떨어진 도끼날이 바닥을 찍었고 아시테르가 대지를 박찼다.
수직으로 내려친 검날이 오크의 머리를 반쪽으로 갈라 버렸다.
“흐아……!”
한차례 숨을 뱉어낸 아시테르가 다시 집중했다.
수많은 경험과 오랜 연습 끝에 몸이 검술을 기억하고 있었다.
생각하기 전, 본능적으로 검로(劍路)가 눈에 보였고 몸은 자연스레 검로를 따라 움직였다.
시선은 오크들의 움직임을 쫓았으며 발은 적을 공격하기에 최적의 위치로 내디뎠다.
아시테르는 제한적인 마력을 운용하는 데 좀 더 집중했다.
적은 마력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야 했다.
그래야 눈앞에 가득한 오크들을 모두 상대해낼 수 있을 터였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아시테르는 마력을 더욱더 얇게, 그리고 단단하게 응축시키며 몸을 감쌌다.
체력적으로 지친 부분을 마력으로 메워야 했다.
마력이 신체의 부족한 능력을 강화시켜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마력 컨트롤에 자신 있는 아시테르였음에도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마력도 같이 흩어지거나, 혹은 더 많은 마력이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집중하자 집중……!”
아시테르는 혼잣말을 계속 되뇌며 마력의 흐름에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오크들의 공격을 모두 피해내며 반격하는, 경이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파쾅!!
그가 집중하며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는 때 다른 쪽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뭐지!?”
아시테르의 집중력이 순간 흩어지자 얇게 그의 몸을 덮고 있던 마력도 흩어져버렸다.
마력이 사라지자 곧바로 몸에 반동이 밀려왔다.
여기저기 밀려오는 통증에 아시테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크들보다 한층 더 커다란 몸집의 무언가가 수정체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오우거잖아?”
오크보다 커다란 몸집에 마법 내성까지 갖고 있는 몬스터가 바로 오우거였다.
거기다 녀석들은 오크들과 다르게 간단한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아시테르가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오크들만으로도 벅찬데 오우거까지 등장해버렸다.
“이건 진짜 좋지 않은데…….”
아시테르의 시선이 베네피트를 찾았다.
그는 화염 마법을 사용하며 오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 있어야 할 라빈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은 돌아가야 해!”
아시테르가 검을 거두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곧바로 돌담 쪽을 향해 내달렸다.
오크들이 그를 막아서기 위해 움직였다.
“와아… 저게 뭐람.”
한편 먼발치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라빈이 오우거를 보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뜨거운 콧김을 불어내고 있는 오우거의 두 눈동자가 라빈을 바라봤다.
“으… 험악하게 생겼어…….”
라빈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아시테르 쪽으로 향했다.
“헤에?”
아시테르는 단숨에 돌담 쪽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돌담에 올라오자마자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베네피트 형! 오우거가 수정체를 노리고 있어요!”
“나도 알아!”
오우거의 존재를 확인한 베네피트가 급하게 화염 마법을 준비했다.
그동안 아시테르가 미리 가져다 놨던 활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라빈이 미소를 보였다.
“아아, 활은 저런 용도였구나.”
아시테르가 활시위를 당겼다.
그가 노리는 것은 오우거가 아니었다.
콰앙!!
오우거의 마법에 돌담이 부서지자 오크들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아시테르는 안으로 들어서는 오크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피융!
푸슉!
아시테르가 화살을 날릴 때마다 오크들의 몸에 화살이 꽂혔다.
그는 다시 활시위를 당기며 오우거와 오크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아……!”
그때 그의 뒤편에서 라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을 잘못 디딘 라빈이 돌담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이곳으로도 오크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라빈이 아시테르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아시테르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아… 이제 오빠는 어떻게 할 거예요?”
라빈이 돌담 아래로 떨어진 것을 본 아시테르가 우뚝 멈춰 섰다.
이어 아시테르의 시선이 오우거 쪽으로 향했다.
오우거와 오크들이 수정체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베네피트 혼자서 저들을 모두 막아내기란 무리인 상황.
당장 달려가지 않으면 늦는다.
하지만 아시테르의 몸은 이미 라빈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손에 끼고 있는 반지에게로 향했다.
솔직히 이 반지만 빼면 모든 것이 편해질 수 있었다.
오크들과 싸우면서도 이 생각이 수도 없이 머릿속을 괴롭혀 왔다.
하지만 결국 그는 반지를 빼지 않았다.
“후읍!”
아시테르가 활시위를 당겨 라빈에게 접근하려는 오크들을 견제했다.
다행히 활을 경계한 오크들이 섣불리 라빈에게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동안 아시테르가 다가와 라빈의 앞에 섰다.
“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라빈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약간 멍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아시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몰아쉰 아시테르가 라빈을 살폈다.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왜 나한테 왔어요?”
“그야 네가 위험한 상황이잖아.”
“그치만 이러면 수정체가 파괴될 텐데요?”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바보예요? 어차피 이건 시험이에요. 정말 위험하면 여길 지켜보고 있는 시험관들이 절 보호해 줄 거라고요.”
“그래도 만일의 상황이라는 게 있잖아.”
아시테르가 다가오는 오크를 베어내며 말했다.
마력으로 신체 능력을 보완했던 반동 탓인지 두 팔이 눈에 띄게 부들거렸다.
그래도 아시테르는 오크들과 마주섰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라빈이 이만 몸을 일으켰다.
바들바들 떨던 그녀의 몸이 떨림을 멈췄다.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도 평온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아카데미 시험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는데…….”
낮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아시테르보다 앞으로 나섰다.
아시테르가 그런 라빈을 말렸다.
“위험하니까 뒤로 물러나 있어.”
“그거 알아요? 오빠는 진짜 순진하고 바보 같아요.”
“뭐?”
“그래도 싫진 않네요. 자기 말에 책임질 줄은 아는 사람 같아서.”
라빈이 아시테르를 보며 웃었다.
아시테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얘기야?”
“운 좋은 줄 알아요. 나랑 같은 팀이 된 것 말이에요.”
“응?”
“결정했거든요.”
그녀의 전신에 자줏빛 마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시테르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빠가 두 번째예요. 우리 가문 외에 다른 사람 앞에서 내 진짜 마법을 보여주는 것은.”
두두둑!
라빈의 피부를 뚫고 하얀 무언가가 뻗어 나왔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한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를 본 아시테르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라빈의 손에 들린 것은 틀림없는 뼈였다.
팟!
대지를 박찬 라빈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뼈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시테르의 검술과는 또 다른 움직임이었다.
“취에에――!!”
“취엑!!!!”
오크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뼈는 자유자재로 늘어나며 주변의 오크들을 사정없이 베어버렸다.
순식간에 주변을 정리한 라빈이 아시테르에게 다가왔다.
“이건…….”
“후후,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우리 이따가 얘기해요.”
라빈이 고개를 돌려 오우거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베네피트가 상당히 버텨준 덕분인지 아직 오우거와 오크들이 수정체에 공격을 가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조만간이었다.
라빈이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웃었다.
“여기서 잠시만 쉬고 있을래요?”
그녀는 아시테르를 두고 오우거 쪽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어찌나 빠르고 가벼운지 단숨에 돌담을 넘어 아시테르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뭐… 뭐야……?”
몸을 일으킨 아시테르가 서둘러 라빈의 뒤를 쫓았다.
그녀는 벌써 오우거가 있는 쪽에 도착하고 있었다.
“야! 너 어딜 갔다 온 거야!?”
지친 기색이 역력한 베네피트가 라빈을 보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짜증 가득한 그를 내려다보며 라빈이 입을 열었다.
“시끄럽고. 휘말려서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서기나 해요.”
라빈의 달라진 분위기에 베네피트가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팟!
높이 뛰어오른 라빈이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녀가 착지한 곳은 오우거의 앞쪽이었다.
오우거는 갑자기 등장한 작은 인간을 보며 코웃음 쳤다.
“웃었니?”
라빈이 뼈로 된 검을 들어 오우거를 향해 겨누었다.
오우거가 눈앞의 건방진 인간을 처리하기 위해 마법을 펼쳤다.
팡!
손아귀에서 쏘아진 화염이 라빈을 노렸다.
라빈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화염을 향해 달려 나갔다.
화륵!
화염을 가른 라빈의 검이 그대로 오우거에게까지 뻗어나갔다.
라빈이 빠르게 발을 놀리며 검을 휘둘렀다.
뼈로 된 검에 오우거의 가죽이 두부 썰리듯 잘려 나갔다.
핏물을 쏟아낸 오우거가 분노해 라빈을 찢어 죽이려 했다.
녀석이 라빈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볍게 몸을 움직여 오우거의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
오우거의 팔을 타고 움직인 라빈이 뼈를 일직선으로 찔러 넣었다.
푸슉――!
뼈가 그대로 오우거의 목을 관통했다.
“쿠룩…….”
오우거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라빈을 바라봤다.
웃고 있는 그녀의 눈빛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바쁘니까 빨리 좀 죽어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