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깨달음
“물이요?”
“그렇지. 손아귀의 물은 움켜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버리지. 마찬가지야. 우리가 마력의 모든 부분들을 움켜잡고 컨트롤하려 한다면?”
“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듯 마력도 컨트롤에서 빠져나가려 한단 말인가요?”
곁에서 듣고 있던 에스파가 갑자기 끼어들며 물었다.
윈더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켜봤을 때 아시테르 학생은 모든 마력의 부분 부분을 다 컨트롤 하려고 하고 있네. 이것은 분명 강점으로 작용하기도 할 거야. 그만큼 세심하고 정밀한 마력 컨트롤을 가능하게 하니까. 하지만 때로는 이것이 취약점이 되기도 하지.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말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윈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 바람, 불, 흙 등등 모든 것에는 각자의 성질이 있어. 마력 또한 마찬가지. 때로는 그 성질과 흐름을 그대로 두는 것도 필요해. 그러면 놀랍게도 때때로 더욱 강한 위력을 나타내기도 하거든. 내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나?”
아시테르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비슷한 말을 비체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과거 아시테르는 유미르나 비체처럼 강하고 위력적인 검술을 펼치고 싶어 동작마다 온몸에 힘을 준 적이 있었다.
이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비체가 말했다.
‘이 녀석아. 모든 움직임에 힘을 준다고 더욱 강한 검술을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힘차고 강하게! 각 움직임마다 필요한 요소가 다른 법이야.’
그때는 비체의 말이 아리송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깨달을 수 있었다.
“흐름을 역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대로 흘러가게 두는 것. 때로는 그것이 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호오…! 그렇지! 에스파 녀석과 다르게 제법 이해가 빠른 친구로구나.”
아시테르의 혼잣말을 들은 윈더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나,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이제보니 괜한 기우였던 것 같다.
윈더가 보기에 아시테르는 그가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자아, 그럼 다음 학생.”
윈더의 시선이 이번엔 라빈에게로 향했다.
그가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자 라빈이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괜찮다면 그쪽에게도 조언을 해주고 싶은데 말이야.”
“네, 좋아요.”
“학생의 마법은 현재 굉장히 불안정해.”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마음이 불안정하면 밖으로 흘러나오는 마법도 불안정해지는 법이야. 워낙 특이한 마법을 사용하니 다른 것보다는 이쪽으로 조언을 주고 싶군.”
“아…….”
윈더가 라빈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라빈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 말이 있지. 나 자신을 스스로가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겠냐고. 결국 본인의 마법이 무엇이든 스스로가 먼저 애정하고 다가가지 않으면, 마법도 반응하지 않는 법이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알 것 같아요.”
“그래? 후후, 다들 똑똑하구나.”
“네. 좋은 말씀 감사해요.”
라빈이 웬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녀를 보며 에스파가 놀란 얼굴을 보였다.
윈더의 시선이 이번엔 에스파에게로 향했다.
“못난 제자야.”
“네, 교관님.”
“너는 앞으로 더더욱 죽을 각오로 노력해야겠구나.”
“네?”
“보니까 곁에 있는 친구들이 워낙 뛰어난 친구들이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함께 발맞춰 걸으려면 지금까지보다 더더욱 피나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말이다.”
“네!”
힘차게 답하는 에스파를 보며 윈더가 피식 웃었다.
그는 에스파의 머리를 한껏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잘하고 있다.”
윈더의 칭찬에 에스파가 코를 쓱 훔쳤다.
그때 아시테르 쪽을 바라보던 라빈이 큰 소리를 내었다.
“세상에!”
아시테르가 들고 있던 풀줄기들이 한데 엮여 아름다운 꽃 모양을 형성했다.
에스파와 윈더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
“허. 그래도 며칠은 걸릴 줄 알았더니 단번에 내 말을 이해하고 적용했단 말야?”
윈더가 진심으로 놀라 말했다.
아시테르도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윈더는 박수를 아끼지 않으며 아시테르의 성공을 축하했다.
“정말 대단하구만.”
“아니에요. 교관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저는 계속해서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나는 그저 내 개인적인 생각을 말할 뿐이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더 발전해내는지는 받아들이는 학생들의 몫이지. 그런 점에서 지금의 발전은 자네 스스로 이루어낸 것이나 다름없네.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학생이구만.”
윈더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다.
그는 아시테르를 포함해 라빈과 에스파를 번갈아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자네들이 꼭 마법기사가 되어 이 나라를 위해 힘써주었으면 좋겠네.”
“네!”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그들을 보며 윈더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 사람이 남은 수련을 마칠 때까지 지켜보며 아낌없는 조언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아시테르와 라빈, 에스파도 수련을 멈췄다.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그래. 모두 고생 많았다.”
“저희가 윈더 교관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건 아닌지…….”
“아냐. 내가 좋아서 이곳에 머물렀는걸. 덕분에 나도 옛날 생각도 나고 너무나도 좋은 시간이었다.”
윈더는 잠시 산책을 하다 돌아가겠다며 세 사람을 먼저 돌려보냈다.
에스파는 마지막까지 윈더를 향해 인사해 보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았다.
멀어져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윈더가 피식 웃었다.
그가 있는 곳으로 누군가 천천히 걸어왔다.
“어땠습니까?”
“정말 좋았습니다. 다들 똑똑하고 대단하군요. 특히나 저 아시테르라는 소년은…….”
“그렇죠? 그리고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자꾸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아시테르 학생을 보면서 유미르 단장님을 떠올렸거든요.”
“후후, 맞습니다. 유미르 단장님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저 아이에게서도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저 아이에게 유독 관심을 보이셨던 겁니까? 데미안님.”
데미안은 대답 대신 미소를 보였다.
그러자 윈더도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그렇게 유미르님을 잃은 것은 정말 뼈아픈 일이었습니다. 다른 기사단에 있는 저까지도 그날은 잊을 수 없는…….”
“맞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강해져야 합니다. 그날 유미르님과 아레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피해를 입었겠죠. 어쨌거나 저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윈더님.”
“하하하! 아닙니다. 저도 제 제자가 보고 싶어서 찾아와 봤을 뿐입니다.”
“정말 멋진 친구더군요. 그동안의 얘기를 얼추 들었는데 이제보니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길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기대가 됩니다.”
윈더와 데미안은 아시테르 일행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한동안 대화를 이어갔다.
* * *
“호오… 오늘은 자신이 있다는 말이냐?”
“네!”
“그렇단 말이지… 좋아 그럼 어디 한번 도전해봐라. 대신 조건이 있다.”
“그게 뭡니까?”
“이번에 실패하면 깔끔하게 이 아카데미에서 나가는 거다.”
바네티 교관의 말에 다른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그만큼 바네티 교관의 제안은 조금 억지스러운 것이었다.
시험에 떨어져도 몇 번이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아카데미였다.
그런데 바네티 교관은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아시테르에게 불합리한 조건을 내건 것이다.
아시테르가 오히려 그런 바네티 교관을 보며 물었다.
“성공하면요?”
“뭐!? 성공!? 으하하!! 네가 성공할 리가 없을 것 같은데?”
바네티 교관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순간 그의 속마음을 말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다른 학생들도 좋지 않은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크흠… 어쨌든 좋다. 네가 만약 이번에 성공한다면 내가 책임지고 승급전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마.”
“그 약속 꼭 지키시리라 믿어요.”
아시테르가 해맑게 웃으며 답하자 바네티 교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시테르는 언제나 이렇게 자신 있어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오늘은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뭐지?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인데…….’
하지만 이미 약속을 해버렸으니 이제와 물릴 수도 없었다.
아시테르의 곁에 항상 붙어 다니는 라빈과 에스파도 오늘은 묘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조교가 아시테르에게 시험용 실오라기를 가져다주었다.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저 실오라기들을 한곳에 뭉쳐 원을 만들어내기만 하면 성공이었다.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높은 집중력과 섬세한 마력 컨트롤이 아니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
아시테르가 조교에게서 실오라기를 받아들었다.
라빈과 에스파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동안 연습하면서 아시테르가 몇 번이고 성공해왔지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작 실오라기를 들고 있는 아시테르는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실오라기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실오라기가 푸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보나마나 아냐?”
“흐흐 드디어 떨거지 3인방 중 하나가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나?”
“천민 출신에… 차라리 나가는 게 우리 아카데미의 위신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도 모르지.”
“맞아. 저 정도 수준이 아카데미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어? 야 잠시만… 저길 좀 봐…….”
“어라……?”
평소처럼 조롱하던 학생들이 곧 두 눈을 크게 뜨기 시작했다.
놀란 몇몇 학생들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아시테르가 들고 있던 실오라기들이 춤을 추듯 흔들거리며 한곳에 뭉쳤다.
깔끔한 원을 만들어낸 실오라기들이 곧 다시 춤을 추는 것처럼 흔들거렸다.
이어 푸른빛이 환하게 퍼지며 아름다운 꽃 모양을 만들어냈다.
아시테르는 꽃 모양이 된 실오라기들을 한데 엮으며 라빈에게 건네주었다.
“선물.”
“와아―!”
환하게 웃은 라빈이 아시테르가 건네주는 꽃을 받아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바네티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바로 눈앞에서 아시테르가 너무도 완벽하게 시험에 통과해냈기 때문이다.
원을 그리는 것도 모자라 저렇게 아름다운 꽃을 만들기까지.
“하루아침에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바네티 기준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뒤늦게 고개를 흔들며 몸을 움직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바네티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이 한 문장뿐이었다.
그는 조교가 가져온 곳이 아닌 다른 통을 뒤지며 실오라기를 한 움큼을 가져왔다.
“이걸로 다시 해봐라!”
바네티 교관이 씩씩거리며 아시테르에게 실오라기를 내밀었다.
아시테르는 말없이 그 실오라기를 받아들며 다시 완벽한 원을 만들어내었다.
“말도 안 돼…….”
당황해하는 바네티 교관의 앞으로 라빈이 걸어왔다.
그녀는 눈웃음까지 지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약속은 잊지 않으셨죠, 바네티 교관님?”
“으… 으음……!”
“약속은 꼭 지키시리라고 믿어요!”
아시테르와 라빈, 에스파가 웃으며 바네티 교관을 쳐다보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제와 약속을 번복할 수도 없었고, 다른 마땅한 핑계도 없었다.
게다가 지켜보는 학생들도 많아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한발 물러나야 할 때였다.
“알겠다. 승급전을 치를 수 있도록 승인을 내어주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야호―!”
세 사람은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