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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46화 (46/424)

046화 3등급의 지박령 (1)

홀로 바깥에 나와 있던 크리울로스가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는 푸글이 다가오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가주님.”

“오오, 무슨 일인가.”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에 크리울로스가 그때서야 고개를 돌렸다.

“또 아시테르 도련님을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후우… 그 녀석만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겁단 말이지.”

“가주님께서도 노력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원로들이 다 같이 번개라도 맞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 같아. 푸글. 이참에 우리도 프로메테 가문에서 떠나버릴까?”

“농담도 잘하십니다. 크리울로스님의 몸엔 프로메테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질 않습니까.”

“…….”

크리울로스는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웃음만 보였다.

그가 다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

“테오도라 도련님께서 찾아왔습니다.”

“호오, 테오도라가?”

“네. 벌써 이곳까지 왔군요.”

푸글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테오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크리울로스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테오도라! 한창 바쁠 네가 이곳까진 무슨 일이냐?”

“할아버지께서 궁금해 하실 만한 소식을 갖고 왔습니다.”

“내가 궁금해할 만한 소식?”

“네! 아시테르에 관한 소식입니다!”

테오도라의 입에서 아시테르의 이름이 나오자 크리울로스도 순간 반색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테오도라도 피식 웃었다.

“아시테르 녀석이 이제 3등급으로 승급했다고 합니다.”

“오오!! 드디어 3등급에 올랐단 말이냐!? 다행이구나!”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렸잖아요. 아시테르도 저 못지않게 뛰어나다니까요.”

“그래 그랬지. 그 녀석이 한 번에 4등급으로 입학했을 때는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게 뭐냐. 그러고 나서 3년째 제자리걸음만 했잖나. 이럴 줄 알았으면 이곳에 있는 동안 내가 특훈이라도 시키고 보내는 건데…….”

크리울로스가 아쉬움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시테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테오도라와 함께 특훈을 해왔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알지 못했다.

테오도라도 굳이 그 사실을 알릴 생각이 없었기에 따로 말을 꺼내진 않았다.

“할아버지. 그녀석이 누구 아들인데요. 분명 잘 해낼 겁니다.”

“후우… 그래. 나도 괜히 신경 쓰여서 그렇지 그 녀석이 잘 해낼 거라 믿고는 있다. 아레나뿐만 아니라 그 녀석의 아들이기도 하니까.”

크리울로스가 유미르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테오도라도 아시테르를 생각하니 싱글벙글 웃음이 났다.

크리울로스가 테오도라의 손을 붙잡았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구나. 나는 처음에 네가 아시테르를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아버지. 아시테르는 제 동생이에요.”

“후후, 그리 생각한다니 다행이다. 네가 그 아이를 잘 챙겨주길 바란다. 아직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은 아이야.”

“네. 그런데 할아버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말해봐라.”

크리울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테오도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문에서는 왜 아시테르를 거부한 겁니까?”

“아시테르의 아버지 때문이다.”

“고모부요?”

“그래. 너에게는 고모부겠구나.”

“그러고보니 고모부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이미 돌아가셨다는 말밖에는…….”

테오도라가 궁금해하며 말했다.

크리울로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테오도라에게로 향했다.

유미르와 아레나의 얘기를 테오도라에게는 말해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아시테르의 아버지는 ‘유미르’라는 사내다.”

“유미르라면… 혹시 심연의 마법기사단의 단장을 지내셨던 그분 말씀이십니까?”

“그래.”

테오도라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그라서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시테르가 프로메테 가문에게서 외면받는 이유를 말이다.

“할아버지. 제가 생각하는 그 이유 때문입니까?”

“나도 어쩔 수가 없더구나.”

“아닙니다. 할아버지께서 가문의 원로들과 대판 싸우셨단 얘기는 푸글 아저씨를 통해 들었습니다.”

“나 또한 가문의 원로들과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가주로서’ 아닙니까?”

테오도라의 물음에 크리울로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나 영특한 아이였다.

그는 크리울로스의 마음 한편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어차피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시테르가 설사 평생 프로메테 가문의 그늘에 오지 못한다고 해도 녀석이 제 귀여운 동생인 것은 변함없으니까요.”

테오도라가 특유의 미소를 보이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 그가 고개를 돌려 다시 크리울로스 쪽을 바라보았다.

“참, 아시테르가 요즘 아카데미에서 뭐라고 불리는 줄 아십니까?”

“뭐라고 불리는데?”

“무승자(無勝者)입니다.”

“무승자…?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단 말이냐?”

“네. 무슨 생각인지 3등급부터 가능한 대결 시스템에서 모든 학생들과 겨뤄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전패라고 하더군요.”

“하! 이것 참… 어떻게 한 녀석도 이기질 못해……?”

“아하하!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런 짓을 벌이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일 녀석은 아니라서요.”

“쯧… 그 녀석이 너무 약한 것은 아니고? 이거 아레나가 모질지 못하고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것은 아닌가 모르겠구만……!”

크리울로스가 혀를 차며 실망했다.

그러자 테오도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그 녀석이 마음만 먹으면 저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걸요.”

* * *

털썩.

아시테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을 크게 고르는 그를 보며 눈앞의 상대가 마법을 거두었다.

“승부는 난 것 같네.”

사내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 경기장을 떠나갔다.

그 자리에 남겨진 아시테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대결이 끝나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라빈이 그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아시테르 오빠.”

“왜?”

“대체 이런 짓을 왜 하는 거예요?”

“후후. 재밌잖아.”

“대체 뭐가요? 맨날 일부러 지기만 하잖아요.”

“티 났어?”

아시테르의 물음에 라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을 저리 막 쓰는데도 귀여운 외모는 어디 가질 않았다.

“당연하죠. 내가 오빠의 실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하하, 그렇네.”

“이왕 하는 것 시원시원하게 이겨버리지.”

라빈이 입술을 댓 발 내밀며 아시테르의 상처를 살폈다.

어느새 다가온 에스파가 상처약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지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마음에 들겠어요? 기껏 3등급에 올라왔더니 허구한 날 이렇게 얻어터지고 다니는데.”

“흐음… 그런가? 나는 이러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는데.”

“대체 뭘 배운다는 거예요?”

“사람마다 잘하는 것들이 다 다르잖아. 거기다 이 세계는 넓어. 정말 다양한 마법들이 존재하더라구. 그래서 그 마법들을 직접 느끼고 싶었어.”

한껏 미소를 짓는 아시테르를 보며 라빈이 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걸 꼭 져가면서 해야 해요?”

“오늘 만난 상대는 카젠이라는 학생인데. 이 친구는 상대가 강해 보이면 대결 자체를 절대 승낙하지 않아.”

“그래서요?”

“지금 내 별명이 뭔지 알지?”

“3등급 최약체요.”

“맞아. 그래서 나랑은 편하게 대결에 응해주더라구.”

“설마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다 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죠?”

“왜 아니겠어. 나는 모든 학생들과 부담 없이 대결해 보고 싶어.”

아시테르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진심 가득한 그의 표정에 라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득 궁금해진 에스파가 아시테르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생들과 대결을 해본 소감은 어때?”

“진짜 신기하고 대단한 마법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많아.”

“그중에서 네가 진심으로 붙었을 때 이기지 못할 학생은? 너 다른 학생들의 마법을 모두 구경해보고 싶은 목적도 있지만 사실은 다른 목적도 있잖아? 다른 학생들에 대해 파악해 보려는 것 말이야.”

“내가 전력을 다해서 이기지 못할 상대라… 없어.”

잠시 생각해보다 진지하게 답변을 내놓는 아시테르를 보며 라빈과 에스파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조용히 아시테르를 부축해주었다.

“어? 혹시 너희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네네… 저는 오빠의 그런 자신감이 너무 좋아요.”

“그래 친구야. 패기는 좋다. 이제 노력하는 일만 남았어.”

“에에… 정말인데.”

두 사람에게 질질 끌려가는 아시테르가 두 눈을 꿈뻑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라빈과 에스파는 아시테르의 말을 모른 체 했다.

그때 아시테르가 두 사람을 붙잡으며 멈춰 섰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야?”

라빈과 에스파가 동시에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사뭇 심각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한 명을 잊고 있었어.”

“그게 누군데?”

“3등급의 지박령이라고 불리는 사람. 아직 그 사람과 대결을 해보지 못했어.”

아시테르가 코를 쓱 만지며 말했다.

그러자 에스파와 라빈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 그러고보니 그 사람이 있었죠.”

“근데 그 사람은 아예 활동을 안 하지 않나? 오랫동안 휴학 상태라고 하던데.”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3등급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누군지 아예 모른다고 했어요. 교관님들도 예전 몇몇 교관님들만 그 사람을 봤던 터라 기억하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고 했고. 근데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요 우리는. 보니까 이 아카데미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 됐다고 하던데.”

에스파와 라빈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아시테르가 큰 눈을 깜빡이며 웃어보였다.

“난 알고 있는데?”

“에!?”

“어떻게!?!?”

놀라는 두 사람을 보며 아시테르가 아무렇지 않게 답해주었다.

“형이 말해줬거든.”

“형이요?”

“형이 있었어?”

“응. 얼마 전에 이곳에서 형을 만났거든. 형이 그러던데? 3등급에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 있다고. 가서 한 번 만나보라고 했어.”

아시테르가 품안의 쪽지를 꺼내며 말했다.

그곳엔 면벽동의 한 위치가 적혀 있었다.

“면벽동? 면벽동은 아카데미 내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보내지는 곳 아니에요?”

“맞아. 근데 이 친구는 조금 달라.”

“다르다니요?”

“흐음… 자세한 것은 가봐야 알 것 같긴 한데. 형 말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그곳에 자처해서 들어갔다고 했어.”

“에에? 그게 무슨 말이람.”

라빈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에스파도 고개를 갸웃거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손가락으로 면벽동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니 직접 가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왕 간 김에 그 사람의 마법도 경험해보고!”

“우와… 갑자기 설레요 저.”

“너희 둘 다 이상하다니까 진짜… 나는 위험할 것 같으니까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던 에스파가 아시테르와 라빈의 표정을 살폈다.

그래도 그동안 오래 붙어 있었다고 이제는 표정만 봐도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에스파가 아무리 가지 말자고 말해도 저 두 사람은 에스파를 놓고서라도 갈 것이 분명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함께 하는 것이 나았다.

“가자… 가…….”

결국 에스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아시테르와 라빈이 동시에 어깨동무를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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