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화 데미리우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뒤 세 사람이 다시 한자리에 앉았다.
“와 방금은 나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장난이 너무 과했다고 라빈.”
“에스파 오빠. 가끔은 이렇게 실전처럼 해야 실력이 더 느는 거라구요.”
“그래도 뼈에 뚫려서 죽고 싶지는 않아.”
“에이 설마 제가 오빠를 죽이기야 하겠어요?”
“응. 가능할 것 같아.”
에스파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라빈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친남매가 따로 없어 보였다.
에스파가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진짜 우리 어떻게 하지? 이대로 팀원을 구하지 못하면 이번 승급전에는 나갈 수 없게 돼.”
“그러게요. 정말 어떻게 하죠? 이왕 이렇게 된 것 제가 나서서 한바탕 날뛰고 올까요? 그러면 제 실력에 반해서 누구 한 명쯤은 들어오지 않을까요?”
라빈이 자신의 팔뚝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에스파가 고개를 저었다.
“너 때문이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나와 아시테르 때문이 더 커. 오히려 너를 우리 쪽에서 빼가려고 하는 놈들도 있는걸.”
“그래요? 나는 전혀 몰랐는데.”
“너의 가문과 그 귀여운 외모까지. 그것만으로도 이미 너를 욕심내는 녀석들은 많지. 나는 솔직히 아직도 네가 왜 우리랑 함께 있는지 의문이다.”
“저는 오빠들이 좋아요. 특히 아시테르 오빠가.”
라빈이 아시테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에스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라빈의 손을 붙잡았다.
“그래 라빈아. 부디 그 맘 오래도록 변치 말고 우리들을 버리지 말아다오.”
“그럼요.”
에스파의 장난 어린 말에 라빈도 익살스런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은 곧 현실에 마주해야 했다.
“정말로 팀원은 어떻게 하죠…….”
“야 아시테르. 너는 왜 아까부터 말이 없는 거야?”
잠자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아시테르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괜찮아. 다른 한 명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이미 우리가 3등급 학생의 대부분에게 물어봤는데…….”
“맞아요 오빠. 진짜 안 물어본 사람이 없을 걸요?”
에스파와 라빈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잊었어? 3등급에는 한 사람이 더 있잖아.”
“아…….”
“설마…….”
아시테르의 말에 에스파와 라빈은 동시에 한 사람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벌써 그곳에 다녀온 지도 한 달이나 지났다.
에스파가 먼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포기해. 그 사람은 면회도 받질 않잖아. 애초에 만나는 것조차 할 수 없는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우리 팀에 데려온단 말이야?”
“맞아요. 진짜 우릴 만나주지도 않는걸.”
“그럼 만약에 그 사람이 우리 팀에 들어온다고 하면 받아줄 의향은 있어?”
아시테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라빈과 에스파는 더 생각할 것이 뭐가 있냐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너무 쉽게 승낙해버리자 아시테르가 재미없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 반응은 뭐예요?”
“그러게. 그 반응은 뭐야?”
“그 사람이 어떤 마법을 쓰고 얼마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잖아? 3등급에 10년을 넘게 머물 정도면 실력이 아예 없는 걸지도 모르는데 정말 괜찮겠어?”
“오빠―! 양심 있어요?”
라빈이 해맑은 얼굴로 돌직구를 날려버리자 아시테르는 물론 에스파도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반면 라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인원만 채워 줘도 돼요. 어차피 내가 다 할 거니까. 혹 하나 더 붙이는 것 정도야 뭐…….”
“혹이라니… 너무해…….”
아시테르가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에스파도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라빈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이나 아시테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럴 땐 괜한 말을 붙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크흠… 아무튼 그럼 다들 동의하는 거지?”
아시테르가 마지막으로 확인하자 라빈과 에스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테르는 곧바로 그들을 이끌고 면벽동으로 향했다.
“데미리우스를 찾아왔어요!”
교관을 보자마자 아시테르가 밝게 외쳤다.
그러자 교관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또 왔어?”
“네!”
“어휴, 따라와라.”
이런 일이 익숙한지 교관은 곧바로 아시테르를 데리고 C동으로 향했다.
면벽동에 처음 들어와 본 라빈과 에스파는 시선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여기저기 보이는 동굴 입구를 보며 라빈이 입을 열었다.
“저기가 입구예요?”
“그래. 저곳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거다.”
“에? 근데 저렇게 대놓고 열려 있으면 언제든 나올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입구마다 보이지 않는 결계마법이 펼쳐져 있다. 그러니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호오…….”
라빈의 질문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교관도 심심했는지 모든 질문에 친절히 답해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서야 데미리우스가 있는 12―1번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밖에 인기척이 들려오자마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왔어요……?”
“네.”
“대체 왜 매일같이 날 찾아오는 거예요……?”
“그 이유는 말했잖아요.”
“그건 불가능하다고… 계속 얘기 했잖아요…….”
“나도 알아요. 그래서 이번엔 다른 용건으로 왔어요.”
안쪽에서 들려오는 데미리우스의 목소리는 예상과 다르게 맑은 목소리였다.
당연히 음침한 목소리일 줄 알았던 에스파는 예상외의 반전에 눈을 크게 떴다.
라빈도 먼발치서 들려오는 데미리우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교관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아시테르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시테르 너는 대체 저 친구에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냐?”
“저라도 집착하고 싶어서요.”
“그게 무슨 말이냐?”
“많은 사람들이 데미리우스를 잊고 있잖아요. 저라도 집착하면서 기억해주고 싶어요. 저 어두컴컴한 세상에서 나와 준다면 더 좋고요.”
“그니까 그걸 왜 네가 해?”
“그냥요.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 없는 것처럼.”
아시테르가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그러자 교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보이고 말았다.
그는 뒤편에 있는 라빈과 에스파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네. 익숙해요.”
“저는 이래서 아시테르를 좋아해요.”
라빈과 에스파의 대답에 교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번엔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도 저를 만나고 싶어요?”
“네.”
“저랑 대결하고 싶다는 생각도 여전하고요?”
“제가 말했잖아요. 3등급 중에서 대결해 보지 않은 상대는 그쪽이 유일하다고.”
“하아… 좋아요. 대신 후회하지 마세요.”
곁에 있던 교관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그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그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던 데미리우스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면회를 받겠다고 말한 것이다.
“말도 안 돼…….”
“교관님. 들으셨죠? 결계마법 좀 풀어주세요.”
아시테르가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교관이 얼떨결에 제어장치로 이동해 결계마법을 일시적으로 없애주었다.
“지독한 녀석…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찾아오더니 결국 이곳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해 내는구나…….”
아시테르와 라빈, 에스파가 마침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니 안쪽에 환한 공동이 드러났다.
그곳에 홀로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에 퀭한 눈동자.
거뭇한 인상이 눈에 들어왔다.
빼빼마른 그를 보며 아시테르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 드디어 보네요!?”
“당신처럼 지독한 사람은 처음입니다.”
“우리 아버지한테도 그런 말 가끔 들었어요.”
“왜 자꾸 저를 찾아오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얼굴 보고 딱 잘라서 말하려고 안으로 불렀어요.”
“네 말씀해보세요.”
“그쪽이 저한테 원하는 게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결론적으로 저는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거예요…….”
“왜요?”
“저는 이 면벽동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그 이유가 뭔데요?”
“저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거든요.”
“어째서요?”
아시테르가 진심으로 궁금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데미리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걸치고 있던 겉옷을 살짝 풀어 헤쳤다.
“으앗!?”
놀란 라빈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야, 손가락도 붙여야지. 그러면 시야가 다 보이잖아.”
“쉿, 조용히 해요.”
겉옷을 벗은 데미리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몸은 죽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곳곳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시테르가 좀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데미리우스 쪽으로 걸어갔다.
“위험하니까 함부로 가까이 오지 마세요.”
데미리우스의 말에 아시테르가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을 읽은 데미리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몸에는 독이 가득해요. 마력과 독이 지금도 이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요. 저는 이것을 다스리는 것만 해도 벅차요. 그러니 대결은 꿈도 꿀 수 없죠. 아마 함부로 마법을 사용하려 들었다간 이대로 제 몸이 폭발해버릴지도 몰라요.”
“왜 그런 상태가 된 거예요? 물어봐도 돼요?”
아시테르의 조심스런 물음에 데미리우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시테르와 라빈, 에스파는 침묵을 지키며 데미리우스의 다음 말을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무겁게 닫혀 있던 데미리우스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우리 하프강 가문은 강력한 저주에 걸렸어요.”
“어떤 저주인데요?”
“우리 가문 사람들은 모두 몸에 독을 품고 태어나요… 몸속의 독은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키는데 그럴 때면 엄청난 통증을 일으켜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늘 고통 속에 살아왔어요.”
“아…….”
“그러다 제가 태어났어요. 그 저주에서 모두를 구해줄 제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렸을 때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가문 사람들의 독을 제가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제가 독을 가져오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독의 발작이 멈춰요.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몸속에 독이 남아 있질 않으니까. 게다가 그 사람이 아이를 낳아도 더 이상 독은 유전되지 않게 되는 것까지 알게 되었어요.”
데미리우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도와 씁쓸함이 뒤섞여 보이는 복잡한 웃음이었다.
그의 말을 경청하던 아시테르가 어딘가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는 곧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마…….”
“말하기도 전에 알아차렸나 보네요. 맞아요. 저는 지금 우리 가문 사람들의 모든 독을 몸에 품고 있어요.”
데미리우스의 말에 라빈과 에스파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시테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라빈이 손가락 마디에 핏기가 가실 정도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해… 결국 자기들만 고통에서 해방되겠다고 당신을 희생시킨 거잖아요?”
“세상에…….”
에스파도 나지막이 한마디 내뱉으며 시선을 내려뜨렸다.
데미리우스가 애써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괜찮아요.”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아시테르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데미리우스의 곁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놀란 데미리우스가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그를 막았다.
“다가오지 말아요! 위험하다니까요? 언제 독이 발작할지 몰라요! 독이 발작하면 당신도 위험해진단 말이에요.”
그러나 아시테르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끝내 데미리우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두 팔을 뻗었다.
순간 놀란 데미리우스가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곧 그의 두 눈이 크게 떠지고 말았다.
온몸에 따스한 감촉이 전해져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