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데미리우스의 사연
데미리우스의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인지 데미리우스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한 번 터진 눈물샘은 마치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처럼 계속해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시테르는 그런 데미리우스를 한껏 끌어안아 주었다.
흐느끼는 몸을 아시테르의 따뜻한 손이 쓸어내려 주었다.
“나는… 나는…….”
“지금은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아시테르가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데미리우스는 말없이 아시테르의 품에서 눈물을 흘렸다.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아시테르의 품에 한층 더 얼굴을 파묻었다.
라빈과 에스파도 측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미리우스는 한참을 울다 서서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가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아시테르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죄송해요. 갑자기 왜 이렇게 눈물이 난 건지…….”
“괜찮아요. 당신도 그동안 많이 아팠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마음껏 울어도 돼요.”
“…고마워요.”
데미리우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는 조금 전 미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편안해진 그의 얼굴을 보며 아시테르도 마주 웃어 보였다.
“가문 사람들을 안 만난 것은 그들을 원망해서인가요?”
아시테르의 질문에 데미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의외의 대답에 아시테르는 물론 라빈과 에스파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데미리우스가 자신의 가문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다른 대답이 나오자 모두 궁금해하는 눈빛들이었다.
“저는 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아요. 만약 제가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한 사람만 희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을 수 있잖아요.”
“다수의 행복을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게 당연하다는 거예요!?”
라빈이 발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데미리우스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죠.”
“거짓말…….”
“아뇨. 정말 그들의 선택을 이해합니다. 물론 저도 가문 사람들을 한때 원망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요.”
“죽을 날만 받아놓고 이렇게 혼자 썩어가고 있는 게 정말 괜찮다고요?”
라빈의 차가운 말에 데미리우스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그가 몸을 부르르 떨자 아시테르가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그만해 라빈.”
“그치만요, 오빠.”
“네 마음은 알겠어.”
“칫…….”
라빈이 혀를 차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버리자, 아시테르의 시선이 데미리우스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해요?”
“네……?”
“그들의 삶이 있듯이. 데미리우스 당신에게도 당신의 삶이 있잖아요. 그래서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 거예요.”
아시테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미리우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사실 그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도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은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가문 사람들을 원망하기도 하는가 하면 때때로 그들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해보려 한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자신에게까지 미쳤을 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정말 ‘내가 원해서’ 이루어진 일일까 아니면 ‘그들이 원해서 나도 원하게 된’ 일일까.
나 하나만 희생해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았다면 그것으로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다 도달하게 되는 생각의 끝은 늘 하나였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돌이킬 수 없으니 받아들이자.
그는 늘 이런 말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다른 것들은 다 떼어놓고. 지금 상황만 바라봐요.”
그때 상념을 깨우는 아시테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어느새 자세를 낮춰, 몸을 숙이고 있는 데미리우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데미리우스는 아시테르의 맑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언젠가부터 혼탁해져 생기를 잃은 자신의 눈동자와 다르게 아시테르의 눈동자에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데미리우스를 빤히 바라보던 아시테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은 행복해요?”
“…아뇨.”
아시테르의 물음에 데미리우스가 마침내 답을 내놓았다.
이는 머릿속에 많은 생각을 거쳐 간 대답이 아니었다.
가슴이 느끼는 그대로의 대답이었다.
데미리우스가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사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나도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요. 나는 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죠? 나는 왜… 이렇게 10년 동안이나 이곳에 혼자 머물러야 했죠? 나는 왜!! 이렇게 언제 죽을지 모를 불안에 떨어야 하나요!?”
감정이 격해진 데미리우스가 눈시울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자줏빛 마력이 흘러나왔다.
감정이 격해진 바람에 몸 안의 마력과 독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그것을 자각한 데미리우스가 황급히 아시테르를 자신에게서 밀쳐냈다.
뒤로 밀려난 아시테르가 데미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데미리우스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아시테르 일행을 쳐다보았다.
“안 돼… 내 몸의 독이 또 발작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나도 이 독이 제어가 되질 않아서 독을 잔뜩 머금은 마력이 흘러나오고 말아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여길 벗어나요 어서!”
그런데 아시테르가 오히려 데미리우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니까.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은 거죠?”
“시간 없어요!! 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을……!”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대답해봐요. 이렇게 죽어가길 원해요? 아니면…….”
“당연히 이젠 행복해지고 싶죠!”
데미리우스가 아시테르를 향해 외쳤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피식 웃었다.
드디어 그가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아시테르가 손에 있던 것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안에는 자그마한 환약이 들어 있었다.
“제가 만약 당신을 그 고통 속에서 꺼내준다면 나랑 팀을 이루어줄래요?”
“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날 꺼내준다면 평생 당신을 따를 수도 있어요.”
“그 말 잊지 말아요.”
아시테르가 망설임 없이 데미리우스의 입으로 환약을 집어넣었다.
놀란 데미리우스가 부릅뜬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환한 미소를 보였다.
“원래 몸에 좋은 게 엄청나게 쓰대요.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삼켜요.”
그 말에 데미리우스가 인상을 쓰며 환약을 삼켜버렸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였으니 속는 셈 치고 아시테르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몸 안에서 뜨거운 기운이 퍼지며 격렬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알싸하고 불쾌한 느낌은 몸 안의 모든 것들을 더욱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았다.
“당신… 나한테 뭘 먹인 거예요……?”
“전에 얘기했었죠? 몸 안에 있는 독이 바실리스크의 독이라고.”
“맞아요.”
“마침 우리 할아버지가 예전에 바실리스크한테 물려서 죽을 뻔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만든 독을 다루는 약이에요. 혀의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엄청 쓰다고 말씀하시긴 하셨지만 그 효과만큼은 직방이라고 하던걸요?”
“아…….”
그러고보니 날뛰던 독이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뜨거운 기운과 고통만큼은 도무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때 아시테르가 데미리우스의 뒤편에 섰다.
“뭐… 뭣 하려는 겁니까!?”
“가만히 있어 봐요.”
아시테르가 데미리우스의 등에 양손을 가져갔다.
손에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잘 들어요. 내 마력을 따라 천천히 당신의 마력을 움직여 봐요. 그러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테니까.”
아시테르가 데미리우스의 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데미리우스는 몸속으로 침입하는 낯선 마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 어디에서도 다른 사람의 몸에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는다는 얘긴 들어보질 못했다.
“집중해요.”
“아…….”
아시테르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때서야 데미리우스도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고통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무서울 정도로 곧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시테르가 마력을 이끌면 데미리우스도 함께 마력을 움직였다.
그러자 점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몸 안의 독이 데미리우스의 마력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십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 했던 고통도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제 계속 이렇게 마력을 움직이면 돼요.”
데미리우스가 곧잘 마력을 이끌어가자 아시테르가 이만 손을 뗐다.
어느새 그의 얼굴과 몸은 흠뻑 젖어 있었다.
이는 데미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굵은 땀방울이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라빈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예요?”
“독을 중화시키고 그것을 없애는 데 집중하고 있는 거야.”
“와아… 그게 가능한 거였어요?”
“운이 좋았어. 바실리스크라면 우리 할아버지도 잘 알고 있는 마수거든.”
“에…? 어떻게요?”
“옛날에 싸워본 적이 있으시대. 엄청나게 강한 마수라곤 하던데… 어쨌거나 다행이지. 데미리우스의 몸을 괴롭히고 있던 게 바실리스크의 독이었을 줄이야.”
“그러게요. 덕분에 도움을 줄 수 있었네요.”
라빈이 웃으며 말했다.
아시테르도 다행이라는 눈빛으로 데미리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안심할 수 없어. 바실리스크의 독은 워낙 지독해서… 저기서 데미리우스가 독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럼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하는 것 아냐!?”
에스파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니. 괜찮아. 저길 봐봐.”
아시테르가 데미리우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보니 데미리우스의 안색이 아까보다 한층 더 나아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요동치던 그의 마력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한쪽에 조용히 앉아 데미리우스의 마력 운용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슈와아―!
자줏빛 마력이 데미리우스의 몸 전체를 은은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곤 데미리우스의 심장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졸고 있던 라빈이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아시테르는 이미 두 눈 똑바로 뜨고 데미리우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반면 에스파는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뜬 데미리우스에게서 자줏빛 안광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돼…….”
데미리우스가 곱슬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그의 머리는 염색이라도 한 것처럼 연보랏빛 색으로 물들었다.
거기다 한쪽 눈동자는 자줏빛 안광과 함께 흰자위가 까맣게 죽어 있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데미리우스에게서 풍겨오는 분위기였다.
잠시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던 데미리우스가 아시테르 쪽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대단해요.”
“보아하니 잘 해결되었나 보군요.”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솔직히 제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아시테르는 무언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가 인중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이쯤 되면 독이 자연스럽게 몸 밖으로 배출되어야 하는데…….”
“독은 제 몸에 남아 있어요.”
데미리우스의 말에 아시테르가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
그 말은 즉, 실패를 의미하는 듯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미리우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독은 제 몸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거기다 당신이 준 약 덕분에 저는 제 몸의 바실리스크 독을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한마디로… 지난날보다 훨씬 더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얘기죠.”
“아…! 잘 되었네요!!”
“이제 더 이상 바실리스크의 독이 제 목숨을 위협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덕분에 외형이 조금 변한 것 같긴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뭐가 어떻든 더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거니까.”
데미리우스의 말을 들으며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쨌거나 정말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