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예상치 못한 상황
“숨어 있던 놈이 너였군.”
“제가 앞으로 대놓고 나서는 포지션은 아니라서요.”
“이런 식의 독 마법이라… 용케도 이런 지독한 마법을 익혔네.”
중년인이 고개를 돌려 데미리우스 쪽을 바라보았다.
데미리우스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흐음…….”
중년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수하들은 이미 완전히 독에 중독되어 몸을 가누질 못하고 있었다.
이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독 때문에 몸이 서서히 경직되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 중년인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이것 참 대단하군… 이 정도 수준의 독 마법이라니…….”
“칭찬은 감사해요.”
“완전히 당해버렸어. 결국 너희들을 얕잡아보고 있었던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인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인가?”
데미리우스의 시선이 중년인에게로 꽂혔다.
그의 눈동자엔 살기가 담겨 있었다.
“마음 같아선 우리 대장을 괴롭혔으니 그렇게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순 없을 것 같군요.”
“어째서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 것.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지켜달라고 했거든요.”
“그게 무슨…….”
중년인은 그때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독에 중독된 수하들은 몸에 경련만 일으킬 뿐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시테르에게 당한 수하들도 대부분 기절하거나 고통에 몸부림치기만 했다.
자신의 수하들 중 숨이 끊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제야 중년인도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마법기사단도 아니고 고작 마법기사 아카데미 학생인 녀석들이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다.
“허… 나 참… 이제보니 완전히 정신 나간 놈들이었군.”
쓰러져 있던 아시테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데미리우스와 에스파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몸은 괜찮아!?”
“아아… 보시다시피 아주 멀쩡해요.”
아시테르가 자신의 양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여기저기 찢어진 상처 때문에 핏물이 아직도 옷을 적시고 있었다.
그 많은 공격에 당하고 바닥을 사정없이 뒹굴었으니 이만큼의 상처도 없으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두 사람의 속도 모르고 아시테르가 피식 웃었다.
“잘 해결된 것 같지?”
“너무 무모해 아시테르. 네가 앞으로 나서면 든든하긴 하지만 그래도 몸은 좀 챙겨가며 싸워라 제발 좀.”
“맞아요. 앞장서는 것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마법기사가 되기도 전에 당신을 잃고 싶진 않다고요.”
에스파와 데미리우스의 걱정스런 말에 아시테르가 멋쩍은 미소를 보였다.
“고마워요. 데미리우스 형. 덕분에 살았어요.”
“내가 한 게 뭐 있나요. 두 사람이 저들의 시선을 잘 끌어준 덕분에 뒤에서 편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어요.”
“그나저나 진짜 무섭네요, 독 마법은……. 역시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타입이에요, 형은.”
“그래요? 근데 벌써 그러면 어쩌죠? 내 독 마법의 진짜 무서움은 아직 보여주지도 못했는데.”
“으… 아니에요. 이미 충분히 무서운걸요.”
“어쨌거나 이제 저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독에 중독되었으니 당분간은 꿈쩍도 못할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잘 살피고 있을게요. 데미리우스 형이랑 아시테르 너는 빨리 라빈 쪽을 도와줘야 할 것 같아.”
에스파가 라빈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상황을 살핀 그의 표정은 어느새 잔뜩 굳어진 상태였다.
라빈은 반키라스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라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빈과 다르게 반키라스는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호흡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소용없어요. 당신의 공격은 저에게 닿을 수 없습니다.”
“시끄러.”
라빈이 자신의 뼈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뼈에서 쏘아져 나간 뼛조각들이 반키라스를 노렸다.
반키라스의 마력이 허공에 맺히며 뼛조각들을 막아 냈다.
라빈이 대지를 박찼다.
반키라스와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그녀는 양손에 든 뼈검을 반키라스를 향해 휘둘렀다.
이를 확인한 반키라스가 한쪽 팔을 펼쳤다.
“뜯어먹어.”
마치 반키라스의 명령을 듣기라도 하듯 마력이 움직였다.
붉은색 송곳니의 형상을 띈 마력이 그대로 라빈의 뼈를 베어 먹었다.
“치잇……!”
라빈은 못 쓰게 된 뼈를 버리고 다른 뼈를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반키라스의 손속이 한발 더 빨랐다.
그의 마력이 라빈의 허벅지를 스쳤다.
허벅지 살점이 그대로 뜯겨 나가고 말았다.
라빈은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들고 있던 뼈를 반키라스를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그러나 뼈는 반키라스의 가까이에 가기 전에 붉은 송곳니에 뜯겨 사라지고 말았다.
“대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마법이야 저건…….”
라빈이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물러났다.
붉은 송곳니가 대지를 스쳤다.
아마 더 나아갔다면 자신의 몸이 뜯겨 나갔을지도 몰랐다.
“이제 느껴지시나요? 당신은 저를 이길 수 없어요.”
“아주 건방이 하늘을 찌르시네.”
압도적인 상황에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주변의 뼈까지 모두 없애버린 반키라스가 라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 건가요? 정말 끈질기네요.”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 말이야.”
“그러다 당신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상관없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군요.”
반키라스의 손끝으로 붉은 마력이 모였다.
라빈이 한차례 호흡을 고르더니 반키라스를 보며 웃었다.
“그럼 어디 이것도 한 번 막아볼래?”
라빈이 등에서 커다란 뼈를 뽑아내며 땅에 꽂았다.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폭발적으로 뼈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죽음의 요람.”
수많은 뼈들이 대지를 뚫고 가시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
반키라스의 마력이 동시에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덮쳐오는 가시들을 반키라스의 마력이 무자비하게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때 몇몇 뼈가시들이 반키라스가 아닌 나무의 귀족들에게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반키라스가 팔을 뻗어 다른 곳으로 돋아나는 가시까지 부숴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아시테르가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잠깐만요.”
아시테르가 데미리우스의 독 마법을 저지했다.
데미리우스가 영문을 몰라 아시테르 쪽을 쳐다보았다.
데미리우스가 독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 타이밍이라면 지금이 적기였다.
반키라스는 눈앞의 라빈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들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고 곧바로 몸을 날려 전장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그를 본 라빈이 황급히 마법을 멈추려 했다.
“아냐. 계속해 라빈.”
“응!”
아시테르의 말을 들은 라빈이 그대로 죽음의 요람을 이어갔다.
여기저기 솟구치는 가시들 사이로 아시테르가 마력탄을 날렸다.
손가락으로 튕기는 마력탄을 보며 반키라스가 마력을 움직였다.
슈라아―
사방으로 퍼진 반키라스의 마력이 덮쳐오는 마력탄과 뼈가시들을 먹어치웠다.
뼈들에 구멍이 생긴 것을 확인한 아시테르가 그곳으로도 마력탄을 쏘아버렸다.
피슛―!
아시테르의 마력탄이 반키라스의 팔뚝을 스쳤다.
핏물이 튀는 것을 본 반키라스가 놀란 눈을 보였다.
“……!”
반키라스가 처음으로 두 팔을 역동적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눈앞으로 다가오던 뼈들이 한순간에 붉은 마력에 뜯어 먹히고 말았다.
자신의 뼈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것을 본 라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위험해 라빈!”
크게 소리친 아시테르가 황급히 달려가 라빈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스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아시테르의 발 쪽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아시테르 오빠?”
“괜찮아.”
아시테르와 라빈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있던 자리로 반키라스의 송곳니가 지나갔다.
바닥을 긁는 강렬한 소리에 라빈이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저게……?”
대지에 적나라하게 새겨진 흔적을 보며 라빈이 놀라 말했다.
더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데미리우스가 독 마법을 펼쳤다.
잿빛 운무가 빠르게 퍼지며 반키라스가 있는 곳을 뒤덮으려 했다.
하지만 반키라스는 조금의 당황한 모습도 없이 붉은 마력을 움직였다.
“헛수고예요. 저에게 이런 것은 통하지 않아요.”
반키라스의 마법은 놀랍게도 데미리우스의 독 안개까지 뜯어먹기 시작했다.
데미리우스의 양팔에서 흘러나온 보랏빛 마력이 독사의 형태를 띠었다.
독사는 매서운 기세로 반키라스를 향해 날아갔다.
반키라스가 팔을 대각선으로 휘두르자 허공에 나타난 송곳니가 그대로 독사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구멍 뚫린 독사의 몸에서 독안개가 흘러나왔다.
그 틈에 한쪽으로 돌아 나온 아시테르가 반키라스의 측면을 노렸다.
“호오… 이런 깜찍한 짓을.”
그 순간 아시테르의 귓전으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시테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한쪽에서 튀어나온 해골 병사가 아시테르의 몸을 때렸다.
양손을 교차해 해골 병사의 일격을 막아낸 아시테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노인이 이곳으로 왔다는 것은 곧 미하엘이 당했다는 얘기였다.
아시테르의 시선이 옆쪽을 힐끗 쳐다봤다.
역시나 쓰러진 미하엘이 한쪽에 축 늘어져 있었다.
“반키라스님의 실력은 잘 봤습니다. 과연 기대했던 대로 훌륭하군요. 이제 쉬고 계십시오. 이곳은 제가 처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노인이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지팡이를 들어 올려 바닥을 내려치자 대지에서 해골들의 손이 여기저기서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뻗어 나온 손이 데미리우스를 붙잡으려 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에스파의 화살이 해골손을 정확히 맞혔다.
라빈은 전신에서 뻗어 나온 뼈들로 해골손을 꿰뚫어버렸다.
문제는 아시테르였다.
마력의 양도 바닥을 보이는 데다 몸까지 지친 그가 해골손을 계속해서 피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시테르의 시선이 결국 자신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반키라스 한 명으로도 벅찬데 노인까지 합류한 상황이었다.
이 최악의 상황을 타개하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질지 몰랐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손가락의 반지를 빼내려 했다.
“일단은 모두가 무사한 것이 우선이니까…….”
아시테르의 다른 손이 반지를 붙잡았다.
그가 있는 힘껏 그것을 빼내려 했다.
“어……?”
그러나 반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하지만 반지는 손가락에 꽉 끼어 있는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어라……?”
이게 아니었다.
언제라도 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아시테르마저도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영감님… 이건 좀 너무한…….”
아시테르가 헛웃음을 짓고 있는 때, 해골손이 그의 두 다리를 붙잡았다.
모두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다급히 소리쳤다.
“아시테르 이 바보야 뭐해!”
“오빠 위험해요!!”
“아시테르!!”
하지만 이미 늦어버리고 말았다.
해골손에 붙잡힌 아시테르가 단숨에 노인 곁으로 끌려가 버리고 말았다.
“이런!!”
“아시테르으으!!!”
라빈이 움직이고 에스파가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날카로운 검이 아시테르의 목에 닿자 둘 모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의 목이 달아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멈추는 게 좋아.”
노인이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척 보니 붙잡은 소년은 저들의 리더 격.
리더를 붙잡았으니 흐름을 거머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시나 라빈과 에스파가 우뚝 멈춰 섰다.
데미리우스도 마력을 거두었다.
세 사람이 순순히 말을 듣자 노인이 이제야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래. 착하구나 다들.”
붙잡힌 아시테르가 노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날 어떻게 할 생각이죠? 죽일 건가요?”
“호오…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겁을 집어먹지 않는 거냐? 제법 대담하구나. 하지만 나는 네게 질문을 허락한 적이 없다.”
노인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해골들이 검으로 아시테르의 몸 이곳저곳을 베었다.
아시테르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고통을 참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