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테오도라와 친구들
노인이 반키라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아… 이제 더는 시간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서둘러 저들을 처리하고 저와 함께 가시죠.”
“잠깐만요.”
반키라스의 답에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뭘 망설이는 겁니까?”
“저는 아직…….”
반키라스의 시선이 소녀에게로 향했다.
소녀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반키라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미…미안해요…….”
“…….”
소녀의 사과에도 반키라스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소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 저 때문이에요…….”
“그만.”
“아버지가 절 너무 사랑하고 아끼셔서 그래요…….”
“그만 말해요.”
“저만 없었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겠죠…….”
“그만 말해!!”
반키라스가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마력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소녀의 시선이 반키라스에게 머물렀다.
“당신이 원망할 사람은 바로 저예요…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안 된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레니엘!!”
와트만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인과 반키라스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내 딸은 건드리지마…! 내 딸은 안 된다!! 차라리 날 죽여…! 나를…….”
와트만의 말에 노인이 조소를 보였다.
그가 늙수그레한 음성으로 답했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전부 죽여줄 생각입니다. 물론 제가 아닌 반키라스님께서 직접… 그래야 우리와 함께할 수 있거든요.”
“난…….”
막상 선택의 시간이 되니 반키라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아시테르가 입을 열었다.
“안 죽이는 게 아니라 못 죽이는 거죠?”
“뭐……?”
“아까부터 쭉 지켜봤어요. 그쪽이 하는 행동을.”
“그게 무슨…….”
“라빈의 공격 마법이 귀족들에게로 향할 때 일부러 그 공격들을 막아 줬잖아요, 당신. 정말로 당신이 저들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죠.”
“…….”
“그뿐만이 아니에요. 직접 싸워보고 알 수 있었어요. 당신은 애초에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걸.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사정을 봐주면서 싸우지 않았겠죠.”
아시테르의 말에 반키라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속내를 들킨 어린아이의 모습 같았다.
난데없이 끼어든 아시테르 때문에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노인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해골 병사가 또다시 검을 휘둘러 아시테르의 등에 검상을 남겼다.
등에 상처가 벌어지며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는데도 아시테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은 저 사람들을 죽이고 싶진 않은 거죠? 분노에 이성을 잃어서 일을 벌이긴 했지만 막상 일을 벌이고 보니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닌가요?”
“닥치지 못해!”
노인이 아시테르의 뺨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노인이 아닌 반키라스를 향해 있었다.
“대답해주세요.”
“그게… 왜 궁금해요?”
“당신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어서요. 듣고 나면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르잖아요.”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을 알아주려 해봤자 소용없어요. 어차피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까.”
반키라스의 눈에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의 손이 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후회하고 있는 거예요?”
“후회? 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나는 엄마가 내 앞에서 숨을 거두던 날. 저기 있는 와트만에게 제가 느낀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해주겠다 결심했어요.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 딸의 죽음으로.”
반키라스가 레니엘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놀란 와트만이 반키라스를 향해 절규했다.
“안 돼!! 안 된다!!! 제발… 제발 내 딸아이만은 살려줘……!”
“아니요. 당신도 똑같이 느껴봐야 해요. 소중한 사람을 눈앞에서 잃는 슬픔을…….”
“아니야!! 제발 이렇게 빌겠다!! 내 재산을 원한다면 다 주도록 하마!! 그러니 내 딸아이의 목숨만은…….”
“이미 늦었어요.”
반키라스가 만들어낸 붉은 송곳니가 레니엘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커다란 강철 방패가 반키라스의 송곳니를 막아냈다.
붉은 송곳니가 마법에 막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방패에 반키라스는 물론 노인도 놀란 표정을 보였다.
그때 노인의 뒤로 누군가 뛰어내렸다.
화릉!
파바박!!
사내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아시테르를 붙잡고 있던 해골손들을 부숴버렸다.
이어 작열하는 화염이 한순간에 해골들을 녹여버렸다.
인질을 풀어준 사내가 아시테르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시테르?”
“형……?”
익숙한 목소리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양손으로 그를 부축해준 것은 다름 아닌 테오도라였다.
“어이 동생.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테오도라 형… 형이 왜 이곳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반면 아시테르의 몸 상태를 확인한 테오도라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갔다.
따로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아시테르의 온몸에 난 상처들과 여기저기 말라버린 피딱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누가 감히 내 동생을……!”
테오도라의 전신에서 순간 이글거리는 화염이 타올랐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아시테르의 옷에 묻은 먼지들을 말없이 털어주었다.
뒤에서 얼굴을 빼꼼 내민 자토가 아시테르를 보며 웃었다.
사방으로 쭈뼛쭈뼛 뻗어 있는 머리칼이 꽤나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테오도라 형한테 동생이 있었어요?”
“그러게.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나도 처음 듣는 얘기다.”
비취색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세밀리아가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강철 방패를 회수한 마르쿠드가 거대한 몸집을 이끌고 걸어왔다.
그들을 보며 라빈과 에스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그러게… 마법기사단인가?”
눈만 깜빡이고 있는 두 사람과 달리 데미리우스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몰라도 데미리우스는 저 네 명을 잘 알고 있었다.
“1등급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게 저기 네 사람을 말하는 거였구나… 그나저나 놀랍네요. 아시테르가 테오도라 씨의 동생이었다니…….”
“데미리우스 오빠. 저 사람들이 오빠가 그렇게나 놀랄 만큼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물론이죠. 저기 네 명은 아카데미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빠른 속도를 보이며 1등급까지 올라선 사람들이에요. 실력은 물론 인품까지 뛰어나구요. 아마 지금도 각 마법기사단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난리일걸요?”
“헤에… 그렇구나.”
라빈이 아시테르와 테오도라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다른 느낌이었지만 둘 다 훈훈하고 멋있어서 함께 있으니 절로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테오도라의 화염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화염으로 된 작은 원반들이 인질들을 묶고 있던 밧줄을 단번에 잘라버렸다.
이어 세밀리아가 마법을 펼쳤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여기저기 커다란 물방울들이 형성되었다.
물방울은 떨어지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받아주었다.
테오도라의 시선이 노인과 반키라스에게로 향했다.
“반키라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테오도라 형… 형이 어째서 이곳에…….”
“그것보다 너.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미안해 형…….”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왜…….”
테오도라와 반키라스는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는지 자연스레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테오도라와 다르게 반키라스는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반키라스의 반응을 파악한 노인이 슬쩍 앞을 가로막았다.
“이거 이거… 보아하니 자네들도 아카데미 학생들인가?”
“그렇다면요?”
“이것 참… 이런 귀찮은 일들이 연속해서 벌어질까 봐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 했던 것인데…….”
“당신이겠군요.”
“뭐가?”
“귀한 내 동생을 저렇게 만든 사람이.”
“아아…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것 같길래 조금 훈육을 해주었지.”
노인을 살펴보던 테오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반응을 살핀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지?”
“그냥… 이해가 되질 않는 부분이 있어서요.”
노인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척.
테오도라가 손으로 아시테르를 막았다.
“여기서부터는 내게 맡겨 아시테르.”
“하지만 형…….”
“이럴 때 형 노릇 좀 하게 해주렴.”
테오도라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시테르가 무어라 말을 답하기도 전에 테오도라가 노인과 마주섰다.
어느새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온 세밀리아가 슬쩍 그의 팔을 붙잡았다.
“여기는 테오도라에게 맡겨요.”
자토가 스르륵 다가와 말했다.
“세밀리아 누나. 나 테오도라 형이 저렇게 화가 나 있는 것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나도 저 사람이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 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낯선 모습이네.”
“저 녀석도 결국 사람이라는 거지.”
마르쿠드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테오도라의 양손에서 화염이 치솟기 시작했다.
선수를 먼저 노린 것은 노인이었다.
해골 병사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테오도라의 팔에서 떠나간 화염 원반들이 단숨에 해골병사들을 부숴버렸다.
“화염 계열의 마도사라…….”
노인이 손짓하자 쓰러져 있던 시체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에스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게 뭐야…!? 어째서 시체가 움직이는 거지……?”
“저들을 바로 네크로맨서라고 불러요. 마력으로 망자의 영혼을 불러오는 마도사들이죠…….”
“으… 세상에 저런 마법을 사용하는 마도사가 있다니…….”
“그런데 이상하네요… 우리 왕국은 네크로맨서들의 마법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어째서요 형?”
“저들은 고인의 안식을 방해하니까요… 과거 한 네크로맨서는 우리 왕국에서 영웅이라 칭송받았던 인물의 영혼까지 마력으로 끌어와 쓴 적이 있어요.”
“세상에…….”
“그게 가능한 거예요?”
에스파와 라빈이 동시에 데미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데미리우스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래서 네크로맨서들의 마법이 정말 무서운 거예요.”
하지만 데미리우스의 경고와 다르게 눈앞의 광경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테오도라의 불꽃이 노인이 불러낸 시체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실력이 엄청나군… 근래 본 화염 마도사 중에서 가장 뛰어나.”
“당연하죠. 테오도라 형은 각 마법기사단이 서로 데려가려 할 만큼 이미 검증된 실력을 갖고 있다구요.”
자토가 테오도라의 곁에 서며 말했다.
그가 손으로 삼각형을 만들었다.
“팡!”
뻗어나간 소리가 진동을 일으켰다.
삼각형 안에 들어 있던 시체들이 강한 진동에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소리 마법이로군…….”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반키라스가 나섰다.
붉은 송곳니가 빠른 속도로 쇄도해 자토를 노렸다.
하지만 마르쿠드의 반응이 한발 더 빨랐다.
그는 단단한 강철을 형성해 송곳니를 막아냈다.
“호오… 공격이 제법 묵직한데.”
강철에 흠집이 난 것을 확인한 마르쿠드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가 이어 굵직한 팔뚝을 들어 올리자 손에 기다란 강철창이 형성되었다.
“꼬마야. 너는 나랑 놀도록 하자.”
마르쿠드가 힘을 주자 그의 팔뚝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크게 한 발을 내딛은 마르쿠드가 있는 힘껏 창을 던졌다.
파앙!!
슈와아―!!
대기를 가르며 날아간 창이 단숨에 반키라스의 앞에 다다랐다.
반키라스가 손으로 원을 그렸다.
그러자 붉은 마력이 움직여 강철 창을 막아내었다.
이를 본 마르쿠드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