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화 작은 이해와 위로
죽이 척척 맞는 형제의 대화에 라빈과 에스파는 물론 테오도라의 친구들까지 그저 입을 떡 벌리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테오도라 형은 동생에게 아주 자상하구나.”
“그 형에 그 동생인 것 같기도 하네…….”
라빈이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웃었다.
“늘 천진난만해도 어딘가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는데… 테오도라 오빠 앞에서는 아시테르 오빠도 저처럼 마냥 어린애 같네요.”
“그러게. 아시테르가 저렇게 의지하는 사람은 처음 봐. 조금 질투난다.”
“에에? 에스파 오빠. 갑자기 그렇게 장르 바꾸지 말아요.”
“아니 그런 질투 말고! 나도 아시테르에게 인정받고 아시테르가 좀 더 마음 놓고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다는 얘기야. 너는 저 무시무시한 친구랑 싸우느라 몰랐겠지만… 아시테르 녀석 엄청 무리해서 자기가 맡은 적들을 쓰러트리고 내게 달려왔단 말이야. 아마 내가 걱정되었던 거겠지. 쳇… 그게 미안해서 그래.”
에스파가 혀를 차며 말하자 라빈이 그를 다독여주었다.
그녀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웃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요. 자기 몸보다는 동료를 더 생각하는.”
“그래 그게 난 미안하다는 거야. 난 저 녀석이 본인 싸움에 좀 더 집중하고 자기 몸을 먼저 살폈으면 좋겠어. 그러다 저 녀석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내가 저 녀석을 도와줄 수 있는 수준이었으면 좋겠다고.”
“좋은 마음이네요. 힘내요 에스파.”
데미리우스가 에스파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위로해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에스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나만 그래?”
“우리도 그런 마음이에요.”
“당연하죠. 저는 아시테르가 꼭 마법기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쭉 지켜봤는데 아시테르만큼 마법기사에 어울리는 사람이 없어요.”
데미리우스의 말에 에스파와 라빈이 단번에 동의했다.
그동안 미션을 하면서 지켜본 아시테르의 모습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어떤 미션을 부여 받아도 불평불만 하나 없이 그 순간들을 즐겼다.
미션의 난이도가 높든 낮든, 작은 것이라도 타인을 도울 수 있다면 아시테르는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다 아시테르는 사람을 대하는데 그 어떠한 편견도 없었다.
신분이 어떻든, 지위가 어떻든, 실력이 어떻든 아시테르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데미리우스가 곁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하긴 그랬으니까 나에게도 선뜻 다가와주었겠지.”
“하여간 매력적인 오빠라니까요.”
라빈이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아시테르에게 빠져드는 눈빛을 보였다.
그러자 에스파가 그녀의 눈동자를 가려버렸다.
“그런 멜로 눈깔 금지. 아시테르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잖아.”
“누가 뭐래요? 나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다구요.”
“호오… 미리 말하지만 나는 안 된다. 나는… 으앗!”
뼈에 찔린 에스파가 옆구리를 움켜쥐며 뒹굴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자토와 세밀리아, 마르쿠드가 절로 미소를 지었다.
“저 친구들 정말 서로 친해 보이네.”
“그러게 말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기에도 우리가 그래 보였을까요 누나?”
“아마 그렇지 않을까?”
“흥. 무슨 소리. 우리는 결국 경쟁자다.”
“매번 그렇게 딱딱한 소리 좀 하지 마 마르쿠드.”
“그중에서도 제일 신경 쓰이고 넘어야 할 산은 바로 저놈이고.”
마르쿠드가 테오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테오도라와 아시테르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와트만이 반키라스의 앞에 섰다.
찰싹!
그는 다짜고짜 반키라스의 뺨을 날렸다.
와트만에게 맞고도 반키라스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가 가만히 있는 것을 확인한 와트만이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짝! 찰싹!
와트만이 몇 번 더 손바닥으로 반키라스의 뺨을 갈겼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그가 씩씩대기 시작했다.
“내가 너 따위 것 때문에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어쨌든 나는 너를 결코 가만두지 않을 거다. 이제부터 각오하는 게 좋아.”
“마음대로 하세요.”
“호오… 그래. 나중에도 그 따위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두고보자꾸나.”
와트만이 다시 손바닥을 들어 올리려 하자 레니엘이 그를 말렸다.
손을 멈춘 와트만이 레니엘을 돌아보았다.
“오오, 레니엘… 괜찮은 거냐?”
“이제 그만해요 아빠. 우리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잖아요.”
“뭐……?”
“저 사람이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 분명 집에는 약재도 넘쳐났고 쉬고 있는 치유 마법사도 있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저 사람의 도움을 무시한 채 도로 돌려보내셨잖아요. 저 사람뿐만이 아니었죠… 다른 사람들의 도움 요청까지도 매정하게…….”
“그게 뭐!?”
“그러면 안 됐어요 아빠. 귀족이라면서요… 우리가 저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사는 것은 약자들을,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돕기 위함이예요… 그러니 저들의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한 것은 결국 우리들의 잘못이예요.”
“나 참. 너까지 왜 그러는 거니 레니엘… 그건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야.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바로 저놈들이 문제가 있는 거지.”
와트만의 불같은 시선이 반키라스에게로 향했다.
딸인 레니엘을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그가 가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놈을 묶어서 끌고가라!”
와트만이 다시 한 번 반키라스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하지만 그런 와트만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의 테오도라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와트만님.”
“상관할 생각 마라! 이건 우리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야.”
“이 친구를 저희들에게 넘겨주실 수 없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릴!!”
와트만의 외침에 테오도라가 품속에서 명령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명령서를 찬찬히 훑어보던 와트만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명령서 어디에도 저놈을 살려서 데려오라는 말은 없군.”
“조금 전 반키라스와 함께 있던 노인은 왕국에서 쫓고 있는 위험조직의 일원입니다. 반키라스가 그들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니 저희들이 데려가 심문해봐야 합니다.”
테오도라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와트만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알바가 아니야.”
“하지만 와트만님…….”
“시끄럽다! 네가 마법기사라도 되나? 고작 학생 신분인 주제에 적당히 나대라.”
“우리 왕국에 있어 중요한 일입니다.”
“하여간 마법기사놈들… 틈만 나면 왕국을 걸고넘어지지. 아무튼 안 돼!”
와트만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뒤에서 반키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저는 할 말 없어요. 그 사람들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니까요.”
“그래?”
“네. 저는 단지 이 세상이 싫었을 뿐이에요. 당신들은 몰라요. 천민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범죄자라는 이유로 제가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
“다 양보해서 그런 것까진 괜찮았어요.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억울하게 돌아가신 우리 엄마는… 조금이라도 치료 받을 수 있었더라면…! 다른 누군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셨더라면… 그렇게 고통스럽게 숨을 거두시진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이런 짓을 벌인 거였군요.”
아시테르를 한번 바라본 반키라스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자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사실 그것조차도 제게는 좋은 핑계였을지 모르죠. 어차피 알고 있었어요. 이 빌어먹을 세상이 바뀔 리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딴 세상에 어떻게든 분노를 토해내고 싶었어요… 가만히 있기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때 따뜻한 손길이 반키라스의 손을 잡았다.
아시테르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키라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당신은 제가 싫지도 않아요? 저는 범죄자의 자식인데다…….”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해요?”
“네……?”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범죄자의 자식이면 어떻고 천민이면 어때요. 그런 것들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타낼 수 없어요. 그러니 누구의 자식이다, 신분이 어떻다 하는 이유로 세상을 바꾸길 포기하지 말아요. 당신의 힘으로도 충분히 바꿀 수 있어요. 우리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거든요. 나부터 시작하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작은 돌멩이가 잔잔한 호수 전체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면 세상은 얼마든지 조금씩 바뀔 수 있다고.”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는 못 하겠지만… 어렴풋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요. 그래도 아직 제겐 허울 좋은 말일뿐이에요. 어차피 제 얘기를 들어줄 사람 따윈…….”
“지금 우리가 들어주고 있잖아요.”
“아…….”
“대신에 지금과 같은 방법은 안돼요. 이런 방식은 잘못됐어요. 알겠어요?”
아시테르의 말에 반키라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웃던 아시테르가 돌연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근데 정말로 궁금한 점이 있어요.”
“뭐… 뭔데요?”
“당신의 마법! 대제 그건 무슨 마법이에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방식의 마법이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마력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죠?”
반키라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심각한 얘기들을 이어갈 줄 알았는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놀랍게도 예상을 벗어난 얘기였다.
아시테르가 뜬금없는 말을 꺼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고보니 과거에도 비슷한 장면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반키라스의 시선이 테오도라에게로 향했다.
과거 테오도라가 처음 이 마을에 찾아왔을 때도 그랬다.
반키라스가 홀로 외톨이로 지내는 동안 먼저 다가와 준 사람이 바로 테오도라였다.
“마법기사 아카데미의 학생이라고 하셨죠?”
“맞아요.”
“그러면 마법기사가 꿈인 건가요?”
“네. 우린 마법기사가 될 거예요.”
“부럽네요. 저도 마법기사가 될 수 있다면…….”
“뭐가 문제예요. 마법기사가 되면 되잖아요.”
“말씀만이라도 고맙네요.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잠시 아시테르를 빤히 바라보던 반키라스가 곧 슬프게 웃었다.
“하다못해 당신을 좀 더 빨리 만났더라면 제 선택은 달라졌을까요…….”
반키라스가 품에 있던 단도를 집었다.
그는 곧바로 단도를 휘둘러 자신의 목을 베려 했다.
턱.
하지만 그의 손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반키라스의 팔을 막은 것은 다름 아닌 아시테르였다.
검날을 잡은 아시테르의 손에서 핏방울이 뚝뚝 흘렀다.
“비겁하게 도망치지 말아요.”
“아… 당신 이게 무슨…….”
놀란 반키라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시테르가 반키라스의 검을 빼앗아 던져버렸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면서 왜 정작 당신 목숨은 그렇게 가볍게 여기는 거예요?”
“하지만… 제가 한 짓을 책임지려면 목숨 정도는 내놓아야…….”
딱.
아시테르가 상처난 손으로 반키라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찌나 쎄게 쥐어박았는지 반키라스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멋대로 판단하지 마요. 이곳의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없잖아요. 이 마을에 역병이 돌았었죠? 당신의 어머니도 그 병에 걸려서 돌아가신 거구요. 다른 마을 사람들도.”
“그걸 어떻게…….”
“고맙게도 제 동료가 돌아다니며 살펴주었어요. 죽은 마을 사람들의 몸 어느 곳에도 상처가 없었대요. 당신의 마법으로 죽은 거라면 커다란 상처들이 남아 있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이었다는군요. 그러니까 돌이킬 수 없다는 당신의 말은 틀렸어요. 적어도 당신 손에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반키라스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순식간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아시테르가 흐느끼는 반키라스의 어깨를 말없이 다독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