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아시테르의 형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아요.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해서 반키라스, 당신이 잘했다는 말은 아니니까. 펜레레 가문 사람들을 위협하고 나무에 묶어둔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니 그 죗값은 치러야 해요.”
아시테르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테오도라가 자신의 옷을 찢어 상처 난 아시테르의 손을 감싸주었다.
그가 조금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시테르. 안타깝지만 천민의 신분인 반키라스가 귀족을 건드린 것은 상당히 무거운 중죄야.”
“에? 하지만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또…….”
“너는 잘 모르겠지만, 왕국의 법이 그래. 반키라스의 사정도 딱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 저지른 녀석의 행동이 쉽게 용서될 순 없을 거야.”
테오도라가 단호하게 딱 잘라서 말했다.
그 정도는 각오한 듯 반키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제가 얼마나 무거운 죄를 저질렀는지… 그런데 왜 일까요… 갑자기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어요.”
반키라스가 처음으로 해맑게 웃었다.
그가 원한 것은 어쩌면 작은 위로였을지도 몰랐고, 작은 이해였을지도 몰랐다.
반키라스는 그 작은 것들을 우습게도 아시테르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환한 미소를 보이자 아시테르도 마주 웃어주었다.
그때 와트만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놈이 얼마나 무거운 죄를 저질렀는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안타깝지만 네놈이 마법기사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려라. 평생 우리 가문의 노예로 써먹어 줄 테니까.”
그가 발끈한 얼굴로 말했다.
테오도라가 와트만의 앞에 섰다.
사실 가장 먼저 넘어야 되는 산이 바로 와트만이었다.
이곳의 일에 가장 우선권을 갖는 것은 와트만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와트만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저놈을 넘겨달라는 말을 하려거든 집어치워라. 나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그럼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떨까요? 따님의 치료를 저희가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저 친구의 처분을 저희들에게로 넘겨주십시오.”
“싫다면?”
와트만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러자 테오도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따님의 치료가 더 우선이 아닙니까?”
“내 딸은 내가 알아서 치료한다. 네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래도…….”
“크흐흐. 아! 그래. 네놈이 내게 무릎이라도 꿇으면 생각해보마.”
와트만의 태도에 라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기껏 구해놨더니 저런 태도네… 왜 마을 사람들이 저 인간을 싫어했는지 알겠다.”
“조용히 해 라빈. 다 들려.”
“들으라고 해. 하나도 겁 안 난다 뭐.”
“야아…….”
와트만의 시선이 라빈에게로 향했다.
그가 라빈에게 한 마디 하려는 때 세밀리아가 슬쩍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를 본 와트만이 멈칫했다.
“뭐야……?”
“와트만님 잠시만…….”
세밀리아가 와트만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그녀가 와트만에게 무어라 말하자 와트만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변한 와트만이 헛기침을 해댔다.
손을 파르르 떠는 그를 보며 다른 일행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 크흠… 그러면 내가 특별히 양보해서 저 녀석을 포기하도록 하지…….”
어째서인지 와트만이 슬쩍 테오도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곤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가문의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서버렸다.
펜레레 가문 사람들이 모두 돌아서는 때 레니엘만 뒤를 돌아 반키라스 쪽으로 다가왔다.
“레니엘!?”
“잠시만요 아빠.”
레니엘이 앙상한 손으로 반키라스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곤 반키라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우리 모두를 살려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
레니엘의 인사에도 반키라스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반키라스가 레니엘의 시선을 회피했다.
레니엘도 더는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상황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마법기사단원들이 반키라스를 포박해 데려갔다.
반키라스는 그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마법기사들의 말을 따랐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테오도라가 슬쩍 세밀리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는 어떻게 한 거야? 와트만님이 갑자기 고집을 꺾으시다니.”
“그냥… 가볍게 말을 전했을 뿐이야.”
“어떤 말을?”
“당신이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 정도?”
세밀리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테오도라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우리들은 모두가 학생이라는 똑같은 신분이라 가문을 밝히면 안 되는데…….”
“뭐 어때요? 이럴 때 한번 삐딱선 타보는 거지.”
“세밀리아. 나는…….”
“네네 알아요 알아요. 어떤 일이든 가문의 힘을 빌리기 싫다구.”
세밀리아가 고운 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막으며 말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자토가 씨익 웃었다.
“또 사랑싸움 시작이에요?”
“사랑싸움은 무슨…….”
“맞잖아요? 근데 세밀리아 누나 대체 뭘 망설이는 거예요? 테오도라 형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그렇게 자꾸 각만 잡고 있다간 뺏겨요 진짜. 안심하지 말라구요.”
“별 소릴 다한다 자토.”
세밀리아가 자토를 금방이라도 쥐어박을 것처럼 굴었다.
그러자 자토가 혀를 빼꼼 내밀며 도망갔다.
그동안 테오도라는 아시테르에게 다가갔다.
“몸은 괜찮은 거야?”
“물론! 내 몸 튼튼한 건 형도 잘 알잖아.”
“그래도 조심 좀 해.”
테오도라가 아시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베시시 웃던 아시테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반키라스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정이 딱한 사람이었어.”
“그러게. 전에 한 번 봤었는데 정말 좋은 아이였어. 아픈 어머니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고. 마법 실력도 뛰어나고.”
“저 사람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집행부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겠지.”
“괜찮을까?”
아시테르의 물음에 마르쿠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 무거운 처벌을 받을 거다. 어쩌면 평생 감옥에서 썩거나 노역에 끌려갈지도 모르지. 마법기사 아카데미 때문에 평민과 천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좋아졌다고 해도, 결국 집행부의 수뇌부는 아직까지 모두 귀족들이다. 그들에게 저 녀석은…….”
테오도라가 손을 들어 마르쿠드의 말을 막았다.
그가 웃으며 아시테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반키라스가 신경쓰이니?”
“응. 엄청 신기한 마법을 사용하는 데다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다면 나라도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까?”
“그렇지. 아마 나라도 그랬을 거야.”
“형. 나 마법기사단장이 되려고.”
“호오… 갑자기?”
테오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시테르가 이런 말을 먼저 꺼낸 적은 처음이었다.
“예전에 아버지한테 들은 적이 있어. 마법기사단장이 되면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마법기사단원들을 마음대로 뽑을 수 있다고.”
“너 설마 반키라스를 너의 마법기사단에 데려오고 싶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응. 그렇게 하고 싶어.”
“어째서?”
“저 사람… 마지막 남은 가족이었던 어머니까지 돌아가셨으니 이제 더더욱 발붙일 곳이 없을 거야. 그러니까 혹시나 저 사람 돌아올 곳이 없다면 내가 그 자리가 되어주려고.”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테오도라가 피식 웃으며 아시테르의 목에 팔을 걸었다.
이내 그가 안심하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 좋다! 그럼 더는 걱정하지 마 괜찮을 테니까.”
“갑자기? 왜?”
“반키라스가 무거운 처벌을 받지 않도록 내가 도와줄게.”
테오도라의 말에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마르쿠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무슨 수로?”
“다 방법이 있지.”
테오도라의 자신감에 찬 말에 세밀리아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가문의 힘을 빌리려는 건…? 하지만 아무리 네 가문이라고 해도 집행부의 일에 함부로 관여할 수는…….”
“내가 설마 가문의 힘을 빌리겠어?”
“뭐야? 잠시만… 그럼 너 설마……?”
“쉿.”
“하지만 너 그러면…….”
“괜찮아. 방금 생각해봤는데 그쪽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테오도라가 아시테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세밀리아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 때문이야?”
“뭐 그것도 있지만. 처음부터 아예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어.”
“이건 좀 진짜로 질투가 나네.”
세밀리아가 아시테르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라빈과 에스파, 데미리우스가 아시테르 쪽으로 다가와 그의 몸을 살폈다.
“어휴, 정말. 다음부터 그렇게 붙잡히면 진짜 얄짤없을 줄 알아요.”
“당분간은 무조건 휴식이야. 그나저나 대체 아까는 왜 멈춘 거야?”
“아마 그동안의 데미지가 쌓였기 때문이겠죠. 아시테르의 몸이 강철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니…….”
그들의 핀잔 아닌 핀잔에 아시테르가 머쓱해진 얼굴로 웃었다.
테오도라가 아시테르의 뒤통수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아시테르의 고개를 힘으로 숙여버렸다.
“이럴 땐 동료들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미… 미안합니다.”
“그렇지.”
테오도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도 덩달아 아시테르의 동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 동생과 함께 다니느라 피곤하죠? 그래도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 아뇨 저희는…….”
“오해가 있으시네요. 저희가 오히려 아시테르를 쫓아다니는 겁니다.”
“맞아요. 저희가 좋아서 함께 다니는 거예요.”
조금 전 봤던 테오도라의 마법이 잊혀지질 않아 에스파는 물론 라빈과 데미리우스도 덩달아 경직된 얼굴로 말했다.
이들에게 테오도라의 화염마법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동안 3등급 내에서도 자신들을 상대할만한 학생들은 없다고 은근한 자부심을 가져왔는데, 테오도라가 그들에게 또 다른 하늘을 보여주고만 것이다.
같은 아카데미 학생 중에 이만큼이나 대단한 마법을 구사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이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어지질 않았다.
“테오도라 씨 맞으시죠?”
“네. 당신이 데미리우스 맞죠?”
“제 이름을 어떻게…….”
“3등급에 있을 때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결국 만나뵙진 못했지만… 아시테르에게 당신에 대해 알려준 것도 저예요. 혹시나 이 녀석이 계속 찾아가서 귀찮게 하진 않았나 모르겠네요.”
테오도라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놀랍게도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정확하게 맞추는 테오도라를 보며 데미리우스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그의 반응을 살핀 테오도라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이 녀석이 계속 찾아가서 귀찮게 굴었던 모양이군요.”
“아뇨… 저는 오히려 아시테르에게 감사해요. 제 생명의 은인과도 같거든요. 아시테르가 아니었다면 저는 평생 어둠 속에서 썩어가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요?”
테오도라가 의외라는 표정을 보였다.
그는 곧 기특하다는 얼굴로 아시테르의 양쪽 뺨을 꼬집었다.
“아흐에…….”
볼을 꼬집힌 아시테르가 실없이 웃었다.
오랜만에 테오도라를 만나니 그도 마냥 반갑기만 했다.
“그… 아시테르의 형이시면 저희들에게도 형이나 다름없는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맞아요 테오도라 오빠.”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세 사람의 말에 테오도라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그래도 될까?”
“네!”
“예.”
“물론이죠.”
아시테르의 형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선배이기도 했으니 아무도 불만을 가지는 자가 없었다.
테오도라가 돌연 그들을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사정이 있어서 내 동생이 우리 왕국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지 못해. 그러니 아시테르를 잘 좀 부탁할게.”
“아유, 이러지 마세요. 오히려 저희가 아시테르에게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는 걸요.”
“맞아요. 같이 있으면 정말 신기해요. 연구대상이라니까요.”
라빈과 에스파, 데미리우스가 좋은 동료들인 것 같아 테오도라도 한결 마음을 놓았다.
그때 에스파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올렸다.
“저기 근데 그럼 질문이 하나 있는데… 혹시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아시테르가 형의 동생이라면, 아시테르도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인 건가요?”
에스파의 질문에 라빈과 데미리우스도 집중했다.
그들도 사실 그 점이 궁금했다.
테오도라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아시테르의 몸에 프로메테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은 아니야. 자세한 사정은 가문 내에서도 민감한 부분이라 제대로 답해주지 못할 것 같네.”
그 정도만으로 충분했다.
에스파나 라빈, 데미리우스를 경악하게 만들기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