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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63화 (63/424)

063화 테르세우스의 인정

“하아…….”

모든 것을 마친 아시테르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커다란 바위에 드러누워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후 오늘처럼 이렇게 무기력한 날은 처음이었다.

그 이유는 이랬다.

2등급으로 올라설 수 있는 승급전을 무사히 마치는 것까진 좋았다.

최종으로 선발되는 25팀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아시테르 팀은 무조건 합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승급전이 끝났을 때, 시험관 한 명이 아시테르를 불렀다.

“시험번호 87번 아시테르.”

“네?”

“안타깝지만 너는 합격 보류다.”

“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알고 보니 네 점수는 마이너스 상태더구나.”

“아, 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나도 깜빡 잊고 있었는데, 점수가 마이너스인 학생은 다음 등급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학칙이 있다.”

그 말을 들은 아시테르는 물론 에스파나 라빈, 데미리우스까지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어두워진 얼굴의 에스파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이번 승급전도 무효가 되는 건가요?”

“아니.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야. 팀 전체 점수가 1000점만 넘으면 마이너스 점수의 학생도 얼마든지 승급전을 치를 수 있다. 다만, 합격 시엔 그 합격이 보류가 되는 거지. 점수가 다시 플러스로 바뀔 때까지 말이야.”

불행 중 다행인 건지 어쨌거나 합격 취소는 아니라는 말에 라빈과 데미리우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라빈이 아시테르와 함께 남겠다며 자신도 2등급 합격을 취소해달라는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썼다.

물론 교관들에겐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결국 아시테르를 제외한 모두가 2등급으로 올라가버리고 말았다.

에스파가 또다시 기다리겠다며 울상을 지었지만, 아시테르는 애써 웃으며 그들을 보내주었다.

그렇지만 마음이 착잡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아… 결국 나 혼자 남게 되었구나.”

눈치도 없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다.

이럴 때 우중충하게 비라도 내려주면 이 묘한 감정이 씻겨져 내려가지 않을까 했지만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마른하늘에 갑자기 비가 내릴…….

촤락―!

“앗 차거!”

갑자기 쏟아진 물줄기에 아시테르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아? 이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아시테르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테르세우스였다.

그는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영감님이 여긴 어떻게…….”

“이 녀석이… 아무리 날 편하게 부르라 했다곤 해도 영감님이 무어냐? 영감님이.”

“그치만 영감님을 보고 있으면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난단 말이에요.”

“네가 늘 말했던 비체라는 사람 말이냐?”

“네.”

테르세우스가 어느새 아시테르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옷도 허름하게 입고 온 그를 보고 있으면, 눈앞에 있는 이가 과연 이 나라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범해 보였다.

“궁금하긴 하구나. 어떤 사람일지.”

“으… 말도 마세요. 저랑 아버지 괴롭히는 게 취미인 분이에요.”

“녀석. 말하는 것과 다르게 얼굴은 웃고 있질 않느냐.”

“그랬나요?”

아시테르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저 웃는 모습이 점점 더 유미르를 똑 닮아 가고 있었다.

유미르가 다른 사람들에게 테르세우스에 대해 설명할 때 꼭 저런 표정을 짓곤 했었다.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하는 말투나 행동들이 참으로 닮았다.

그를 바라보던 테르세우스가 슬슬 이곳에 온 이유를 밝혔다.

“이번에 2등급 승급전에 합격했다면서?”

“흐음… 정확히 말하면 반절은 합격이고 반절은 아니에요.”

“으하하하!!”

“갑자기 왜 그렇게 웃으시는 거예요?”

“결과마저 예상을 깨고 재밌어서 그런다. 너의 그 이상한 기행은 나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같은 등급의 학생들에게 엄청나게 깨졌다면서? 자기 점수가 마이너스로 쌓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아하하… 그건 할 말이 없네요.”

아시테르가 멋쩍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테르세우스가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누가 유미르의 아들이 아니랄까 봐. 하는 짓도 특이하구나.”

“아버지도요?”

“그래. 네 아버지도 하여간 특이한 짓들은 많이 했었다. 그래서인지 유독 녀석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지만 말이야. 아무튼 어떻더냐. 마력의 속성 변환도 못 하고 마력량까지 제한하니까 아주 죽을 맛이었지?”

테르세우스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시테르에겐 뭔가 약 올리는 듯한 말투로 들렸다.

비체가 아시테르를 고생시킬 때 저런 표정을 짓곤 했었다.

“매일 써오던 마법을 쓰지 못하니까 처음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하루에 몇 번이나 고민했는지 몰라요. 이 반지를 빼버리면 금방이라도 편해질 테니까. 거기다 다른 학생들이 절 완전…….”

“다른 학생들에게 무시 받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겠고?”

“조금은요. 여기저기 가서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내가 원래 이렇게 약하진 않은데 지금은 테르세우스 영감님과의 약속 때문에 이렇게 된 것뿐이라구요.”

아시테르의 말에 테르세우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조금은 간접적인 경험이 되었겠구나. 네 아버지인 유미르도 그런 어린 시절을 겪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했지. 온갖 차별과 무시, 멸시 등을 다 겪었으니까.”

“아버지께서요?”

“유미르의 재능은 평범했지만, 녀석의 노력만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노력이 재능이라면 유미르는 그 분야에서 천재나 다름없었어. 그만큼 녀석은 밤낮 가릴 것 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녀석이었지. 그럼에도 사람들은 단지 유미르의 출신이 천민이라는 것 때문에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지 않았다. 대부분이 색안경을 쓰고 녀석을 바라봤지.”

“아아… 아버지에게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그럼 이제 궁금하지 않으냐?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네 아버지는 왜 그렇게 죽도록 노력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유미르에게서 언젠가 직접 들은 적 있었다.

아시테르가 길게 생각 않고 답했다.

“마법기사단장이 되기 위해서요.”

“그럼 그 마법기사단장은 왜 되려고 한 걸까?”

“왕국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요……?”

그러고보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유미르는 왜 강해지려 했을까.

그래서 왜 마법기사단장이 되려고 했을까.

갑자기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나왔다.

“그 부분들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 보거라. 그러면 앞으로 네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들을 가져 볼 수 있을 거다.”

“네.”

미처 몰랐던 것들을 깨달았다는 것처럼 아시테르의 표정이 오묘해지고 있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테르세우스도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와의 약속을 어째서 말하고 다니지 않은 거냐? 딱히 비밀로 하자는 약속도 없었는데 말이야.”

“말해봤자 의미가 없으니까요. 달라지는 것도 없고.”

“호오… 그래서 얘기를 안 했다는 거냐?”

“네. 그리고 그것에 계속 매달려 있다가는 전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할 것 같았어요. 그러니 차라리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죠. 저한테 이런 미션을 주신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거다. 그러니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그렇게 하다 보니 점점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어요.”

아시테르의 말에 테르세우스가 두 눈을 번뜩였다.

그가 원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간혹 무언가를 제한하거나 잃어버리면 곧바로 주저앉아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과거의 자유와 영광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다.

불평불만만 늘어트리며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

반면 무언가를 제한해도 그 속에서 돌파구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돌파구를 찾을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이 바로 현재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테르세우스는 그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잘했구나.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허영(虛榮)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어떠한 상황이 닥치든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이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갈린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영감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저 자신과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을 거예요.”

“갑옷은 인간의 몸을 보호해 주지만 종국에 강해져야 하는 것은 인간이다. 갑옷은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아. 내 말뜻이 무엇인지 알겠나?”

“네. 이번에 영감님이 제 갑옷을 벗겨 주신 거나 다름없잖아요.”

“후후, 녀석. 보기보다 똘똘하구나.”

테르세우스가 아시테르의 손을 붙잡았다.

이어 그의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반지가 몇 차례 진동을 일으키더니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갔다.

“이제 이 은반지는 필요 없겠구나.”

“네? 하지만 아직 전…….”

“2등급 승급전에 합격은 했다며? 그럼 이미 2등급이나 다름없는 셈이지.”

테르세우스가 천천히 아시테르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빼냈다.

슈와아―!

마력을 제한하고 있던 반지가 사라지자 아시테르의 전신에서 엄청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확인한 테르세우스가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놈 참. 그 사이에 마력이 충실하게 늘었나 보구나.”

“와아… 제 마력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 반지는 말이다. 평소에는 마력을 제한하며 마력의 흐름을 방해하지만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이 더 있단다.”

“그게 뭔가요?”

“지금 느끼고 있질 않느냐?”

테르세우스의 말에 아시테르가 자신의 몸을 한차례 더듬어 보았다.

그러자 인상을 찌푸린 테르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몸은 더듬어?”

“달라진 게 있나 한 번 보려고요. 키라도 큰 건가?”

“아니 요놈 갑자기 맹해진 것 좀 보게나. 마력량이 대폭 늘었을 것 아니냐!”

“아하!! 마력량을 말씀하시는 거였군요.”

아시테르가 슬쩍 마력을 운용해보았다.

몸 안을 가득 채우는 이 느낌.

얇은 물줄기가 아닌 흘러넘치는 폭포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과거에 비해 이토록 많은 마력이 움직이는데도 불구하고 마력의 미세한 부분들까지 전부 세세하게 피부로 와닿는 것을 느낀다.

아시테르는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허투루 흘러나가는 것은 없도록 정제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아귀에 커다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기초적인 마력을 다룰 때와는 또 다른 느낌.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이 느낌에 절로 눈동자가 커졌다.

그 순간.

휘릭―!

아시테르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호오… 확실히 반응속도가 빨라졌구나.”

잠깐 사이에 공격마법을 펼친 테르세우스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아시테르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나무에 선명한 구멍이 남아 있었다.

“저런 것에 맞으면 아무리 저라도 무사하진 못하지 않을까요?”

“안 맞았으니 되었질 않냐?”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에요!!”

“흐흐, 어디 한 번 들어와 봐라. 그동안 네가 얼마나 강해졌을지 궁금하진 않은 거냐?”

테르세우스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두 손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체가 엄청난 마력을 머금고 모여 있었다.

“그건 뭐예요?”

“그렇게 있지 말고 빨리 막을 준비나 해봐라.”

테르세우스는 주저 없이 들고 있던 구체를 아시테르에게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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