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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66화 (66/424)

066화 루기아 가문의 젊은 선생 (2)

아시테르가 루기아 가문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넘게 흘렀다.

그동안 아시테르는 크로마제의 방에 매일같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크로마제는 보란 듯이 함정들을 준비해두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모래가 쏟아지게 만들 때도 있었고, 냄새 고약한 것들을 가져가 아시테르의 방에 숨겨두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모래가 쏟아지든 물세례를 맞든 아시테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크로마제의 앞에 찾아가 책을 건넸다.

“또야?”

“그래. 이 책을 읽어라.”

“아니 이건 그냥 기본 마법서잖아. 대체 이걸 왜 읽으라는 거야? 나를 가르칠만한 재주가 없으면 그냥 이쯤에서 그만두고 떠나라니까?”

“그건 싫어. 이런 꿀 같은 곳을 어떻게 벗어나?”

아시테르가 오히려 웃으며 답하자 크로마제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크로마제는 그 기분이 얼굴에 곧바로 드러나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시테르로서도 그를 다루기 한결 편했다.

늘 같은 표정을 지으며 생각을 알 수 없는 사람보다 이렇게 표정에 감정이 곧이곧대로 드러나는 사람들이 오히려 대하기 편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책만 건네줘도 주급은 꼬박꼬박 들어오고, 식사도 한 번도 거르는 적 없이 제공되니 아시테르에게 이보다 천국인 곳은 없었다.

크로마제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진짜 내가 언젠가는 당신을 이곳에서 쫓아내고 말겠어. 이 식충이 같은 인간!!”

“틀렸어. 나를 식충이 같은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너야.”

“내 탓하지 마! 애초에 이러려고 이곳에 들어온 거잖아? 이래서 천민 따위하곤……!”

“후후,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하나는 명심해 둬. 네가 변하지 않는 한 나 또한 변할 생각 없다는 걸.”

아시테르는 제 할 일을 끝냈다는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로포가 아시테르에게 수건을 건넸다.

“오늘도 이쯤에서 그만하시는 겁니까?”

“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아시테르가 훌쩍 떠나버리자 로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프라울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시테르의 소식을 들은 프라울리가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오늘도 책만 주고 갔다고?”

“네. 그렇습니다.”

“애를 가르치라고 들여놨더니 왜 계속 책만 읽으라고 하는 거야!?”

“아시테르 선생님의 말로는 이 책조차 읽어내지 못한다면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하아? 그 친구가 건네는 것은 기초적인 마법서라며? 그 정도는 크로마제도 어렸을 때부터 읽은 책이잖나?”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그걸 대체 왜 읽으라는 거야? 흐음… 아무래도 이거 사기꾼 같은 놈을 데려온 것 아닌가?”

이쯤되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한 달 동안 아시테르가 한 것이라곤 크로마제에게 책을 건네는 것뿐.

다른 것은 일절 시도하지 않았다.

다른 선생들처럼 대화를 시도하지도, 선물을 주며 마음을 돌려보려 하는 행동도, 그 어떤 노력조차 보이질 않았다.

그러니 프라울리가 이토록 짜증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한 가지 대단한 점은 있습니다.”

“그게 뭔데!?”

“아시테르 선생님은 다른 선생분들과 다르게 크로마제님의 장난을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기고 있습니다.”

“그래?”

“예. 사실 이것도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래를 뒤집어써도, 몸에 벌레가 들어가더라도 아시테르 선생님은 늘 평소와 똑같으십니다.”

“그저 음식에만 눈이 돌아가 있겠지.”

로포는 프라울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시테르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며 생기가 돌 때는 음식과 마주했을 때뿐이었다.

그는 그동안 굶고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늘 음식을 걸신들린 듯 먹어 치웠다.

그래도 그 모습이 얄밉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잘 먹고 크로마제의 괴롭힘에도 잘만 지내는 그의 모습에 로포도 은근하게 눈길이 가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표정을 상상하자 로포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보였다.

“자네는 그 선생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로군.”

“예. 저는 솔직히 아시테르 선생님이 마음에 듭니다.”

“어째서?”

“후후, 글쎄요. 크로마제님이 저렇게 조바심을 내는 것도 처음 보는 일이라서 그럴까요?”

“크로마제가?”

“예. 무슨 방법을 쓰던 먹히질 않으니 서서히 마음이 조급해지는 모양입니다.”

“후우… 몹쓸 녀석. 마법을 배우라고 했더니 어떻게 해서든지 선생들 괴롭힐 생각만 하다니.”

프라울리의 말에 로포가 이제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동안 아시테르가 왜 그런 행동들을 해왔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아시테르 선생님이 잘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이봐 로포.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예. 오히려 제가 가주님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조금만 더 아시테르 선생님이 하는 걸 지켜봐 주시겠습니까?”

“후우… 어차피 당장 개인선생을 구할 수도 없다며? 지켜봐야지 뭐 별 수 있겠나.”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로포가 이만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그를 향해 프라울리가 입을 열었다.

“어디 가는 거지?”

“후후, 이번에는 생선 요리를 먹고 싶다고 하더군요.”

“누가? 아시테르 선생이?”

“예. 본인이 살던 곳에는 생선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생선 맛에 반했다고 하더군요.”

“나 참, 별에 별… 됐고. 가르치는 방식이나 좀 바꿔보라고 해. 영 마음에 차지 않으니까.”

프라울리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로포는 대답 대신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이곤 자리를 벗어났다.

프라울리는 한쪽에 놓아두었던 종이를 잡았다.

혹시 몰라 사람을 시켜 아시테르에 대해 조사해보게 했는데 그에 대해 나오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겉으로 드러나 있는 정보들뿐.

왕국 내에서도 상당한 성세를 자랑하는 루기아 가문에서조차 아시테르의 과거를 캐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는 얘기는 이 녀석의 뒤를 봐주고 있는 곳이 있다는 얘기인데.”

프라울리가 짐작하고 있는 곳은 바로 프로메테 가문이었다.

프로메테 가문이라면 이 정도로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가능했다.

“대체 이런 의문에 쌓인 녀석을 어째서 이쪽으로 보낸 건지…….”

가뜩이나 신경 써야 할 것들도 많은데 개인선생인 아시테르의 일까지 은근하게 프라울리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었다.

* * *

그런 프라울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시테르는 한가로이 침대에 누워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한 달 동안 크로마제가 그를 괴롭히기 위해 온갖 수단들을 동원했지만, 어비스 던전에서 자라온 아시테르에겐 그저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때 아시테르의 방에 누군가 찾아왔다.

“누구세요?”

“저입니다 로포.”

“아아, 로포 집사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그 말과 함께 아시테르가 활짝 웃었다.

이번에는 어떤 맛있는 음식을 가져와 주었을까.

이것만큼 설레는 시간은 없었다.

아시테르가 성큼 다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자마자 향긋한 냄새가 아시테르의 코를 자극한다.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냄새에 아시테르가 절로 음식 가까이로 코를 가져갔다.

“후후, 천천히 드시지요.”

“매번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시테르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로포 집사님.”

“언제까지 크로마제님께 기초마법서만 건네실 생각이십니까?”

“흐음, 글쎄요.”

“아시테르 선생님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이쯤에서 못 이기는 척 져주고 크로마제님께 다른 것들을 가르쳐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가주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많이 안달나셨겠군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음식을 하나둘 움직여주던 로포가 아시테르의 앞에 식기를 놓아주었다.

아시테르는 이미 손으로 음식을 주워 먹고 있었다.

그런 아시테르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테지만 로포는 그러지 않았다.

“천천히 드십시오.”

로포를 빤히 바라보던 아시테르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씹고 있던 음식을 다 삼킨 뒤 아시테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도 크로마제를 가르치고 있어요. 다른 분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요.”

“네.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저만큼은 아시테르 선생님께서 무얼 원하시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가주님께서는 여전히 불만을 표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방식에 변화를 주었으면 하는 겁니다.”

“흐음…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방식을 조금 바꾸도록 할게요. 그런데 계약서상에 명시되었던 것 중 크로마제를 가르치는 동안 그에게 어떠한 체벌도 가할 수 없다. 그런 조항이 있었죠?”

“네.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아시테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개인선생들도 불만을 토로한 조항이 바로 이 조항이었다.

하지만 프라울리는 워낙 크로마제를 귀하게 여기는 탓에 조금의 체벌도 허락하지 않았다.

혼자 무언가를 생각하던 아시테르가 로포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프라울리 가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가주님을요?”

“네. 직접 뵙고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제가 가주님께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로포 집사님.”

아시테르는 한 차례 감사 인사를 전하곤 다시 먹는데 집중했다.

저렇게 많이 먹는데도 저런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정말로 신기할 정도였다.

로포의 신속한 행동력 덕분에 아시테르와 프라울리가 만나는 자리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프라울리는 아시테르를 보자마자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었다.

“자네 정말 내 손자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것 맞나?”

“예.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흐음… 양심에 찔리지도 않는 모양이로군. 그런데 날 보자고 한 이유는 뭔가? 설마 주급을 더 올려달라든지 뭐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닐 테지?”

프라울리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아시테르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주급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 줄이셔도 좋습니다. 저는 지금의 생활에 그다지 불만족스러운 것도 없으니까요. 오히려 아주 만족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다만 이렇게 가주님을 뵙자고 한 이유는 다름 아닌 크로마제 학생에 관해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내 손자에 대해? 말해보게.”

“가주님께서 저의 교육방식을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가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마법만 가르치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호오… 드디어 마음이 바뀐 건가?”

프라울 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저는 루기아 가문에게서 돈을 받고 숙식을 제공받는 입장인데 너무 제 교육방식만을 고집할 순 없는 것 같습니다. 루기아 가문에서 원하는 대로 해드리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뿐입니다.”

아시테르의 말에 프라울리가 마침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래그래. 진즉에 그랬어야지! 자네가 할 일은 크로마제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뿐이야. 다른 것들은 필요 없네. 마법기사 아카데미에 들어가는데 문제가 없도록 잘 가르쳐주게.”

“알겠습니다.”

아시테르는 별다른 말없이 인사를 건네곤 자리를 떠났다.

갑자기 바뀐 그의 태도를 보며 프라울리가 영 찜찜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데 설마 저 녀석이 우리 손자에게 오히려 배워야 할 실력인 것은 아니겠지? 프로메테 가문에서 추천해 준 선생이기 때문에 믿고 테스트를 하진 않았다만,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아시테르 선생님은 아카데미 2등급 가까이에 오른 분이 아닙니까. 다른 건 몰라도 지식적인 측면에서라도 뛰어난 부분들이 있을 겁니다.”

“흐음… 그래. 심지어 어린아이에게서 조차 배울 것들이 있다고 했으니. 저런 자라도 크로마제가 배울 점들이 있겠지. 그래도 자네가 잘 지켜보다가 막상 별 것 없는 것 같거나 더 이상 크로마제가 저 선생한테서 배울 것들이 없어 보이면 과감하게 쳐내주게.”

“알겠습니다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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