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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67화 (67/424)

067화 아시테르와 크로마제의 대결 (1)

프라울리와의 대화를 한 다음 날 아시테르는 크로마제를 가르치기 위해 마법서를 들고 찾아갔다.

아시테르의 손을 확인한 크로마제가 인상부터 찡그렸다.

“설마 또 그 책부터 읽으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어. 이제 안 읽어도 돼.”

“응?”

아시테르가 막상 이렇게 말하자 크로마제가 오히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로마제만큼이나 고집이 쇠심줄인 그가 갑자기 무슨 일로 태도를 바꾸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아시테르가 그 이유를 먼저 얘기해주었다.

“가주님께서 네게 직접 마법들을 가르치라고 해서 말이야.”

“아하. 할아버지를 만났었구나?”

“그래. 직접 만나 뵙고 왔지. 자아, 아무튼 그래도 내가 그동안 받은 돈도 있고 먹은 음식들도 있으니 제값을 하긴 해야겠지.”

아시테르가 마법서를 펼치며 말했다.

막상 아시테르가 태도를 바꾸자 크로마제로서도 통쾌한 마음 중 어딘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마법서의 내용을 확인한 크로마제가 다시 마법서를 덮어버렸다.

“이봐요, 선생님.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야?”

“뭐가 문제야?”

“아니…! 나를 가르치겠다며? 그런데 이런 기초 마법서를 자꾸 가져오는 건 무슨 심보야?”

크로마제의 말에 아시테르가 눈을 깜빡였다.

정말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이런 기초 마법은 어렸을 때 모두 익혔다고. 그런데 왜 자꾸 기초 마법을 가르치려는 거냐 이 말이야!”

“그야 넌 기초가 안 되어 있으니까?”

“뭐!?”

“기초만 안 되어 있는 게 아니지. 기본도 안 돼 있지 넌.”

낮게 한숨을 쉬며 말하는 아시테르를 보며 크로마제가 이를 악물었다.

상당히 자존심을 건드린 말이었는지 그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결국 참아내지 못한 크로마제가 마침내 아시테르의 미끼를 물고 말았다.

“나랑 대결해!”

“대결?”

“그래! 당신이 날 정말 가르칠만한 실력이 되는지 아닌지 내가 직접 판단해야겠어!”

“호오… 그런 말을 하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지 않아?”

“아 몰라!! 어쨌든 나랑 대결해! 내가 이기면 당신은 군말 없이 여기를 떠나. 알겠어?”

“그럼 내가 이기면?”

아시테르의 말에 크로마제가 입가를 실룩거렸다.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걸?”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잖아?”

아시테르가 입가에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의 자신감 있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크로마제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만약에 당신이 이긴다면 나도 군소리 없이 당신에게 마법을 배우겠어.”

“그건 당연한 거 아냐?”

“뭐?”

“무슨 당연한 얘기를 그렇게 선심 쓰듯 말해?”

아시테르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크로마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크로마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뭔데? 급여 인상이라도 해줘?”

“아니, 그런 건 필요 없어. 그보다 우선적으로 말을 높여.”

“하아!?”

“너는 기본부터 안 돼 있다니까. 학생이 말이야 선생님한테 배우려면 존경까진 아니더라도 존중하는 마음 정도는 갖고 있어야지.”

“그래서 말을 높여달라고? 나더러? 당신 같은 천민에게?”

“내가 천민이고 어쩌고가 뭐가 중요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보다 중요한 건 네가 나한테 배우는 학생이라는 사실이고 나는 널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사실인거지.”

아시테르가 단호하게 말하는데도 크로마제는 그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내가 지면 말도 높이면서 깍듯하게 대해주고 매일 아침 맛있는 음식들까지 준비해서 가져다주지.”

“오? 정말? 그렇게까지 하진 않아도 괜찮은데?”

“대신 당신이 지면 아까 얘기했듯이…….”

“그래. 곧바로 떠나줄게.”

아시테르가 먼저 답하자 크로마제가 이제야 만족한다는 얼굴을 보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아시테르를 무릎 꿇릴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아시테르가 마침 곁에 있던 로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로포 집사님. 이번 일에 증인이 되어주실 수 있을까요?”

“저어… 아시테르 선생님. 저의 주제넘은 참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도련님께선 생각보다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갖고 계십니다만…….”

“아저씨 그만. 그렇게 끼어드는 것은 반칙이에요.”

크로마제가 싸늘한 어조로 로포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이에 로포가 입맛을 다셨다.

반면 아시테르는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맞아요 로포 집사님. 이 일은 저와 크로마제 학생 사이의 일이에요. 교육권은 모두 제게 있는 것 아닙니까?”

“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것도 제 교육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보다 로포 집사님께서 이 일의 증인이 되어주시는 건…….”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이렇게 문서로도 남겨드리지요.”

로포가 품 안에 있던 종이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는 곧바로 종이에 아시테르와 크로마제가 한 약속들을 적었다.

그리곤 양측에 서명을 요구했다.

크로마제는 망설임 없이 종이에 서명했다.

펜을 집어든 아시테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크로마제가 기회는 이때다 싶어 비아냥거렸다.

“왜? 이제 와서 자신 없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니고. 흐음… 그보다 대결에서 졌다고 도망치거나 없던 일로 하진 않겠지? 그 정도로 비겁하진 않을 거야 그치?”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크로마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의 답에 아시테르가 마저 서명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서명이 끝나고 나서야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루기아 가문 한 켠에 마련된 연무장에 아시테르와 크로마제가 마주 섰다.

두 사람만의 일이기 때문에 로포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굳이 연무장으로 부르지 않았다.

크로마제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턱을 한껏 치켜 올렸다.

반면 아시테르는 크로마제보다 연무장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연무장 한쪽 구석에 여러 병장기들이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에도 이곳에 머무르면서 언뜻 느꼈던 점인데 루기아 가문엔 유독 병장기들이 눈에 띄었다.

프로메테 가문에서는 검이든 창이든 철제 무기 종류는 쉽게 볼 수 없었다.

그보단 화려한 장식의 마법지팡이나 마법과 관련된 문서들, 마법서가 가득한 책장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루기아 가문은 복도에도 종종 잘 손질된 검들이 장식장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에 호기심을 느낀 아시테르가 로포 집사를 불렀다.

“로포 집사님.”

“네. 말씀하시지요 아시테르 선생님.”

“루기아 가문에는 유독 병장기들이 눈에 띄는군요. 혹시 프라울리 가주님께서 병장기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입니까?”

“호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맞습니다. 저희 루기아 가문은 다른 가문들보다 많은 병장기들을 갖고 있습니다. 보검이라고 불리는 검들도 여럿 갖고 있지요.”

로포 집사가 한쪽에 놓인 병장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다시 말을 이었다.

“본래 루기아 가문은 훌륭한 검사들을 배출하는 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시테르 선생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요즘에는 검사나 창술사처럼 병장기를 다루는 것보다 마력을 다루는 마도사들이 훨씬 더 환영받고 있습니다. 당장 우리 왕국만 해도 검이나 창을 쓰는 이들은 마력을 다루는 마도사들보다 몇 수 아래로 취급하고 있지요.”

“…….”

“그렇기 때문에 루기아 가문의 선대 가주님께서도 빠른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도록 가문의 역사와 함께 해온 검과 창을 버리고 마법을 익히기로요. 물론 선대 가주님의 판단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발 빠르게 가문의 주력된 힘을 바꾼 덕분에 지금까지도 이러한 성세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웃고 있는 로포의 입가엔 잔잔한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아마 세월에 무뎌진 씁쓸함일 터였다.

아시테르의 시선이 병장기들을 살폈다.

“그런 것 치고는 병장기들의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는걸요?”

“아, 그것은 크로마제님의 아버지이신 판데아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판데아님 때문에요?”

“예. 다른 분들과 다르게 판데아님께서는 검술을 좋아하시거든요. 종종 이곳으로 와 검을 휘두르시곤 합니다.”

아시테르가 설명하고 있는 로포 집사의 손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 상대를 로포 집사님께서 해주시는 건가요?”

“오오, 대단하시군요. 그걸 어찌 바로 알아차리신 건지…….”

로포가 놀라 말했다.

아시테르도 그제야 로포의 손이 거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에도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어쩐지 단순 집사의 손이라기엔 너무나도 거친 손이었다.

이곳저곳 상처 난 부분은 아마 연습하면서 검에 베인 상처들일 터였다.

그때 뒤에서 짜증 가득한 크로마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포 아저씨. 아버지 얘기는 그만해요. 어디 가서 얘기하기에 부끄러우니까.”

척.

잘 관리된 검을 만져보던 아시테르의 손이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크로마제에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얘기야?”

“말 그대로야. 하… 부끄러워서 친구들한테도 얘기하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 검과 방패 같은 쓰레기 따위를 휘두르는 게 자랑은 아니잖아?”

“뭐?”

아시테르의 표정에 처음으로 파문이 일었다.

그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온 적은 처음이라 크로마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이 틀렸어? 요즘 같은 시대에 뒤떨어지게 무슨 검을 휘둘러? 검사들 수십 명이 몰려와도 강력한 마도사가 마법 한 번 쓰면 끝나는 걸. 아냐?”

“설사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너의 아버지를 그렇게 말하면 돼?”

“뭐가 문젠데? 우리 할아버지도 아버지의 존재를 부끄러워하시는데. 그러니 아버지는 포기하고 나한테 더욱 큰 기대를 걸고 계시는 거고.”

“하아… 네가 기초나 기본도 안 되어 있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

아시테르의 목소리가 한층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옆에 보이는 검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크로마제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검이라도 쓰게?”

“아니. 너 정도를 상대로 이렇게 좋은 검은 과하지.”

아시테르가 검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날이 상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된 검이었다.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검신은 언제라도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예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분명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 번 힘껏 휘둘러보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는 좋은 검이었다.

이것만 봐도 이곳 검을 관리하는 사람이 얼마나 검에 애정을 쏟는지 알 수 있었다.

‘검의 상태는 곧 검사의 마음이다.’

언젠가 비체 할아버지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었다.

아시테르는 들고 있던 검을 다시 제자리에 두고 옆에 있는 수련용 목검을 들었다.

어비스 던전에서 들었던 목검보다는 훨씬 가볍고 단단하지 못한 재질이었다.

그래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시테르가 목검을 어깨에 걸치며 크로마제쪽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그걸 들고 날 상대하겠다는 말이야? 검술이라도 펼쳐보겠다는 거야 뭐야?”

“그래. 뭐 문제 될 것 있어? 내가 꼭 마법을 사용하라는 말은 없었잖아?”

“날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아시테르가 목검을 든 것이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생각한 크로마제가 잔뜩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이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흥분할 필요가 없었다.

크로마제 입장으로선 아시테르가 순간적인 감정에 못 이겨 자기 무덤을 판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마침내 이런 상황이 오질 않았나.

“이제야 마음 놓고 흠씬 두들겨 팰 수 있겠네.”

크로마제가 손을 풀며 말했다.

아시테르가 자신의 마법에 당해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봐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동안 아시테르가 얼마나 얄미웠는지만 생각하면 오늘만큼은 분이 풀릴 때까지 저 눈앞의 선생 놈을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거기다 뒤탈도 없었다.

이것은 대결인데다 대결이 끝나고 나면 아시테르는 분명 루기아 가문에서 쫓겨날 테니.

턱.

그 순간 크로마제의 어깨에 둔탁한 느낌이 전해졌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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