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아시테르와 크로마제의 대결 (2)
크로마제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곤 하나 아시테르의 움직임을 놓칠 정도까지 정신이 팔려 있진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아시테르는 자신의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목검으로 크로마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가 네게 주는 첫 번째 가르침이다. 상대를 눈앞에 두고 그렇게 멍하니 있다간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어.”
“이게!”
발끈한 크로마제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갈색 빛의 마력이 아시테르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시테르는 상체를 살짝 젖히는 것만으로 크로마제의 마법을 피해냈다.
“자꾸 그렇게 뭐라도 되는 것처럼 폼 잡지 말란 말이야!!”
크로마제가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갈색 빛 마력이 한데 뭉치며 아시테르에게로 날아갔다.
크로마제는 아시테르를 상대하기에 이 정도 위력의 마력탄이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파앙!!
강한 소리와 함께 한 차례 바람이 일었다.
크로마제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게 왜 까불…….”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목검으로 크로마제의 마력탄을 가른 아시테르가 무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그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자신 있어 하더니 겨우 이 정도야?”
아시테르가 목검을 빙그르 돌리며 말한다.
이에 자연스럽게 크로마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 순간 크로마제의 전신에 황혼빛 아지랑이가 물들기 시작했다.
“조심하십시오. 진짜는 이제부터입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로포가 걱정스런 말투로 말했다.
아시테르가 그런 로포를 바라보며 웃었다.
“걱정마세요. 이참에 따끔하게 혼 좀 내야겠어요.”
여유 있는 아시테르의 태도에 크로마제가 이를 빠득 깨물었다.
이곳에 왔을 때부터 보인 저 여유 있는 태도가 줄곧 거슬렸다.
흙탕물을 뒤집어써도, 옷 안에 벌레가 들어가도, 평소 즐겨 입던 옷들이 사라져도 아시테르는 저 여유와 함께 입가엔 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한 번도 당황하거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은 보인 적이 없었다.
기분 나쁘면 화라도 낼 법 하건만 아시테르는 그것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아했다.
“이제 그만 그 가면을 벗겨주지.”
크로마제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의 주변으로 모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래는 채찍처럼 늘어나 아시테르를 노렸다.
“호오… 모래 마법을 사용하는구나.”
크로마제의 마법을 처음 본 아시테르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모래를 다루는 마법은 그동안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마법이었다.
뱀처럼 휘어진 모래줄기가 아시테르를 향해 뻗어왔다.
아시테르는 두 눈으로 모래의 움직임을 읽으며 가볍게 피해냈다.
“어디 한 번 계속 피해 보라고!!”
크로마제가 다른 손을 움직이자 또 다른 모래줄기가 형성되었다.
두 개의 모래줄기가 한데 엉키며 아시테르를 노렸다.
한 차례 몸을 회전한 아시테르가 한순간에 땅을 박차고 튕겨져 나갔다.
파삭!
아시테르의 목검이 크로마제의 가슴팍 앞에서 멈추었다.
뒤늦게 가슴팍을 보호한 모래가 목검에 스며들 듯 감싸 안기 시작했다.
“이제 다음은 없다?”
크로마제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한 아시테르가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을 마주한 순간, 크로마제는 전신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눈빛이었다.
먹이를 노리는 한 마리의 짐승을 눈앞에 마주한 느낌이었다.
아시테르는 목검을 제자리에서 회전시키며 가볍게 모래를 털어내었다.
파팍!
아시테르가 있는 곳으로 작은 모래 송곳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이미 아시테르는 멀찍이 몸을 피한 뒤였다.
“어딜!!”
이를 악문 크로마제가 빠르게 모래를 움직였다.
바닥에 깔려 있던 모래가 한꺼번에 몸을 일으켰다.
“모래주박!”
도망치는 상대를 가둬두기 위한 마법이었다.
크로마제는 우선 아시테르를 모래 안에 가둬두고 천천히 그를 괴롭힐 생각이었다.
팡.
그가 원하는 대로 아시테르는 커다란 모래주머니 안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지금껏 요리조리 잘도 피하던 아시테르가 꼼짝없이 안에 갇혀버리자 비로소 크로마제의 표정도 풀렸다.
“으하하하!! 꼴좋다! 그렇게 잘난 체하더니 붙잡혀 버렸네!? 그러게 왜 되지도 않는 검술을 하겠다고 설쳐대?”
“…….”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와 그가 겁에 질렸다 한들 크로마제는 아시테르를 순순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두 팔을 모았다.
주먹을 말아 쥐자 모래주머니가 점차 크기를 좁혀갔다.
크로마제가 다른 마법을 사용하자 모래로 된 송곳들이 모래주머니를 향해 날아갔다.
더는 안 되겠다 싶었던 로포가 앞으로 나서려던 찰나.
샤악―
모래주머니를 깔끔하게 반으로 가르고 아시테르가 밖으로 나왔다.
그를 향해 덮쳐오는 모래송곳들도 연이어 목검으로 모두 쳐내버렸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목검의 움직임을 본 로포가 저도 모르게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그동안 마법과 함께 검술도 수련해온 그였기에 아시테르의 검술이 얼마나 단련되어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뭐야…? 어떻게!?”
크로마제가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자신의 마법을 겨우 목검 하나로 막아내다니, 그가 생각하기에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멍하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크로마제가 다시 마력을 운용했다.
“이제 진짜 봐주지 않겠어!!”
모래가 한데 뭉치며 커다란 손바닥을 만들어냈다.
손바닥이 곧바로 아시테르를 내려쳤다.
파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아! 내가 너무 심했나……?”
뒤늦게 자신의 손속이 과했음을 깨달은 크로마제가 낭패한 기색으로 아시테르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저 무거운 모래가 한꺼번에 내려쳤으니 상당한 부상을 입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크로마제의 기우에 불과했다.
퍽.
“아악―!”
한 마디의 비명과 함께 크로마제의 상체가 절로 숙여졌다.
배에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절로 말려지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크로마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
“너… 너어……!”
목검으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 아시테르가 웃는 얼굴로 크로마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잔뜩 인상을 쓴 크로마제가 그런 아시테르를 노려보았다.
“으아아―!!”
괴성을 지른 크로마제가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양옆에서 날아온 모래주머니가 아시테르를 노렸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목검을 양옆으로 휘두르는 것만으로 크로마제의 마법을 무력화 시켰다.
“세상에…….”
간결하고 곧은 검선을 보며 로포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크로마제에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에서 최고치의 마력이 흘러 나왔다.
“이제 당신이 죽든 말든 알바 아니야.”
고통에 분노한 크로마제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을 사용했다.
주변에 있던 많은 양의 모래가 한곳에 뭉치며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골렘을 만들어내었다.
몸을 일으킨 골렘이 아시테르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커다란 골렘이 주먹을 뻗고 있는데도 아시테르는 목검을 가로세우며 가만히 골렘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 너무 자만하고 있는 것 아냐!? 잘못 막았다간 죽는다!?”
“자만이 아니야. 이건 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다.”
파앙!!
아시테르의 목검이 놀랍게도 골렘의 주먹을 막았다.
크로마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아시테르가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뭘 그리 놀라? 내가 말했지? 너는 기초가 부족하다고. 이런 정도의 공격으로는 내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거야.”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사실 아시테르도 속으로 놀랄만큼 크로마제의 공격력은 뛰어났다.
모래를 채찍처럼 사용하는 것도, 자신을 한순간에 가둬버린 것도 모두 굉장한 마법들이었다.
만약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아시테르였다면 이러한 마법들에 조금은 애먹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시테르의 두 눈엔 선명히 보였다.
크로마제의 마법이 불완전하다는 점이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마법은 아직 ‘흉내내기’ 수준에 불과했다.
마법의 근간을 이루는 마력의 운용이 서투르고 부자연스러워 어렵지 않게 마법의 결점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모래주머니에 갇혔을 때 쉽게 빠져나온 것도, 양옆으로 날아온 모래주머니를 목검으로 단번에 베어낸 것도 모두 마법의 결점들을 베어낸 덕분이었다.
마력의 흐름을 끊으니 자연스레 마법은 유지되지 않는다.
아카데미에서 마력을 제한받으며 오랜 시간 수련한 끝에 아시테르가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마법의 결(結)이 아시테르의 두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법의 결을 가른 탓에 크로마제의 마법은 쉽게 와해되었다.
물론 강하게 단련된 마법일수록 마법의 결도 질기고 단단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크로마제는 기초를 무시한 채 화려한 겉면에만 집착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테르로서도 어렵지 않게 크로마제의 마법을 와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크로마제로서는 이 같은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개소리하지마!! 내 마법이 겨우 검술 따위에게 무너질 리가 없잖아!!!”
크로마제가 다시 마법을 펼쳤다.
송곳모양으로 뻗어 나간 모래가 아시테르를 노렸다.
아시테르가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그를 놓치지 않으려 줄기처럼 뻗어나간 모래가 아시테르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아시테르의 움직임이 한발 더 빨랐다.
아시테르가 보폭을 넓게 가져가며 단숨에 크로마제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미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은 완벽히 아시테르에 의해 제어되고 있었다.
아시테르는 봐주지 않고 크로마제의 몸 이곳저곳을 목검으로 때렸다.
그럴 때마다 크로마제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감히 날 때리다니!!”
몇 대 얻어맞은 크로마제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었다.
어찌나 열이 받았는지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어! 내게 감히 손을 대!?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하아?”
“그리고 잊었어? 내 개인선생은 날 체벌할 수 없어! 그런데도 당신은……!”
“너야말로 뭔가 잊고 있는 것 아냐? 지금 이건 널 체벌하는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정당한 대.결. 이라고.”
아시테르가 손바닥으로 목검을 탁탁 치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크로마제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이제까지 보던 웃음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아무리 아시테르라 하더라도 모래를 뒤집어쓰거나 옷 안에 벌레가 들어가는 일, 가는 길에 물벼락을 맞거나, 냄새 고약한 음식들이 방안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등의 장난들이 아무렇지 않을 리는 없었다.
다만 어비스 던전에서 생활하며 수련하던 때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에 참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뿐이다.
그렇다고 그런 일들을 겪는 것이 썩 달가울 리는 없었다.
아시테르 역시 사람인지라 은근하게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목검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잘 들어둬. 네 입에서 ‘제가 이 대결에서 패했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진 절대로 이 대결은 끝나지 않을 거야.”
“뭐, 뭐!? 내가 내 입으로 그딴 거지같은 말을 할 것 같아!?”
“응,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래주길 바라고 있어. 되도록 절대 하지 마. 알겠어?”
아시테르가 목검을 들어 크로마제를 향해 겨누었다.
그러자 크로마제가 본인도 모르게 움찔했다.
마력하나 느껴지지 않건만 그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크로마제에겐 위협적이었다.
기세 좋게 말하긴 했지만 크로마제의 심장은 쿵쾅거리며 마구 날뛰고 있었다.
루기아 가문에서 고귀하게 자라나 누구 한 명에게 손찌검 한 번 받아본 적 없었던 크로마제였다.
그를 가르치는 개인선생들 역시 그동안 심심풀이 대상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인 프라울리가 있는 한 그들이 자신을 체벌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하든 프라울리가 나서서 보호해주고 막아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 어디에도 프라울리는 보이지 않았으며, 계약서의 어떠한 조항도 지금의 크로마제를 지켜줄 순 없었다.
아시테르가 다시 목검을 들고 다가오자 크로마제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