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왔습니다만-69화 (69/424)

069화 쓰라린 패배 (1)

“내, 내가 졌어… 내가 졌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 봐주지.”

털썩 주저앉은 크로마제의 앞에 아시테르가 섰다.

그의 목검이 가까이 다가오자 크로마제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대결을 시작한 뒤로 저 목검에게 얼마나 두드려 맞았는지 셀 수 없었다.

이제는 목검만 봐도 몸이 절로 아파올 지경이었다.

아시테르가 조용히 검을 들어 올리자 크로마제가 황급히 자세를 고쳐잡았다.

“제가 이 대결에서 패배 했습니다! 제가 졌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목검에 맞아서 멍투성이가 된 크로마제가 아시테르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그때서야 아시테르의 목검이 멈췄다.

그가 크로마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할아버지가 이런 기분이었나……?”

사실 대결 명목으로 흠씬 두들겨 패주는 건 비체 할아버지의 전매특허 방법이었다.

이 방법에 아시테르가 얼마나 당했는지 몰랐다.

아레나의 시선을 피한 너무나도 합법적(?)인 방법.

그래서 늘 비체 할아버지와의 대결은 고역이었다.

아시테르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원하는 만큼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선택권 없는 대결 신청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크로마제에게 본인이 당했던 방식으로 은근하게 갚아주긴 했지만 사실 아시테르라고 마냥 고소하기만 한 느낌은 아니었다.

매일같이 기고만장하던 크로마제가 저렇듯 안쓰러운 모습을 보이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이제야 뒤늦게 드는 생각.

한번 제대로 혼쭐을 내줘야겠다는 생각에 목검으로 구석구석 다스려(?)주긴 했지만 끝나고 보니 과했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시테르가 들고 있던 목검을 내리니 크로마제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그의 두 눈에선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음…….”

아시테르가 그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로포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시선이 자연스레 로포쪽으로 돌아갔다.

로포는 말없이 아시테르를 향해 고개를 젓는다.

가만히 두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하는 수 없이 아시테르는 팔짱을 낀 채 크로마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로마제 입장에서 이토록 비참한 패배는 처음이었다.

홍수처럼 밀려오는 격동의 감정들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뿐이었다.

“으아아―!!”

분한 마음이 북받쳐 오르자 크로마제가 주먹으로 땅을 연신 내려쳤다.

그런 모습을 아시테르와 함께 로포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크로마제를 보며 아시테르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어… 제가 너무 심했던 것은 아닌지…….”

그의 시선을 받은 로포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로포에게도 저런 크로마제의 모습은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아시테르가 잘못했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필요했을 일입니다.”

“그런가요…….”

아시테르는 서럽게 울고 있는 크로마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로포가 그런 아시테르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지금은 도련님 혼자 계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네.”

아시테르도 로포의 말에 십분 동의했기에 함께 자리를 피해주었다.

뒤에선 계속해서 크로마제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시테르가 고개를 돌리자 로포가 입을 열었다.

“아마 처음일 겁니다.”

“뭐가요?”

“이런 식의 패배는 말입니다. 그동안 가문의 마도사분들은 도련님께 실력 차이만 느끼게 해주었을 뿐 이렇게 직접적인 손속을 가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렇군요…….”

아시테르가 입맛을 다시며 허공을 응시했다.

비체 때문에 이런 일을 하루가 멀다 하고 겪어온 아시테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대결이 크로마제에게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칠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래도 그에게 있어 패배는 성장의 동력이자 현재 자신의 위치를 돌아볼 수 있는 반성의 기회이기도 했기에 꼭 안된 일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잘 되었네요.”

아시테르의 말에 로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의 다른 개인선생들이었다면 분명 후일부터 걱정했을 것이다.

어떠한 식으로든 이렇게 크로마제에게 손을 댔다면 분명 프라울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것에 대한 걱정부터 하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아시테르는 오히려 이번 일이 다행스러운 일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궁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떠한 점에서 잘 되었다고 말씀하신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실패를 경험해야 성공이 얼마나 값진지 알 수 있듯이 쓰라린 패배의 경험이 있어야 승리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노력의 결실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런 풍파를 겪지 않은 온실 속 화초는 쉽게 꺾이는 법이랬어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이런 쓰라린 패배를 겪은 경험이 바깥으로 나가기 전 크로마제에게 좋은 거름이 되어주지 않을까요?”

“호오… 좋은 말씀이시군요.”

로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시테르는 지금 자신보다 크로마제의 입장에서 생각해주고 있었다.

거기다 그도 사실 아시테르의 생각과 같았다.

크로마제는 그동안 지나친 보호를 받으며 자라왔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해도 제지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다.

프라울리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아시테르가 크로마제를 대결이란 명목으로 혼쭐을 내주는 때, 로포도 은근하게 동참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나친 체벌은 피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체벌은 필요하다는 것이 로포의 교육관이었다.

이는 로포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함께 걸어가던 아시테르가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크로마제가 좋아하는 것들 좀 알 수 있을까요?”

“예? 도련님이 좋아하는 것이요?”

“네. 좋아하는 것들을 좀 알아둬야 나중에 그것들로 기분도 좀 풀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흐음… 글쎄요. 도련님이 무언가를 특별히 좋아하시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그, 그런가요?”

아시테르가 낭패한 기색으로 입가를 실룩였다.

그가 크로마제를 그렇게 사랑의 목검으로 다스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믿고 있던 것은 바로 당근과 채찍방법.

비체는 대결을 통해 실컷 아시테르를 매타작한 뒤 늘 좋아하는 고기와 술을 가져와 아시테르의 기분을 풀어주곤 했다.

거기에 과거 비체가 겪었던 재밌는 얘기들까지 듣고 있으면 저녁 전까지만 해도 아시테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비체 할아버지를 미워하던 마음이 싹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비체는 아시테르의 마음을 어르고 달래주었다.

그래서 아시테르도 그 기억을 되살리며 비슷하게 하려 했던 것인데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안 되는데? 좋아하는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흠… 그렇지만 전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도련님이야 워낙 어렸을 때부터 원하는 것들을 말씀하시면 가주님과 판데아님께서 구해다 주시곤 하셨으니까요. 하고 싶은 것들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셨고…….”

“아… 아하… 아하하… 그, 렇군요…….”

아시테르의 표정이 곧 울상으로 되어버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크로마제와 자신과의 관계는 엉망인데 이제는 그 관계의 회복마저 어떻게 첫발을 내디뎌야 할지 미궁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땅이 꺼져라 새어 나오고 말았다.

고개 숙인 아시테르를 보며 로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이것이 아니었다.

이날의 일이 결국 프라울리의 귀에 들어가 버리고만 것이다.

프라울리는 당연히 머리끝까지 대노했다.

“당장 아시테르 그놈을 내 앞으로 끌고 와!”

프라울리가 로포를 향해 소리쳤고 하는 수없이 로포도 아시테르를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시테르와 함께 걸어오면서도 걱정스런 표정을 보였다.

“죄송합니다. 그때 제가 아시테르님을 말렸어야 했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로포 집사님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왜 제게 죄송하다고 말씀하세요. 이 모든 일은 제가 행한 일입니다. 당연히 이에 따른 책임도 제가 져야죠.”

“하지만 아시테르님께서는 크로마제님을 위한 생각에 그리 행동한 것인데…….”

로포가 안절부절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물론 이것은 오해였다.

크로마제를 교육하기 위한 것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아시테르 본인의 분을 풀기 위함도 섞여 있었다.

모든 것들을 계산에 철저히 넣을 수 있을 만큼 아시테르는 경험 많은 선생님이 아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로포는 아시테르의 진심을 결국엔 프라울리 가주님도 알아주시게 될 거라며 계속해서 위로를 해주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는 동안 어느새 두 사람은 프라울리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아시테르으으!!”

아시테르를 보자마자 프라울리가 거세게 소리쳤다.

그의 고함에 조금은 움츠러들 법도 하건만 아시테르는 평소와 같은 태도로 프라울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계약서의 조항을 잊었느냐!?”

“아니요. 계약서의 조항들은 항상 머리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랑스런 내 손자에게 손을 댄 것이지!?”

“체벌을 가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대결이었습니다.”

“이노오옴!! 선생과 제자가 대결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프라울리는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이런 것에 아랑곳할 아시테르가 아니었다.

“말이 안 될 것은 없지 않습니까?”

“뭐야!!? 근데 이놈이!!”

프라울리가 두 눈을 부라리며 아시테르를 노려보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아시테르에게 손속을 가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시테르를 보자마자 떠오른 것이 바로 프로메테 가문이었다.

아시테르가 이곳으로 온 뒤로 프로메테 가문의 가주인 크리울로스도 한 번씩 아시테르가 잘 하고 있는지 물었다.

이에 프라울리도 크리울로스에게 몇 번씩 아시테르와 어떤 관계냐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크리울로스는 말을 아꼈다.

“분명 뭐가 있긴 있는데… 그러니 저놈이 저따위 태도를 보이지…….”

발끈하던 프라울리가 한차례 감정을 추슬렀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네가 프로메테 가문의 비호를 받든 아니든 이제 상관없다. 이곳에서 나가라. 내 사랑스러운 손자에게 손을 댄 이상 더는 네놈에게 내 손자의 교육을 맡길 수 없다.”

“알겠습니다. 제가 더 이상 크로마제 학생을 맡게 되지 못하고 떠나가게 되더라도 제가 그동안 느낀 것 하나만큼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조건적인 보호와 용서는 오히려 크로마제 군을 망가트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결핍과 필요성, 고난과 역경 등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작은 문제들에도 얼마든지 무너져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끄럽다! 네깟 놈이 뭘 안다고 감히!”

“그런 점을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크로마제 학생의 마법을 직접 느껴봤는데 정말 대단한 마법이었습니다. 이 마법을 잘 갈고 닦는다면 크로마제 군은 분명 훌륭한 마도사가 될 것 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다듬어진 마법이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마도사의 마음이 단단하지 못하다면……”

“그만!!! 더 이상 듣기 싫다. 저놈을 끌어내게!”

프라울리의 명령에 루기아 가문의 사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시테르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참 아쉽게 되었군요…….”

그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크하하하!! 그것 참 마음에 드는 개인선생이로구만! 자네가 이번에 내 못난 아들을 가르치고 있는 개인선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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