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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70화 (70/424)

070화 쓰라린 패배 (2)

회랑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크로마제의 아버지이자 프라울리의 아들인 판데아였다.

건장한 체격의 그가 성큼성큼 아시테르가 있는 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판데아를 본 프라울리가 인상을 구겼다.

“판데아! 언제 돌아온 것이냐!? 돌아왔으면 내게 먼저 올 일이지……!”

“그래서 지금 이곳으로 찾아왔질 않습니까.”

“크흠… 갔던 일은 잘 되었느냐?”

“예. 문제 없이 해결했습니다.”

“그래. 알겠다. 이만 쉬어라. 나는 이 자와 할 말이 있으니 이제 그만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좋겠구나.”

“저도 여기 있는 선생분과 말을 좀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판데아의 말에 프라울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프라울리가 입을 열었다.

“이 자는 내가 고용한 크로마제의 개인선생이다. 그러니 너는 상관 말고 돌아가거라.”

“어떻게 상관하지 않겠습니까? 크로마제는 아버지의 손자이기 이전에 제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러니 제게도 여기 있는 선생과 대화를 나눠볼 기회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너……!”

발끈하려던 프라울리가 주변의 시선들을 살폈다.

당돌하게 나오는 판데아가 못 마땅했지만 지금은 한발 물러서야 할 때였다.

지금 여기서 판데아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만 강행하려 하는 것은 좋지 못한 선택.

판데아는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어갈 인물이었다.

그런 판데아의 귄위를 자신부터 깎아내리려 한다면 훗날 크로마제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이번 판데아의 요구는 분명 합당했다.

결국 프라울리가 한발 물러서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해라. 하지만 내 뜻은 분명히 전해두겠다. 나는 저 개인선생을 해고하려 한다.”

“그것 또한 제가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아버지.”

“크흠….”

더는 얘기하기 싫다는 듯 프라울리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판데아가 아시테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가문 밖으로 나가 있는 바람에 이렇게 처음 뵙게 되는군요. 제가 바로 크로마제의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시테르라고 합니다.”

“후후, 오면서 얘기는 들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판데아는 아시테르를 이끌고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루기아 가문 안에서도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시테르는 여기저기 꽂혀 있는 검술 교본들을 보는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이를 살핀 판데아가 슬쩍 입을 열었다.

“로포 아저씨한테 들었습니다. 검술을 하실 줄 아신다구요?”

“아, 네. 그렇습니다.”

“그것 참 의외로군요. 나이도 젊으신 것 같은데.”

“예?”

“아차, 실례되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 아들도 그렇고 요즘 젊은 친구들은 검술을 등한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검술을 익히셨다고 하니 신기해서 해본 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께서 검술을 가르쳐주셔서 아버지와 함께 배웠습니다.”

“아버지와요?”

“네. 그렇습니다만…….”

판데아의 표정을 살피던 아시테르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아버님이 저는 너무나 부럽군요. 아들과 함께 검술을 배우다니… 아마 말씀은 안 하셔도 엄청나게 행복해 하셨을 겁니다.”

“예?”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기억하는 유미르의 모습은 언제나 검술에 진지했던 표정들뿐이었다.

간혹 자신을 골려 먹기 위해 내기를 제안하거나, 비체 할아버지가 기분이 안 좋을 때 치사하게 아들의 등을 떠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유미르와 아시테르 둘 모두 검술을 익히기 위해 필사적인 나날들이었다.

“하긴. 필사적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어났으니까.”

던전의 기억들을 떠올리던 아시테르가 헛웃음을 지었다.

당시에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좋았던 기억들이었다.

아시테르의 웃음을 본 판데아도 함께 웃어주었다.

“어쨌거나 부럽군요. 그런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저도 아들과 함께 검술을 연마하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제게는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아…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 것 같습니다.”

아시테르가 프라울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프라울리의 성격에 크로마제가 검술을 익히는 것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벌써 그 정도까지 파악하신 겁니까?”

“애써 파악하지 않아도 그런 사실쯤은 누구라도 단번에 알 수 있을 겁니다. 아하하…….”

“후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아시테르 선생님의 검술도 직접 보고 싶군요. 이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 또한 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 로포 집사님께 들었습니다. 저라도 괜찮다면 얼마든지 검을 나누고 싶어요. 이곳에 와서 검술을 쓰는 사람은 잘 못 봤거든요.”

“함께 검을 나눌 생각을 하니, 이것 참 벌써부터 흥분되는군요.”

판데아가 한층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아시테르도 덩달아 들뜬 얼굴이었다.

어비스 던전 밖으로 나와서 단 한 번도 검술에 관심 갖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뜻밖의 인연으로 마주하게 되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마법 대결도 좋았지만, 검술 대결도 그만큼이나 짜릿하고 긴장감 넘치는 일이었다.

다시 그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판데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제 아들과 대결을 하셨다구요.”

“아…! 그 일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온몸이 만신창이더군요.”

“네… 면목 없습니다. 제가 힘 조절에 실패해서…….”

“아뇨. 제게 죄송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제지간에 대결을 하다 보면 그 정도 일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

당황해하는 아시테르의 어깨를 판데아가 토닥여주었다.

그는 안심하라는 듯 아시테르에게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검술 수련은 마법 수련보다 훨씬 더 다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실전 경험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니 늘 실전 같은 대련을 요구하잖아요. 그러다보니 몸이 다치는 것도 일상다반사인 일이죠.”

“아, 그건 그렇죠.”

“그러니 개의치 않습니다. 검술 수련 할 때는 저렇게 다치는 게 일상다반사였는걸요. 그리고 아직 경험이 많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얼마든지 힘 조절에 실패할 수 있지요.”

판데아가 다 안다는 듯이 아시테르의 활로를 열어주었다.

그는 아시테르가 크로마제를 혹독하게 어루만져 준 것을 단순 해프닝으로 취급해버렸다.

그러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이긴 하지만 가끔은 미치도록 패버리고 싶을 때가 있죠. 이해합니다.”

“예? 아니, 갑자기 그런 말씀을…….”

“다 압니다. 그 녀석이 그동안 선생님을 많이 괴롭혔다죠? 크로마제가 어렸을 때부터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바람에 버릇이 많이 없습니다. 크로마제가 태어나자마자 제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다 보니 다들 그 녀석을 더욱 귀하게만 대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제 아들을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십시오.”

“미워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제게 귀여운 동생이 있다면 저렇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도 해봤었습니다.”

“아하하!! 그거 좋군요. 제 아들을, 크로마제를 동생으로 대해주시는 것!”

판데아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호방함에 아시테르가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저는 아시테르 선생님의 교육방식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제 교육방식을 어떻게……?”

“제가 이곳에 없었어도 매일같이 보고는 받았습니다. 다른 선생들은 어떻게 해서든 크로마제에게 마법만 가르치려 했는데, 아시테르 선생님은 조금 다르더군요. 크로마제에게 어째서 기초마법서부터 익히게 하려 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정말로 기초가 부족합니다. 그 친구는.”

아시테르의 간단한 대답.

이것이 오히려 판데아의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다른 많은 생각들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정말 단순한 이유였다.

“이것 참 놀랍군요. 저는 마법을 익히지 않아 잘 모르지만 제가 알기로 크로마제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기초는 다 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뇨. 확실히 기초가 부족합니다.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고위 마법은 속이 빈껍데기에 불과해요.”

“흐음… 그렇군요. 그런데 정말 단순히 기초가 부족해서 그렇게 한 겁니까? 그러면 그것들을 설명해주고 직접 가르쳐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본인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제가 아무리 가르치려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겁니다. 하다못해 무엇이든 배워야겠다는 마음가짐이라도 있어야 가르쳐볼만할 텐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크로마제 학생은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태도가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라면 제가 뭘 가르치던 의심부터 할 것이 분명할 테죠.”

“역시. 단순한 마법 교육이 아닌 마음가짐까지…! 제가 생각했을 때 아시테르 선생님은 크로마제에게 아주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처럼 대충대충하고 떠나려던 개인선생들과는 아주 달라요.”

판데아가 아시테르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오히려 이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판데아가 한층 진지해진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니 부디 제 아들을 포기하지 말아주십시오.”

“예?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아뇨. 아시테르 선생님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선생님께서 계속해서 크로마제를 가르칠 의향이 있으시다면 쭉 가르쳐 주십시오.”

“하지만 판데아님. 프라울리 가주님의 뜻이 워낙 강경하셔서 저는 계속해서 크로마제의 개인선생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은 제가 해결해드릴 테니까요. 아시테르 선생님은 그저 크로마제를 가르쳐주는 것에만 열중해주시면 됩니다.”

너무나도 진지한 그의 태도 탓에 아시테르가 괜히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부탁을 받으니 뭔가 어려운 일을 떠맡는 기분이었다.

아시테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판데아가 마침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아시테르가 이참에 제안을 하나 꺼내기로 했다.

어차피 아시테르는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그만인 상황.

크게 아쉬울 것 없었기에 밑져야 본전인 일이었다.

“대신에 저도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최대한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크로마제의 체벌에 관한 문제인데…….”

“흐음… 그것에 관해서는 저도 선뜻 말씀 드리기가 애매하군요.”

“혹시 판데아님께서도 프라울리 가주님과 같은 생각이십니까? 크로마제의 체벌은 반대하는…….”

“아뇨. 저는 오히려 상황에 따라 체벌도 필요하다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지금까지 직접 체벌하지 않으신 겁니까?”

아시테르의 순수한 의문이었다.

그 질문을 받은 판데아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제가 워낙 바쁘기도 했지만 제 성격머리에 크로마제를 손대면 걷잡을 수 없이 반 죽여 놓을 것 같아서요.”

“에… 네에……?”

“아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저 또한 제 아들이 너무 소중했기에 함부로 체벌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녀석만 보면 죽은 제 아내가 생각나기도 해서 말이죠. 그래서 매를 들었다가도 금방 내려놓곤 했습니다.”

“아아… 그랬군요…….”

전혀 농담 같지 않아 보이는 말투였었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생각해보니 제 아들이 저렇게 큰 데엔 제 책임이 큰 것 같군요. 후우… 빠르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교육하시는데 체벌이 필요하다면 체벌을 가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아들이 변할 수 있다면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저도 장담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판데아님을 보니 꼭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크로마제가 마도사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써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시다면 제게도 방법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래서 말인데 체벌권보다 이것 하나만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말씀해보십시오.”

“제가 크로마제를 데리고 어딜 좀 다녀와도 괜찮겠습니까?”

아시테르의 물음에 판데아가 생각해볼 것 뭐 있냐는 듯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염치없지만 우리 아들은 전적으로 아시테르 선생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그런데 대체 제 어딜 보고…….”

“으하하! 이 시대에 검술을 익힌 청년이라면 그냥 믿음이 갑니다! 거기다 그동안의 행보도 면밀히 살펴보았고 조금 죄송하지만 아시테르 선생님의 과거 행적들도 조사해봤습니다. 알고 보면 저도 많은 생각들을 하고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겁니다.”

판데아가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판데아의 손을 맞잡는다.

정작 크로마제는 두 사람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가는 줄도 모르고 쓰라린 패배에 허덕이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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