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왔습니다만-71화 (71/424)

071화 크로마제의 고난

아시테르와의 대결에서 패한 뒤 크로마제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지냈다.

입맛도 없었고 다른 일에 의욕도 생기지도 않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자신의 두 손만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내가 지다니… 그것도 마법 한 번 쓰지 않은 상대에게……!”

크로바제가 봤을 때, 아시테르는 자신을 상대로 이렇다 할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크로마제의 오해였다.

아시테르는 순간적으로 신체를 강화하기 위해 마력을 운용했었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크로마제로선 아시테르가 마법 한번 쓰지 않고 자신을 무너뜨린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 하하…….”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본래라면 아침마다 식사를 들고 아시테르를 보러 가야 했지만 크로마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커다란 충격에 그 약속을 모른 척 하고 있었다.

아시테르 또한 크로마제가 약속을 지킬 것을 종용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멍들고 다친 모습을 보이기 싫어 한동안 방에서 숨어 지내던 크로마제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가 향한 곳은 또래 친구들이 많이 모이는 곳 타란튤라 주점.

타란튤라는 이쪽 지역에 사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교류를 위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 타란튤라의 앞에 서서 크로마제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이 뭣 같은 기분을 풀기 위해 발걸음 닿는 곳으로 오긴 했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썩 내키지 않았다.

그때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뭐야? 루기아 가문의 크로마제 아니야?”

“네가 웬일이냐? 여기에 얼굴을 다 비추고.”

“그러게. 그 잘난 루기아 가문의 자제께서 이 누추한 곳에는 무슨 일이래?”

크로마제를 보자마자 몇몇 귀족 아이들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크로마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이곳에서 어떤 이미지로 보여졌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때 푸른 장발의 청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어서와라 내 친구 크로마제!”

“달란……!”

“소식은 들었다!”

“……?”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이곳 소식 빠른 것쯤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개인선생한테 보기 좋게 깨졌다면서?”

“그걸 어떻게……?”

“당연히 루기아 가문의 가주님에게서 들었지! 널 무식하게 패놔서 개인선생을 자를 거라고 노발대발 하셨다더라.”

“…….”

크로마제가 인상을 구긴 채 고개를 숙였다.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도 없어, 그냥 침묵을 지켰다.

그런 크로마제의 태도를 확인한 몇몇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몰래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이곳에 와 잘난 척만 늘어놓으며 다른 귀족 가문의 자제들도 수시로 무시하기 바빴던 크로마제였다.

그런 과거의 행동 때문에라도 크로마제를 좋게 바라보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때 달란이 크로마제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런데 크로마제. 내가 더욱더 재밌는 소식을 들었지 뭐야? 너는 우리들한테 항상 네가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1~2등급까지는 금방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입에 달고 살았잖아? 근데 어째서 2등급도 아닌 3등급의 개인선생한테 그렇게 처참하게 깨진 거야?”

“그건……!”

아주 신이 난 달란의 입꼬리는 거의 귀에까지 걸리기 직전이었다.

크로마제가 그의 얼굴을 보며 발끈하려던 찰나 아시테르와의 대결이 떠올라 입을 꾹 닫고 말았다.

마법도 아닌 검술에 패했다고 말한다면 여기서 더 놀림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크로마제가 입을 닫고 이번에도 침묵을 지키자 달란이 더욱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기세가 완전히 넘어왔다.

“할 말이 없나보네… 근데 정말 실망인걸. 속성 변환도 못 하고 기초마법밖에 못 써서 3등급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사람한테 졌다면서?”

“뭐……?”

“뭘 그렇게 놀라? 아하하하!! 우리 형이 아카데미 학생인 것은 너도 알고 있지? 우리 형이 그러더라. 너네 개인선생 아카데미에서도 유명한 낙제생이라고. 루기아 가문도 참 의외네. 그런 덜떨어진 개인선생을 구해다 주고… 아! 아니지. 그동안 네가 너 잘난 맛에 살면서 개인선생들을 괴롭히고 내쫓아서 결국 그 정도 개인선생밖에 안 남은 건가? 그래서 포기한 것 아냐?”

달란은 이제 아예 대놓고 크로마제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크로마제가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속성 변환도 못하고 기초 마법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마도사에게 패했다는 말.

이 말이 더더욱 크로마제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제기랄… 그래서 기초마법만 가르치고… 그때는 마법도 쓰지 않았던 건가……!”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그런 보잘 것 없는 마도사를 자신의 개인선생으로 붙여준 프라울리도 미웠고, 그런 마도사에게 처참히 패해 빌었던 자신이 더더욱 싫어졌다.

“어!? 야, 너 우냐 지금?”

“우와…. 크로마제가 눈물을 보이기도 하는 구나.”

“저 녀석한테 눈물도 있었어? 진짜 의외네.”

크로마제의 눈시울이 빨개진 것을 본 달란과 다른 친구들이 놀라 말했다.

그러던 말던 크로마제는 분노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크흐흐 그런 허접 같은 선생한테 진 게 억울하긴 하지? 하긴… 나 같아도 그렇긴 하겠다. 고작 그 정도 수준의 선생 따위한테 그 잘난 크로마제가 져버렸으니… 얼마나 창피하겠어. 우리조차도 개돼지로 봤었는데 그치? 나 같으면 얼굴도 못 들고 다녔을 것 같은데. 용케 여기를 찾아왔네.”

마침내 달란의 속마음이 바깥으로 나왔다.

그동안 크로마제의 비위를 맞춰주던 귀족 친구들도 지금은 달란의 뒤에 서 있었다.

말로는 평생 함께할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이런 상황이 오자 달란과 함께 하고 있었다.

“박쥐같은 새끼들…….”

그들의 면면들을 보며 크로마제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달란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야. 네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곳에 와서 화풀이할 생각이라면 접는 게 좋을 거야.”

“뭐?”

“여기에 네 편은 아무도 없어. 네 기분 풀겠다고 다른 친구들을 괴롭힐 생각이라면 그러지 않는 것이 좋아. 내가 막아설 테니까.”

달란이 듬직하게 친구들의 앞으로 나섰다.

마치 크로마제는 악역이 되어버렸고, 달란은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서 있는 모양새였다.

우두커니 달란과 친구들을 바라보던 크로마제가 이만 몸을 돌렸다.

이곳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지만, 과거의 자신이 만들어낸 인연은 이러한 상황에 생각보다 혹독하게 다가왔다.

그 누구도 크로마제의 얘기를 들어보려 하지도, 크로마제의 마음에 공감해주려 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어두운 타란튤라의 내부가 오늘따라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알싸한 알코올의 냄새가 크로마제의 코끝을 찌른다.

씁쓸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그가 허공을 응시했다.

자업자득이었다.

누굴 원망할 수도 없는 일.

그가 조용히 자리를 떠나려는 때 달란이 기어코 한 마디를 더 꺼내고 말았다.

“진짜 루기아 가문도 한물간 것 아니냐? 천민 출신의 개인선생에, 그런 선생한테 처참히 패한 제자. 결국 끼리끼리 노는 패배자 같은 사제지간이네. 사실 크로마제 저 녀석도 별 것 아닌데 그동안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허세 부리고 다닌 걸지도 모르지.”

“뭐?”

걸어나가던 크로마제가 멈춰 섰다.

그가 고개를 돌려 달란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달란이 어깨를 으쓱인다.

“왜? 내 말이 틀리냐?”

“야, 선 넘지 마. 다른 건 다 참아도 우리 가문을 욕하는 건 절대 못 참아.”

“못 참으면?”

크로마제의 머리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은근하게 달란이 먼저 손을 쓴 것이다.

그의 마법은 물 마법.

크로마제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이에 크로마제가 천천히 손아귀를 펼쳤다.

그의 마력이 흘러나오며 모래가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이를 본 달란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마법을 보이면 어떻게 할 건데? 공격이라도 해보려고?”

“못 할 것도 없지.”

크로마제가 그대로 마법을 날렸다.

그러자 달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법을 펼쳤다.

날아오는 모래들 위로 물줄기가 쏟아졌다.

그러자 모래가 그 자리에서 가라앉고 말았다.

“잊었냐? 내 마법이 너랑은 상성인거. 내가 훨씬 더 유리해.”

“그래서 어쩌라고.”

크로마제가 작정하고 마력을 끌어올리자 주변에 모래더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달란은 겁을 집어먹거나 당황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잘 되었다는 얼굴로 마법을 준비했다.

“차라리 잘 됐어. 이쯤에서 네가 사실은 얼마나 형편없는 실력이었는지 알게 해줄게.”

달란의 주변에서 뻗어 나간 세 개의 물줄기가 크로마제를 향해 뻗어 나갔다.

크로마제가 손을 치켜드니 모래방패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런데 모래방패의 상태가 평소와 달랐다.

마음이 흔들려 온전치 않으니 그 상태가 마법에도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아…….”

크로마제가 무언가를 깨달을 틈도 없이 물줄기에 모래방패가 형편없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물줄기는 속도를 멈추지 않고 크로마제를 때렸다.

“크학……!”

크로마제가 고통에 신음하며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승리의 미소를 보인 달란이 주변을 둘러보며 한껏 턱을 치켜든다.

그의 시선이 슬쩍 오른편을 향했다.

그곳에 조용히 앉아 있는 여인.

사실은 저 여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러한 일들을 벌였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크로마제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

크로마제를 확실히 제압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분명히 여인의 마음도 움직일 것이라 믿었다.

머리를 곱게 빗어 올린 여인이 쓰러진 크로마제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크로마제의 시선도 자연스레 달란의 시선을 쫓아갔었다.

그곳에 있던 여인을 본 크로마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야 달란이 자꾸만 자신을 건드린 이유를 알아차렸다.

“모르아네…….”

바로 저 여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크로마제와 달란이 어렸을 때부터 라이벌 관계로 지내온 이유이기도 했다.

둘 모두 모르아네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는 것이 더욱 견디기 어려웠던 크로마제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그가 다시 자리를 떠나려는 때 달란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딜 가려는 거야!?”

“너, 정말 끝까지 해보자는 거냐?”

“왜? 이제와 두렵기라도 한 거냐? 겁먹었으면 그렇다고 말해. 순순히 돌려보내 줄 테니까.”

달란의 유치한 도발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크로마제는 그 도발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아네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더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자신에 대한 분노이자,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이 불쾌한 감정이었으니까.

결국 폭발한 크로마제가 달란과 싸움을 시작했다.

허공에 모래가 움직이고 물줄기가 주변에 퍼졌다.

예전이라면 호각을 이루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개인선생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꾸준히 성장해온 달란과 다르게 크로마제는 그렇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이 차이가 결국 작금에 이르러 커다란 격차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파앙!!

물줄기에 시원하게 얻어맞은 크로마제가 바닥에 쓰러졌다.

“역시 별 것 아니었네. 그동안 그렇게나 잘난 척 하더니.”

달란이 쓰러진 크로마제를 향해 한 마디 달려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달란이라고 해서 마냥 여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크로마제는 크로마제였다.

귀족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인재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 와중에 그도 달란에게 상처를 입혔다.

“퉤.”

크로마제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핏물이 섞여 나오는 것을 보니 입안도 터진 모양이었다.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금만큼 쪽팔린 상황이 없는데… 아픈 건 그 선생놈한테 깨졌을 때가 여러모로 더 아프네.”

다른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자신을 두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늘 그래왔으니까.

다만 모르아네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신경 쓰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제기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알아. 내가 한심한 것쯤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크로마제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 때, 달란의 물줄기가 크로마제를 향해 뻗어왔다.

휘리릭―!!

어디선가 날아온 실뭉터기가 물줄기를 막았다.

“자아, 여기까지. 더 이상의 소란은 용납하지 않아.”

고혹적인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귀족 자제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뒤늦게 자리에 나타난 타란튤라의 주인, 마르필레가 중간에 끼어든 것이다.

지금은 타란튤라를 운영하고 있지만 마르필레도 과거 최전선에서 활약했을 만큼 뛰어난 마도사라 했다.

그녀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던 달란이었기에 입맛을 다시며 이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깝네… 확실히 뭉개버릴 수 있었는데.”

달란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 가문의 자제들도 싸늘한 시선으로 크로마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르필레가 크로마제를 일으켜주는 동안 누군가 곁에 다가와 말했다.

“뭐야? 넌 또 왜 여기서 맞고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