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왔습니다만-72화 (72/424)

072화 크로마제의 라이벌

목소리의 주인은 아시테르였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동자로 크로마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그야 나도 여기 손님이니까?”

아시테르가 새삼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얼굴로 답했다.

크로마제의 얼굴을 살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난 척은 실컷 하더니 여기저기 야무지게 맞아줬네.”

아시테르가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아주려 하자 크로마제가 그의 손을 쳐냈다.

그리곤 자신의 옷으로 핏물을 훔쳐냈다.

“필요 없어. 당신의 도움 따위.”

“후후 그러냐?”

아시테르가 고개를 돌려 달란과 다른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마침 그들 모두 갑자기 나타난 아시테르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리더격인 달란이 먼저 나서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아, 저는 아시테르라고 합니다.”

“아시테르… 아아! 아시테르면 크로마제의 개인선생 아닙니까!?”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아시테르가 웃으며 달란의 말에 답해주었다.

반면 크로마제는 혀를 찼다.

아시테르가 이곳까지 와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어째서 제 학생이 피를 흘리며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겁니까?”

아시테르의 물음에 달란이 코웃음 쳤다.

그가 이미 천민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따로 굽힐 것도 없다는 것이 달란의 생각이었다.

그는 오히려 이참에 크로마제의 개인선생까지 눌러놓으면 더더욱 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우러러 볼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달란이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가만히 있었는데 크로마제 녀석이 먼저 시비를 걸지 뭡니까? 자기 개인선생한테 지고 와서 쪽팔린 건 알겠는데… 하, 여기 와서 화풀이를 하려 한 건지 갑자기 와서 우릴 겁박하려 하니까 저희도 모르게 반격한 거죠… 그 정도는 이해하시겠죠?”

“아… 네 뭐…….”

본인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음에도 아시테르는 그저 머리를 긁적이며 답한 것이 전부였다.

아시테르의 반응에 크로마제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달란의 말은 거짓말이었지만 이제와 자신이 변명을 한다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거기다 크로마제는 지금까지 아시테르를 괴롭혀 왔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의 말은 믿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 아시테르가 크로마제의 고개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

“고개 들어. 아무 때나 그렇게 고개 숙이는 것 아냐.”

“에……?”

“이제 네 입으로 얘기해봐. 저 친구 말이 사실이야?”

“아… 그건…….”

크로마제가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한 얼굴을 보였다.

아시테르라면 기회는 이때다 싶어 당연히 달란의 말을 믿고 자신을 함께 까내릴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 아시테르는 자신의 얘기를 묻고 있었다.

“다른 때는 잘만 말하더니 이런 때엔 왜 그렇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어?”

“쳇… 그런 것 아니라고…….”

“그럼 말을 해봐. 저 친구 말이 맞아? 정말 그래? 네가 저 친구들한테 시비를 걸고 다녔어?”

“아니 내가 왜! 나는 그저 친구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여기에 와본 것뿐이야. 물론 전부다 친구인 척 했던 놈들인 것 같지만… 어쨌든 그러다 저 녀석들이 먼저 우리 가문을 욕하고 내 개인선생을 욕하고 나까지도 함께 욕했다고. 그래서…….”

말을 하다 보니 크로마제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평생 동안 이렇게 눈물을 보인 적이 없는데 왜 자꾸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려는지 모르겠다.

말끝을 흐린 크로마제가 더 이상의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다른 것보다 크로마제의 입에서 개인선생 얘기까지 나오자 아시테르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와아… 그럼 너는 나 때문에도 같이 화를 내준 건가?”

“아…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솔직하지 못하긴… 어쨌든 결국 너는 잘못 없다는 얘기네. 맞지?”

“쳇… 마음대로 생각해. 어차피 당신은 내 말 안 믿을 거잖아.”

“믿어. 스승이 제자 말을 안 믿으면 누가 제자 말을 믿어?”

아시테르가 크로마제의 머리를 쓰다듬곤 몸을 일으켰다.

개인선생에게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라 크로마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한편 몸을 돌린 아시테르가 달란과 마주 섰다.

“들어보니 그쪽분도 잘못한 것 같은데 이쯤에서 서로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은 어떻겠어요?”

“아니 지금 내 말보다 저 녀석 말을 믿는 거예요?”

“그럼 내 제자 말을 믿지. 오늘 처음 보는 당신 말부터 무턱대고 믿어야 하나요? 그것 참 이상한 사람이네…….”

아시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맞는 말을 저렇게 순수한 표정으로 해대니 달란으로서도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반면 그동안 본인이 당했던(?) 것을 달란이 똑같이 당하는 모습을 있으니 크로마제는 속이 시원해 입가에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잠시 얼굴을 실룩거리던 달란이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하… 이것 참.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선생이라 제자 편을 든다 이건가요?”

“당연하죠. 스승과 제자지간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그쪽 스승은 안 그런가 봐요?”

아시테르가 또다시 순수한 눈망울로 물었다.

그것이 달란의 기분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는 것을 아시테르는 모르고 있었다.

“이익…! 내 개인선생님도 당연히 그러시지! 그리고 내 선생님과 당신 따위를 비교하지마! 아카데미의 낙제생 주제에.”

“아아, 당신 선생님이랑 나랑 비교하려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들렸다면 오해니까 오해를 풀어주길 바라요.”

온갖 것들을 겪어온 아시테르에게 이러한 상황은 별것도 아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달란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리곤 달란의 상처를 살폈다.

“아이고… 그쪽도 우리 제자한테 많이도 얻어맞았네… 일단 우리 제자가 상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건 제자 관리를 못한 제 탓이에요.”

아시테르가 달란을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가 먼저 어른스럽게 나서자 오히려 달란만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아시테르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것은 달란이 의도하고 있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그도 아시테르의 사과를 받아주고 말았다.

“아닙니다. 저희도 참았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누구나 다 실수는 하는 법이니까요. 다만…….”

아시테르의 눈빛이 일순간에 달라졌다.

순수하게 웃고 있던 그의 눈빛이 한층 차가운 느낌을 담았다.

“다음 번엔 함부로 제 제자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네……?”

“말 그대로!”

아시테르가 다시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순간 자신이 당한 느낌이라고 생각한 달란이 애써 입을 열었다.

“흥! 크로마제도 불쌍하네. 당신 같은 선생한테서 배워야 한다니.”

“갑자기요?”

아시테르가 놀란 토끼눈이 되어 달란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달란이 한 차례 침을 삼켰다.

당한 것 같은 느낌에 일단 말부터 내뱉고 봤는데 어서 뒷말을 수습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렇지 않나요? 아카데미에서 3등급이라면서요? 당신.”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 3등급의 낮은 수준의 개인선생이 크로마제를 가르치는 것부터가 굉장히 안타까운 일 아닌가.”

“호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이 있어요. 우선 첫 번째. 본인이 아카데미 학생도 아닌 이상 함부로 3등급이 낮은 수준이다 뭐다 말하지 말아요. 겪어보지 않았잖아요? 그 3등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노력하고 좌절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함부로 말해선 안 돼요.”

아시테르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내가 2등급이든 3등급이든 4등급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크로마제에게 좋은 것들을 가르쳐 줄 수 있느냐죠. 그러한 점에서 나는 이미 크로마제의 가문에게서 합격점을 받은 겁니다.”

“……”

“그러니 내 자격을 운운할 생각이라면 크로마제의 가문인 루기아 가문으로 가서 직접 따지세요. 특히나 내게 계속해서 크로마제의 개인선생으로 있어 달라고 부탁한 것은 루기아 가문의 판데아님이시니. 이왕이면 그분을 찾아가 따져보세요.”

조곤조곤 말하던 아시테르가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크로마제쪽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크로마제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후후 뜻대로 안 돼서 미안하게 됐어 크로마제. 이번에 판데아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시더라고. 체벌권을 인정해줄 테니 너를 잘 좀 부탁한다고.”

아시테르의 말에 크로마제의 얼굴이 점점 사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대결을 핑계로 그렇게나 흠씬 두들겨 패던 아시테르였다.

인정사정없는 그가 이제는 체벌권까지 받았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을 터였다.

“말도 안 돼… 할아버지가 허락하실 리가 없는데…….”

“흐음… 그 부분도 잘 해결된 모양이야. 어때? 너무 좋지 않아?”

크로마제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아시테르의 말이 메아리치며 귓가에 계속 맴돌 뿐이었다.

크로마제의 반응을 살피던 아시테르가 달란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아 이제 마지막으로. 그럼 나랑 내기 하나 할까요?”

“내기요? 무슨 내기?”

“내가 지금부터 크로마제를 가르쳐서 당신을 이기는지 아닌지. 내기하자는 말이에요.”

“하하하!! 지금 장난하시는 겁니까? 내 개인선생이 누군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몰라요. 내가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요?”

“하긴… 그러니까 이런 내기를 제안하는 거겠지. 이봐요, 크로마제네 개인선생님. 천민 출신이라 뭘 모르시나 본데… 이 세상에는 말…….”

“혹시 겁나요?”

이번엔 아시테르가 먼저 선수를 치며 달란의 심기를 건드렸다.

역시나 달란은 어렸다.

아시테르가 살짝만 건드렸는데도 그는 발끈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겁나긴!! 지금 당장도 크로마제를 이길 수 있는데 나중에라도 못 이길까 봐?”

“흐음… 그러면 내기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아도 되겠죠?:”

“좋아요. 하죠. 그 내기라는 것.”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지금부터 크로마제를 가르쳐 얼마든지 눈앞의 달란보다 강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달란이 한 번 더 딜을 걸어왔다.

“근데 제가 이기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가 뭘 해줘야 하나요?”

“아주 간단해요. 당신이랑 크로마제가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비는 거예요.”

“흐음… 그건 곤란한데요.”

“곤란하다뇨? 왜요. 이제 와서 막상 내기하려니까 질 것 같아요?”

달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턱을 한껏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무슨 소리냐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당신에게 잘못한 게 없는 걸요. 그런데 무슨 잘못을 빌겠어요? 내가.”

“그… 그야 당연히 당신이 날 무시했으니까……!”

“에이, 무시? 내가 언제 당신을 무시했어요?”

“이… 이익…!! 그러면 무엇을 걸 건데요? 설마 그때 가서 지면 ‘아 졌네.’이러고 끝낼 것은 아니잖아요? 그럴 거면 내가 이 내기에 굳이 응할 필요가 없죠.”

그의 말에 아시테르가 턱을 매만졌다.

그로서는 사실 이런 대결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되는 배움의 장이었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마련해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일로 여겼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이것은 크로마제도 포함이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아시테르가 마침내 깔끔한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아시테르가 손뼉을 치며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크로마제의 입장에서 이 골 때리는 개인선생은 이다음 아주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정성스럽게 늘어놓는다.

“대결에서 지는 사람이 깔끔하게 모르아네 씨를 포기하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