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왔습니다만-74화 (74/424)

074화 크로마제의 선택

“잘 들어.”

“뭐… 뭔데 그런 표정으로 날 보는 거야?”

“여기까지는 내가 강제로 데려왔지만. 결국 선택은 너의 몫이야.”

“나보고 뭘 선택하라는 건데?”

“스스로 변하고 싶다면 저곳으로 들어가면 돼. 그런데 만약 나도 못 믿겠고 그냥 이대로가 좋으면 들어가지 않고 돌아가는 선택을 해도 좋아. 여기까지 끌고 오는 것은 나의 강제였지만, 돌아간다고 한다면 막지 않겠어.”

“…….”

“물론 그 선택과 동시에 나도 더이상 널 가르치려 하진 않을 거야. 판데아님의 부탁이 있었다곤 해도 너의 선택이 그렇다면 나는 깔끔하게 널 포기할 생각이니까.”

아시테르의 말은 진심이었다.

크로마제가 아무리 좋은 자질과 보기 드문 마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시테르는 크로마제에게서 일말의 진심이라도 알아보기 위해 이런 선택지를 준 것이다.

만약 크로마제가 다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면 아시테르도 미련 없이 돌아설 생각이었다.

크로마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로서도 아시테르의 말을 가볍게 들어넘길 수 없었다.

지금까지 지켜봐 온 바로 아시테르는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포기한다면 말 그대로 포기하고 돌아갈 사람이었다.

다른 개인선생들과 달리 아시테르는 이 일에 크게 미련이나 아쉬움을 두는 것 같지도 않으니 더더욱 그런 선택을 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시테르가 자신을 포기한다는 말이 묘하게 자꾸만 신경을 건드렸다.

곰곰이 생각하던 크로마제가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여기에 뭐가 있는데?”

“안 알려줘.”

“아니… 너무한 것 아냐?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것도 많이 없고… 여기서 뭘 하는지도 안 가르쳐 주면 뭘 보고 판단하라는 거야?”

“너의 마음과 네가 지금까지 지켜봐 온 눈앞에 있는 나.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평가하는 지 그건 그다지 중요치 않아. 그보다는 그동안 네가 바라본 나에게서 정보를 얻으면 되잖아.”

“…….”

“원래 인생의 선택은 모든 것을 알고 하지 않아. 모든 것을 알고 하는 선택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헤아리며 자신을 믿고 끝까지 나아가보는 거야.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며 후회하지 않도록.”

아시테르의 말을 듣고 있던 크로마제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시테르를 흘겨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또 잔뜩 모르겠는 소리들만 늘어놓네. 다 됐고! 하나만 물어보자.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얼마든지.”

“이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로 내가 달란을 이길 수 있어?”

“당연하지. 그건 장담해.”

“뭘 믿고? 당… 아니 선생님은 마법도 잘 못 쓴다며?”

“그 말이 그렇게 중요하면 그냥 돌아가던지. 근데 너 내가 마법 사용하는 걸 제대로 본 적은 있어?”

아시테르가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크로마제가 인상을 잔뜩 구긴다.

고민하던 크로마제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후우…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오랫동안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스승 당신은 자기가 했던 말들은 잘 지켰던 것 같아. 다른 선생들처럼 내 기분을 맞춰주려고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잘난 맛에 허세를 부렸던 적도 없고. 무엇보다… 우리 아버지가 믿고 맡겼다고 하니 나도 따라보겠어…….”

“호오. 아닌 척해도 역시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는구나?”

“다, 당연하지. 그래도 우리 아버지인 걸…….”

크로마제가 하는 수 없이 아시테르가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게이트가 열려 있었다.

게이트를 처음 본 크로마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이건 뭐야? 이건 뭐 하는……!”

“아, 선택했으면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거라 제자야.”

탁.

아시테르가 뒤에서 크로마제를 밀어버렸다.

그러자 크로마제의 몸이 밀려나며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이곳은 아시테르가 어렸을 때 발견한 던전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서식하는 마수들이 어비스 던전에 비하면 훨씬 약한 수준이었지만, 어렸을 때 수련하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유미르나 아레나, 비체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아시테르는 이런 식으로 가족들이 모르는 비밀수련 장소들을 몇 군데 물색해 두었었다.

“자아, 그럼 나도 들어가 볼까.”

아시테르도 천천히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형편없이 널부러져 있는 크로마제의 모습이 보였다.

낯선 장소로의 이동에 크로마제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 이제 뭘 하면 돼……?”

크로마제가 아시테르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우선 첫 번째로.”

“첫 번째로……?”

“스승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법부터 배워보자.”

아시테르가 몸을 일으킨 크로마제를 한 번 더 발로 밀어버렸다.

힘에 못이긴 크로마제가 종잇장 날아가듯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으아아아―!!”

돌부리에 걸리며 몸 여기저기 상처가 난 크로마제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떨어진 건지 목을 완전히 꺾어서 올려봐야만 아시테르의 모습이 보였다.

“이씨!! 내가 누군지 몰라!? 감히 날 이딴 식으로 대할래!?!”

여기저기 느껴지는 통증에 발끈한 크로마제가 아시테르를 향해 소리쳤다.

아시테르는 그 자리에 몸을 뉘었다.

“알아. 이름은 크로마제. 스승에 대한 예의가 없는 못난 제자.”

어렸을 때 들었던 비체의 대사를 그대로 읊어주는 아시테르.

크로마제의 표정을 보며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스승의 마음이던가.

비체에게서 잘못된(?) 교육방식을 배운 아시테르의 교육은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으아!! 내가 미쳤지!! 저딴 걸 믿고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들어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크로마제가 분통을 터트리며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하지만 이제와 후회 해도 늦었다.

그때 아시테르가 크로마제의 뒤편을 가리켰다.

“너. 자꾸 그렇게 소리치지 않는 게 좋을걸?”

“뭐?”

“말 그대로야. 네가 그렇게 소리치면… 아이고… 벌써 와버렸네.”

아시테르가 크로마제 뒤편에 나타난 밤색깔의 무리를 보며 말했다.

크로마제도 아시테르가 가리킨 쪽을 돌아보았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털복숭이 무리들.

아시테르도 한 때 저녀석들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쟤네들의 이름은 보숭이들이야. 내가 붙여준 이름이긴 하지만.”

“보숭이……?”

“쟤네가 보기에는 저렇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생각보다 위험한 놈들이다?”

아시테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된다는 말은 은근히 마수들에게 어울렸다.

크로마제가 헛웃음을 보이며 돌아섰다.

“웃기지 말라 그래. 내가 그딴 말에 속을 줄 알고. 딱봐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구만…….”

크로마제가 이 정도는 가볍다는 얼굴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가 마법을 사용하자 모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아시테르가 자세를 슬쩍 고쳐잡았다.

모래 마법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사실 코볼트보다 보숭이들이 이곳으로 먼저 온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단은 크로마제의 현 위치부터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시테르는 크로마제의 마법들을 살펴보고, 크로마제는 자신의 실력을 이 던전 안에서 증명해내는 것.

그것이 우선의 목표였다.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한 번 볼까?”

아시테르는 위에서 크로마제의 실력을 지켜보기로 했다.

크로마제의 주변으로 모래가 움직였다.

모래는 채찍처럼 변하며 다가오는 보숭이들을 때렸다.

하지만 보숭이의 털은 물리적인 충격에 강했다.

녀석들은 털을 세우며 크로마제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털로 충격을 완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별다른 타격 없이 뒤로 굴러간 보숭이들이 다시 일어서서 크로마제를 향해 다가온다.

“뭐야 이것들은?”

그 모습을 보며 크로마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생긴 건 밤송이처럼 생겼는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영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크로마제가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모래로 만들어진 벽이 솟아오르며 보숭이들의 앞을 막았다.

이를 지켜보던 아시테르가 한 마디 던진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마법은 왜 쓰는 거야?”

“시, 시끄러……!”

당황한 크로마제가 황급히 손을 돌렸다.

그러자 세워졌던 모래벽이 허물어지며 그대로 보숭이들을 덮쳤다.

모래를 뒤집어쓴 보숭이들도 조금은 당황한 모습들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크로마제가 모래로 녀석들을 가둬버렸다.

성공적으로 보숭이들을 가둔 크로마제가 아시테르 쪽을 올려다보았다.

“어때?”

“저 바보가…….”

방심은 곧 화를 부른다.

크로마제는 보숭이들을 모두 모래에 가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이미 크로마제의 가까이로 다가온 보숭이들이 숨겨뒀던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었다.

스각.

샥.

보숭이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크로마제의 등을 활퀴었다.

“아악!”

느껴지는 뜨거운 통증에 크로마제가 절로 비명소리를 내고 말았다.

놀란 그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밤송이처럼 생긴 몸 안에 숨겨져 있던 두 눈이 크로마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처음 마수를 가까이서 접한 크로마제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아마 마수를 처음 접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크로마제와 비슷한 반응들을 보였을 것이다.

날카로운 발톱이 다시금 크로마제를 향해 날아든다.

머리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애석하게도 몸은 반응해주지 않았다.

촤락!

보숭이의 발톱이 크로마제의 팔뚝을 활퀴었다.

그나마 본능적인 움직임이 치명상을 면하게 해줬다.

형편없이 바닥을 뒹군 크로마제가 보숭이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집중이 깨진 탓에 모래 마법도 풀려버리고 말았다.

가둬놨던 보숭이들도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흐이… 흐이익―!”

잔뜩 겁을 집어먹은 크로마제가 마력을 방출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모래가 파도처럼 퍼지며 보숭이들을 덮쳤다.

“이, 이건 아니잖아…! 이봐 선생! 도와줘!!”

모래파도에 휩쓸려 발버둥 치는 보숭이들을 보며 크로마제가 황급히 외쳤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시테르뿐이었다.

지금은 모래파도에 휩쓸려 발버둥 칠 뿐이지만, 이 마법은 이렇다 할 데미지가 없다.

그러니 보숭이들이 언제 빠져나와 이쪽으로 다가올지 몰랐다.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한 크로마제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선생님!! 지금 뭐하냐고! 나 도와달라니까!?”

“내가 왜?”

“뭐……?”

“지가 급할 때만 선생님이구만. 그런데 어떻게 하지? 언제까지고 누가 널 지켜주진 않아. 지금 상황에서도 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게 지금 무슨 개소리야!! 나 이러다 진짜 죽게 생겼어!! 빨리 날 좀 도와달라니까?”

“응. 거절한다. 약하면 죽는 거야. 원래 세상이 그래.”

아시테르가 웃으며 크로마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싸늘한 음성에 그때서야 크로마제는 그동안 아시테르의 웃음에서 느낀 위화감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농담이지?”

“내가 농담 같은 걸 할 것 같아?”

“정말로… 정말로 안 도와준다고? 내가 저것들을 다 어떻게 막아!?”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미친…!!! 저… 저 인간 진짜로 날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야…….”

아시테르의 진심을 파악한 크로마제가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후회되는 생각들로 가득해지고 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가 여유롭게 과거 회상이나 하게 두지 않았다.

모래더미에서 빠져나온 보숭이들이 크로마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후우… 좋아… 그래, 그래!! 까짓거 누가 죽나 한 번 해보자.”

마음을 달리 하기 시작하자 크로마제의 눈빛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양손에서 마력이 흘러나오며 모래를 형성했다.

채찍 같은 걸로는 저 마수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힐 수 없다.

거기다 모래 채찍은 컨트롤이 어려운 만큼 마력의 소모도 컸다.

크로마제는 모래의 모양을 좀 더 날카롭게 다듬었다.

그러자 조금 흐물거리기는 했지만 제법 기사들의 랜스처럼 생긴 모래창이 만들어졌다.

“제기라아알!!!”

악에 받친 크로마제가 눈앞에 다가오는 보숭이를 향해 모래창을 날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