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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75화 (75/424)

075화 크로마제의 개인수련 (1)

“하아… 하아…….”

크로마제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상체를 숙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의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몸이 말을 듣질 않으니 머릿속은 점점 하얘지고 있었다.

“제기랄… 제기라알……!”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오르는데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시선이 주변을 살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보숭이들의 시체.

이렇게 마수를 접하는 것도 처음인데, 마수를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 것도 처음이었다.

처음엔 꺼림칙한 느낌도 있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꺼림칙한 느낌도 잠깐이었다.

그래도 저 좀비 같은 보숭이들에게도 피는 흐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변 땅이 보숭이들의 피로 흥건해져 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붉은색 피는 아마 자신의 것이 분명할 터였다.

보숭이들의 피는 진액 같은 초록색이었으니.

놈들에게 얼마나 당해줬는진 기억도 나질 않는다.

정신없이 마법을 사용하다보면 몸 여기저기 통증이 느껴졌었다.

그럼에도 마법은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그 순간 자신의 숨통도 끊어질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끝내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점이었다.

온몸이 고통으로 비명을 질러댔지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이겨낼 순 없었다.

털썩 주저앉은 크로마제가 계속해서 숨을 골랐다.

턱끝까지 올라온 숨은 도무지 가라앉을 생각을 안 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통증이 전해져 온다.

그래도 이상하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력… 마력이 한 줌도 남질 않았어…….”

이제 조금의 마력도 짜낼 수 없었다.

보숭이들을 해치우는 데 정말 사력을 다한 것이다.

이렇게 마력을 끝까지 사용해 본 것도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동안 마력을 다 쓴다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그 전에 멈추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으니 더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 푹 쉬거라.’

프라울리를 비롯해 개인선생들은 늘 이런 얘기를 했었다.

그러다보니 크로마제도 단 한 번도 마력이 고갈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까지 마력을 써볼 생각을 해본 적 없었던 것이다.

“이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온몸이 지치고 힘들지만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었다.

아마 마법 수련 때 이런 상황을 겪었다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크로마제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저 뿌듯하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살아남았다.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들에게서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남은 것이다.

근처 바위에 기대어 몸을 비스듬히 누우니 이제야 실감나기 시작했다.

“아… 아아…….”

왜인지 모르겠지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야가 흐려지며 절로 눈물이 흘러나온다.

“엄마… 아빠…….”

저도 모르게 불러보는 이름들.

오만가지의 감정들이 느껴지는 와중에 피곤은 점점 몰려오고 있었다.

“키케케.”

“체케.”

그때 또 다른 마수들이 크로마제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녀석들은 죽은 보숭이의 시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흘깃흘깃 크로마제쪽을 쳐다본다.

마치 상대를 파악하는 눈빛이었다.

고블린처럼 생겼지만 회색깔의 피부를 가진 조금은 다른 마수.

코볼트들이었다.

보숭이들에 비해 힘은 약하지만 어쨌거나 녀석들도 마수는 마수였다.

인간을 사냥하는데 거리낌 따위 있을 리 없었다.

녀석들이 슬금슬금 크로마제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상대가 죽어가는 지금이라면 충분히 제압하고 잡아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일까.

놈들의 눈동자엔 두려움이나 긴장감 따윈 없었다.

포식자의 눈빛.

자신을 상위 포식자라 생각한 눈빛이었다.

“하아… 하아…….”

크로마제가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렇게 바위에 기대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 놈들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마력이 없으니 마법은 쓸 수 없는 상황.

그러니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다.

몸은 이미 크로마제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아무리 힘을 주려 해도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아니 이제는 몸에 힘주는 방법도 머리가 잊어버린 듯 하다.

마력을 다 쓰면서 일어난 탈진상태를 처음 겪어보는 크로마제였기에 모든 상황이 낯설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한 가지 생각만 맴돌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로 죽는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앞에 크로마제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치닫는다.

크로마제를 향해 다가오던 코볼트들이 놀라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놈들은 계속해서 코를 킁킁 거리더니 이내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 뜻은 단 하나.

놈들에게도 위험한 상위 포식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오크보다도 상위종이라 불리는 오우거 한 마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위로 솟은 녀석의 커다란 어금니가 크로마제의 시선에 들어왔다.

“히… 히끅…….”

놀란 크로마제가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놈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크로마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이곳에서 죽는다.

오우거에게서는 무슨 수를 써도 벗어날 수 없다.

본능이 계속해서 크로마제를 향해 경고를 날리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크르르…….”

오우거가 크로마제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녀석은 주변에 널브러진 보숭이들 시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우거의 노란색 눈동자가 계속해서 크로마제에게 머물렀다.

“오… 오지마…!! 히끅!! 오지마―!!”

잔뜩 겁을 집어먹은 크로마제가 오우거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이런 크로마제의 절규는 오우거에게 또다른 희열일 뿐이었다.

놈이 크로마제를 내려다보며 웃음 짓기 시작한다.

오우거의 육중한 몸이 크로마제의 앞에서 멈춰 섰다.

“아으… 아…….”

보숭이는 그나마 밤송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괜찮았는데 이렇게 오우거와 마주하니 새삼 마수라는 생명체가 실감 나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상처 난 가죽, 커다란 어금니, 살기를 머금은 노란색 눈동자, 갈기처럼 돋아난 머리털까지.

하나하나 크로마제의 시선에 들어오며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고 있었다.

크로마제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이 커다란 공포 앞에 무력한 크로마제의 아랫도리는 본능을 이겨내지 못했다.

귀족으로서 있을 수 없는 수치이자 부끄러움이지만 지금에 이르러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크로마제는 지금 이 순간 어딘지도 모를 곳에 빌고 또 빌었다.

자신을 살려달라고.

오우거와 마주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머릿속에서만큼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빌고 또 빌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턱.

크로마제의 앞으로 뛰어내린 아시테르가 크로마제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형편없는 몰골을 본 아시테르가 입맛을 다셨다.

이런 모습을 벌써 두 번째로 보지만 그때보다 이번이 더욱 심했다.

“흐음… 이거 내가 너무 심했나.”

“트… 틀렸어…….”

그때 크로마제가 작은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이곳이 워낙 조용했기 때문에 크로마제의 말은 아시테르의 귓가에 정확히 들렸다.

“뭐가 틀렸는데?”

“대체 어쩌자고… 어쩌자고 이런 곳에 날 데려온 거야……?”

“뭔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바보같아… 우리는 이제 저 오우거 앞에 죽은 목숨일 뿐이야… 하…하하…….”

이제야 크로마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크로마제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자야. 내가 설마 감당도 못할 곳에 너를 데려왔겠어?”

“그… 그럼 우리 살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 어때? 이제야 ‘살아 있다’는 게 뭔지 조금은 느껴져?”

“아… 아아… 제발 나 좀 사… 살려줘… 나 이런 데서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어떻게 해서든 살려줘… 정말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개처럼 짖으라면 짖고 똥물을 뒤집어쓰라면 그렇게 할게…! 제발… 제발 나 좀 살려줘 선생님…….”

크로마제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늦게 내려오긴 했지만, 솔직히 크로마제가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을 줄은 아시테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겁만 조금 줄 생각이긴 했는데 생각보다 지나쳤던 것 같다.

다만 변명을 하자면 아시테르도 설마 크로마제가 저 많은 보숭이들을 쓰러트릴 줄은 몰랐다.

도중에 지쳐 나자빠지거나 도망가려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크로마제는 어떻게 해서든 수많은 보숭이들을 쓰러트려 버렸다.

예상치도 못하게 보여준 그의 의지에 놀랐고 또 그의 실력에 한 번 더 놀랐다.

어째서 그동안 그가 자기 잘난 맛에 살아왔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내려가는 것을 잊고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코볼트들이야 당장 크로마제를 향해 달려들 녀석들이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뒤늦게 발견한 오우거에 솔직히 허겁지겁 내려오고 말았다.

코볼트들과 다르게 오우거는 이곳에서 상위종에 속하는 터라 놈은 거리낌이 없었으니까.

역시나 오우거는 지금도 아시테르를 그저 먹잇감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크르…….”

그래도 갑자기 나타난 아시테르에 오우거가 조금은 경계하는 빛을 보였다.

아시테르는 그런 오우거를 무시하고 크로마제를 바라보았다.

“부디 지금 그 말과 감정들 잘 기억해두고 잊지 마.”

휘릭―!

그때 아시테르의 빈틈을 발견했다고 생각한 오우거가 팔을 뻗었다.

위험한 상황에 크로마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위험ㅎ…….”

그가 경고를 날리기도 전에 아시테르가 먼저 반응했다.

놀랍게도 아시테르는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오우거의 주먹을 피했다.

마치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 같은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아시테르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야, 내 첫 제자와 이렇게 진솔한 대화를 나누려는 아주 역사적인 자리인데 너무 배려심이 없잖아 너.”

아시테르가 팔을 뻗었다.

그러자 튕겨져나간 작은 마력탄이 오우거의 얼굴을 때렸다.

“크러!?”

오우거가 통증에 얼굴을 젖혔다.

이어 아시테르가 다시 마력탄을 발사했다.

피슉!

마력탄은 놀랍게도 질긴 오우거의 가죽에 상처를 내었다.

탄탄한 근육질의 몸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우거가 발끈했다.

놈이 거세게 포효하기 시작한다.

그저 만만한 먹잇감이라 생각했는데 감히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힌 것에 잔뜩 분노한 것이다.

그런 오우거와 마주하고 있음에도 아시테르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아시테르가 여유로운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자, 그를 바라보는 크로마제의 눈빛도 차츰 달라졌다.

솔직히 오우거의 포효를 듣는 순간 크로마제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만큼은 몸을 괴롭히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시테르는 그런 오우거의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입가엔 미소가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크로마제의 머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크로마제는 모른다.

아시테르의 진면목은 이제부터였다.

사람을 대할 때와 다르게 아시테르는 마수들에게만큼은 냉정했다.

아시테르가 고개를 들어 오우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가 내 제자를 괴롭히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난 너를 본보기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저렇게 진심으로 애원하는 제자의 의심을 슬슬 거두어 줄 때가 된 것 같거든.”

아시테르가 먼저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그의 시선이 멍하니 앉아 있는 크로마제에게로 향했다.

“크로마제. 보는 거랑 듣는 데엔 문제 없지?”

“아…? 네? 네에……!”

크로마제가 저도 모르게 말을 높여 대답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럼 됐어. 자아, 첫 번째 수업부터 시작해볼까.”

아시테르의 손에 마력이 맺혔다.

흔히 볼 수 있는 기초 마법 중 하나 마력탄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오우거에게 마력탄을 날렸다.

파앙!! 팡!!

마력탄이 부딪힐 때마다 오우거의 몸이 흔들렸다.

“잘 들어. 기초 마법이라고 해서 함부로 무시하지 마. 이게 지금부터 네가 배워야 할 진짜 기초 마법이니까 잘 봐두고.”

오우거의 큼지막한 손이 마침내 아시테르의 지척에 이르렀다.

아시테르는 아까처럼 마력탄을 쏘았다.

그러자 마력탄에 맞은 오우거의 손이 힘없이 튕겨져 나갔다.

아시테르가 다른 손을 뻗었다.

쏘아져 나간 마력탄이 나선모양으로 회전하며 오우거의 팔을 가볍게 꿰뚫어버렸다.

그 위력적인 모습에 크로마제가 두 눈을 꿈뻑거렸다.

“말도… 안 돼…….”

그가 아는 마력탄은 그저 나뭇가지나 부러트릴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이었다.

그런데 아시테르가 사용하는 마력탄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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