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스승의 가족들 (1)
아시테르를 올려다보며 크로마제도 웃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면 되는 거였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오우거를 마침내 쓰러트린 것이다.
스스로가 대견해 견딜 수 없었다.
이런 감정도 처음이었다.
“아시테르 선생님… 제가 정말… 제가 정말 오우거를 이겨낸 거죠?”
“그래. 그것도 너무 훌륭하게.”
“아아…….”
“축하한다 크로마제.”
아시테르가 크로마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크로마제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정말 잘했어. 스스로 두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거니까.”
“다 선생님 덕분이죠.”
크로마제가 아시테르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 크로마제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저어… 그런데 선생님?”
“왜?”
“아무래도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요……?”
크로마제의 말에 아시테르도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편으로 다가오고 있는 무리.
오우거 무리였다.
조금 전 쓰러트린 오우거 전사의 동료들이 틀림없었다.
그들을 본 아시테르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마.”
“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지 않나요? 저도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바뀐 크로마제의 태도를 보며 아시테르도 새삼 미소를 지었다.
예전 같았으면 죽은 목숨이라며 도망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곁에 남아 자신과 함께 싸우겠다 말하고 있다.
“아니야. 이번에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어. 마침 잘 됐다. 그동안 수련만 했더니 나도 몸이 쑤셨는데.”
아시테르가 목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이를 본 크로마제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그동안 아시테르가 열심히 수련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전면에 나선 아시테르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늘 마수와 싸우며 수련한 것은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아시테르의 실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크로마제가 자세를 달리했다.
그는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아시테르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초마법만 할 줄 아는 게 아니었지… 화염 마법사라… 과연 선생님은 어떤 마법을 보여주실까…….”
크로마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아시테르의 귀에 그의 목소리는 쏙쏙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때문에 아시테르도 살짝 고민했다.
본래라면 평소처럼 열심히 움직이며 오우거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죽일 생각이었지만 이번에는 생각을 좀 달리하기로 했다.
아시테르가 다가오는 오우거 무리 앞에 섰다.
그리곤 자신의 마력을 제한하고 있던 반지를 슬쩍 뺐다.
슈와아아―!
제한되어 있던 마력이 풀리자 아시테르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크로마제가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놀라는 것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아시테르의 마력이 곧 커다란 불꽃을 만들어내었다.
하늘로 솟은 불꽃이 사방으로 퍼지며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불꽃의 비가 다가오는 오우거 무리를 덮쳤다.
“크뤄어어!”
“그워!”
오우거들이 두 팔을 들어 불꽃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불꽃은 사그라들지 않고 오우거의 몸에 옮겨붙어 활활 타올랐다.
이 모습을 보며 크로마제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불꽃의 비가 십여 마리의 오우거들을 모두 태워버리고 있던 것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에 크로마제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살면서 이런 화염 마법은 들어보지도, 직접 본 적도 없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불꽃비라니… 말도 안 돼…….”
한 번 벌어진 입은 쉽게 다물어질 줄 몰랐다.
반면 아시테르는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손을 털어버렸다.
“별것 아니잖아?”
“대단해… 진짜 대단해요 선생님!!”
크로마제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그동안 그토록 무시해왔으니 자신의 무지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새삼 실감했다.
거기다 아시테르에게 한 번 더 반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님.”
“왜?”
“저는 진짜 선… 아니 스승님을 존경합니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한다고……?”
“그냥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저를 이렇게 새사람으로 만들어주시고… 이렇게 강하시고 멋지시고…….”
“그… 그만…….”
계속되는 아부성 발언에 아시테르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입에 걸리고 있는 미소는 감출 수 없었다.
크로마제가 아직도 불타고 있는 오우거 무리를 살폈다.
이제는 모두 숨을 거뒀는지 미동조차 없다.
오우거들을 불태우고 있는 저 불꽃은 오늘따라 더욱 붉게 타올랐다.
크로마제가 오우거들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자신은 가까스로 오우거 한 마리를 이겨냈는데 아시테르는 단 하나의 마법으로 십여 마리의 오우거를 전멸시켰다.
“하… 하하… 앞으로도 난 말 잘 들어야지.”
크로마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던전에서 본 아시테르의 모습을 상기했다.
그는 마수들에게 엄청나게 잔혹했다.
마치 마수들과 철천지원수로 지냈던 것처럼, 아시테르는 마수들에게 자비 따위란 베풀지 않았다.
보이는 족족 마수들을 학살했다.
그 모습이 지금까지 봐왔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상반되었다.
그렇기에 사실 크로마제에게 가장 두려운 상대는 어느새 아시테르가 되어 있기도 했다.
아시테르가 조용히 걸음을 옮기다 뒤를 돌아봤다.
“거기서 뭐해? 안 따라올 거야?”
“아…! 갑니다!”
크로마제가 황급히 아시테르의 뒤를 쫓았다.
아시테르는 크로마제를 데리고 이제 그만 던전에서 나왔다.
아시테르가 생각한 특훈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면 되었다.
그런데 인생이란 원래 예상치 못한 일들이 간혹 찾아오는 법이었다.
아시테르가 크로마제와 함께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반가운 목소리.
기품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아시테르가 절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반가운 인물이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어머니?”
“우리 아들이 왜 거기서 나올까? 거기다 그 꼴은 또 뭐고?”
아레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행색부터 살폈던 것이다.
그런데 길바닥에서 오래 생활한 것처럼 옷은 여기저기 헤져 있었고, 얼굴은 제대로 씻지도 않은 티가 났다.
거기다 아시테르 옆에 있는 소년도 아시테르와 별반 다르지 않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
“왜 둘 다 그런 꼴을 하고 있는 거야? 혹시 너… 가문에서 괴롭힘 받고 있니? 아니면 아카데미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 아냐?”
바구니를 옆에다 던져둔 아레나가 아시테르에게 다가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물론 아시테르가 그런 일들을 당할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지만 어머니의 마음이란 것이 그랬다.
아시테르는 아레나를 보자마자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크로마제는 뻘쭘함이 밀려와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아레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질 못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있지만, 낮고 고운 목소리의 어투가 굉장히 기품 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이분이… 스승님의 어머니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얼굴이 닮아 있었다.
아레나의 시선이 그때서야 크로마제에게로 향했다.
“저 친구는 누구니?”
“아, 제…….”
“아시테르 스승님의 제자입니다!”
크로마제가 아시테르보다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이에 아레나가 두 눈을 꿈뻑거렸다.
동그랗게 뜬 두 눈이 적지 않게 놀란 모습이었다.
“아시테르 네게… 제자가 있다고……?”
“네. 현재 루기아 가문의 개인선생으로 지내고 있거든요…….”
“뭐…? 우리 아들이 개인선생… 정말 다 컸구나…….”
아레나가 따뜻한 미소로 아시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희고 고운 손도 이제는 세월에 녹아내린 주름살이 늘어 있었다.
그때 아레나가 아시테르와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래서… 그럼 지금 널 이런 모습으로 만든 게 루기아 가문이란 얘기니?”
“아, 아니요 어머니! 그건 아니에요. 정말 아닙니다!”
“그럼 혹시 우리 아빠가 널 괴롭힌 건 아니고?”
“에이, 할아버지께선 알게 모르게 절 엄청 신경써주고 계세요!”
아시테르가 재빠르게 답하며 아레나를 안심시켰다.
그가 이토록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크로마제도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어머님의 존재는… 스승님조차 당황스럽게 만드는 구나…….”
뭣도 모르고 크로마제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만의 생각을 되뇌이고 있었다.
그동안 아레나는 아시테르와 크로마제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는 때 크로마제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아레나가 그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다.
“아이고… 못난 우리 아들 따라다니느라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었나 보네…….”
그녀는 살짝 아시테르를 흘기며 말했다.
그녀에게 아시테르가 소중한 만큼 크로마제 또한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
아레나 성격상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와요. 오늘만큼은 편히 쉬면서 맛있는 저녁도 먹게 해줄 테니까.”
그녀의 따뜻한 말에 크로마제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의 당황한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아시테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흐음… 어머니 저야 괜찮지만… 크로마제는 그동안 수련만 했기에 많이 고단한 상태일겁니다. 아마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텐…….”
“아니요! 저는 괜챃습니다!”
“뭐……?”
“정말이에요. 저는 괜찮습니다. 거기다 스승님의 가족이지 않습니까? 스승님의 가족이면 저에게도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크로마제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생각나는 대로 일단 말을 늘어놓았다.
아시테르가 그런 크로마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차 싶었던 크로마제가 턱을 긁적였다.
“아… 이건 좀 너무 간 말인가요.”
“아냐. 아니야. 그렇지 않아.”
아시테르가 피식 웃으며 크로마제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사제지간보다는 친한 형동생 같은 사이에 아레나도 그저 흐뭇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데리고 곧바로 어비스 던전으로 향했다.
어비스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아시테르가 익숙한 냄새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공기 진짜 오랜만이네요.”
“바깥 공기가 좋았지?”
“흐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에요. 이곳은 이곳 나름대로의 정감 있는 냄새가 있는 것 같아요.”
“아이고? 우리 아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어머니… 제가 언제까지 애는 아니라구요. 이제 다 컸어요 저도.”
“후후 그래그래. 그래도 넌 나에겐 아직도 어린아이로 보인단다.”
아레나와 아시테르의 대화를 들으며 크로마제가 묘한 표정을 보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를 여의었던 그로선 어머니라는 존재가 사뭇 낯설기도 했다.
늘 마음속에만,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아시테르와 아레나의 모습을 지켜보니, 복잡한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그러자 아레나의 시선이 크로마제에게로 향했다.
“우리 또다른 아들은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아?”
“예… 예에……?”
“뭘 그렇게 놀라?”
아레나의 미소에 크로마제의 마음도 덩달아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아시테르가 갖고 있는 포근함과 따뜻함이 사실은 이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는 크로마제의 착각이었다.
그녀 또한 강한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아레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정작 따로 있었다.
“아드으으을!!”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우렁찬 소리.
대기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아시테르가 귀를 틀어막았다.
“와아… 우리 아버지는 늘 기운이 넘치시는구만…….”
“니네 아버지잖아.”
“에에…? 어머니의 남편이기도 한 걸요.”
“누가 아니래.”
아레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피했다.
그녀가 자리를 피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온 유미르가 아시테르를 꽉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