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이스트 왕국의 검술
검격의 위력에 아시테르가 두 눈을 부릅떴다.
반면 판데아는 씁쓸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별 것 아닙니다.”
“예…? 이게 별 것 아니라고요……?”
“네. 그동안 마법에 치중하느라 검술의 명맥을 잃어서 그렇지… 본래 우리 가문의 검술은 이것보다 더한 위력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재능이 부족해 이 정도까지가 한계인 것 같지만요.”
판데아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 위력적인 검격을 펼치느라 상당히 많은 힘을 소모한 모양이었다.
그때 판데아가 아시테르를 보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훨씬 더 대단한 검술이었습니다. 우리 왕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스타일의 검술이더군요.”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흐음… 기본적으로 우리 왕국의 검술은 내려치는 것을 주로 삼습니다. 과거 적들이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다보니 그것들을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게 검술이라고 들었거든요.”
“호오…….”
판데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흥미로운 얘기였다.
비체는 검술에 대해 설명할 때 생존을 위해 터득한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 말했다.
그들은 흉포한 마수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날카로운 발톱을 검으로 막아내는 법을 배워야 했고, 놈들의 질긴 가죽을 베고 뚫어야 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스트 왕국의 검술은 달랐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비체의 검술과 다르게 아버지 유미르의 검술도 베는 것보다는 파괴에 가까운 검술이었다.
그의 기운이 패도적인 것도 있지만, 비체의 말에 따르면 유미르가 일부러 그 기운을 그런 쪽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시테르 선생님의 검술은 우리들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떨 땐 무서우리만치 빠르고 날카롭게 파고들면서도, 어떨 땐 부드럽게 움직이며 변칙적으로 다가옵니다. 솔직히 운이 좋아 몇 번 막아내었지 간담이 서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판데아가 아찔했던 상황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정말 단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언제 어디서 아시테르의 검이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겁니까?”
판데아는 아시테르 검뿐만 아니라 그의 움직임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시테르를 상대하며 느낀 것은 자신의 검이 아시테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의 움직임을 쫓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늘 아시테르는 자신보다 한발 먼저 움직였다.
휘두르기 전부터 자신의 공격이 아시테르에게 닿지 않을 거란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을 겪으며 판데아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아시테르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자 판데아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검술의 비전이라면 알려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실례되는 말을 한 것 같군요.”
그의 반응에 오히려 토끼눈이 된 아시테르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검술의 비전이랄 것도 없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잠시 다른 것들을 생각하느라요…….”
“다른 것이라면……?”
“마력을 검에 싣는 법. 그 마나 소드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역시…! 아시테르 선생님이라면 마나 소드에 관심을 보이실 줄 알았습니다!”
판데아가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그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떤…….”
“제가 검에 마력을 싣는 법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예에…!? 하지만 그것은…….”
“그냥 가르쳐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발전을 위한 교류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저는 아시테르 선생님의 검술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고 배워보고 싶으니까요. 혹시나 가문의 검술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꺼려지신다면 오늘처럼 가끔 대련 상대를 해주셔도 좋습니다.”
아시테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어려울 것 없는 부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이야아―!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판데아가 순수하게 기뻐하며 아시테르의 손을 붙잡았다.
손을 잡자마자 느껴지는 굳은살의 감촉.
그가 얼마나 많은 검을 휘둘렀는지 대번에 알 수 있게 해주는 삶의 감촉이었다.
사람의 손은 부드럽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아레나의 손을 붙잡았을 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늘 붙잡아오던 비체의 손은 달랐기 때문이다.
평생을 손에 검을 쥐고 살아온 그는 자갈처럼 딱딱한 손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그의 몸은 갖가지의 상처로 가득했다.
그것들을 보며 언젠가 아시테르가 말했다.
“상처가 너무 많아요 할아버지… 많이 아프셨죠…….”
“껄껄 아시테르. 이것들은 영광스러운 흔적이란다. 검사는 삶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아로새기는 법이다.”
담담하게 말하던 그 표정은 아직도 아시테르의 눈에 선했다.
잠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던 아시테르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두 분이 여기 계셨습니까!?”
그때 먼발치서 크로마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판데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보아하니 벌써부터 한바탕 하신 모양이로군요.”
“오 크로마제! 너는 프라울리님과의 대화는 잘 끝난 거야?”
“네! 물론입니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달라진 제 마법을 보여드리니까 할아버지께서도 별말씀 안 하시던 걸요?”
크로마제가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그래도 반년 동안 체력 훈련을 했다고 전과 다르게 팔뚝에 조금은 근육이 붙어 있었다.
이를 본 판데아가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녀석… 예전보다 훨씬 더 건장한 모습이 되었잖아?”
어쩌면 이게 바로 진짜 마법 같은 일이 아닐까.
그동안 판데아만 앞에 있으면 인상부터 쓰고 봤던 크로마제가 지금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리를 피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판데아에게로 크로마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들…….”
“아버지. 그동안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크로마제가 판데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인사에 오히려 판데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한평생 크로마제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니 판데아도 당황을 금치 못한 것이다.
크로마제가 판데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마음과 다르게 아버지께 모진 말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아니. 아니다. 그렇지 않아.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아라.”
“사실 아버지께서 검술을 익히고 계신 것을 알고 다른 친구들이 놀리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 녀석들과 같은 말과 행동들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에요. 실제로는 무언가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아버지를 부러워했으면서도 말이죠.”
판데아도 크로마제의 깊은 속 얘기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크로마제는 그동안 자신이 왜 그런 행동들을 해왔는지 이번 기회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부자지간에도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 아시테르가 이만 자리를 비켜주었다.
특히나 대화가 부족했던 부자지간인 만큼 이번만큼은 많은 대화를 나누며 관계가 개선되길 바랐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이제는 반년 전 그 크로마제가 아니었다.
철부지처럼 날뛰고 망나니처럼 다른 사람들이나 괴롭히던, 그런 녀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슬쩍 연무장을 나온 아시테르의 곁으로 로포가 다가왔다.
“오오 아시테르 선생님. 이곳에 계셨군요. 마련해둔 숙소에 계시지 않아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예…? 저를요?”
“네. 프라울리님께서 아시테르님을 모셔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아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아시테르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프라울리의 입에서 어떤 말들이 흘러나올지 몰랐기 때문에 아시테르도 조금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잠시 심호흡을 고른 후 아시테르는 로포의 안내에 따라 프라울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프라울리는 마련된 자리에 앉아 한쪽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프라울리님. 아시테르 선생님을 모셔왔습니다.”
“호오… 그런가.”
상념에서 깬 프라울리가 고개를 들어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살짝 긴장한 아시테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리 와서 앉게.”
차분한 목소리.
적어도 이성을 잃은 채로 노발대발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직 방심할 순 없는 노릇.
크로마제와 관련된 일이라면 순식간에 이성을 잃는 사람이 또 프라울리였기 때문에 아시테르는 자신이 앞으로 하려는 말에 조심 또 조심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정작 프라울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아시테르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고맙네.”
“예……?”
“고맙다고 말하고 있네.”
“갑자기…. 어째서 그런 말씀을…….”
“자네도 알다시피 크로마제가 태어났을 때 우리 며느리가 세상을 떠났네. 나는 솔직히 검술이나 파고 있는 아들 녀석보다 우리 며느리가 더더욱 예뻐 견딜 수 없었네. 그런 며느리가 목숨 걸고 세상에 내보낸 아이가 바로 크로마제야. 그랬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크로마제,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네.”
“네. 그 얘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후후 하지만 나의 과한 사랑이 오히려 독이 되었던 모양이야.”
프라울리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앞에 있던 물잔을 들어 프라울리가 목을 축였다.
“손자 녀석이 그러더군. 내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지나친 관심으로 만들어진 울타리가 결국 자신을 더더욱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다고. 그런데 그 울타리를 처음으로 부숴준 것이 아시테르 선생. 바로 자네라더군.”
“그 녀석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까……?”
“그렇다네. 녀석은 진심으로 자네를 따르고 있어. 오랜 세월 크로마제를 지켜봐 온 나이기 때문에 한눈에 알 수 있다. 게다가 크로마제가 자신의 개인선생을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적은 내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네. 솔직히 듣는 내가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니까.”
프라울리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그의 눈빛만큼은 확실히 전과 달라 있었다.
“내가 자네에게 고맙다고 한 것은 비단 나의 손자에게 변화를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야. 나 또한 자네에게 한 수 배운 것 같구만.”
“제가 어찌 프라울리님에게…….”
“본래 배움은 어디에서든 얻을 수 있는 법이지. 나보다 더 늙은 사람들에게서도 배울 점은 있고,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배울 점이 있는 법이니까. 과거에 내가 생각하고 또 생각해왔던 것들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게 마련이거든. 그런데 이번에 자네를 보면서 과거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네. 거기다… 우리 아들이 그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은 나도 처음 본 것 같아.”
“아들이라함은… 아…! 판데아님과 제가 검술 대련을 하는 것을 보셨던 겁니까?”
“루기아 가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내가 모를 리 없질 않느냐? 아내를 잃고 비탄의 세월을 살아오던 판데아였다. 그래서 웃음을 잃은 줄 알았는데… 어쩌면 녀석의 웃음을 앗아간 것은 나일지도 모르겠어.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내 손자의 웃음까지 잃게 할 뻔했지. 지금 그런 나를 반성 중이라네.”
멋진 사람이다.
아시테르는 프라울리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비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에 익어갈수록 더더욱 자기 고집을 뻣뻣이 드는 이들이 있다고.
자신 또한 다르지 않았던 적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는 세월에, 삶에 녹아들며 모든 일들에 무뎌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줄 아는 이가 있다면, 그들은 정말 괜찮은 사람일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프라울리를 바라보며 아시테르는 그런 비체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었다.
프라울리와 판데아, 크로마제를 생각하며 아시테르는 생각했다.
루기아 가문은 분명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