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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86화 (86/424)

086화 뜻밖의 만남과 성장

숙소로 돌아온 아시테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직원에게 들은 말은 사실 충격적이었다.

“강등처벌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어지간한 일이라면 결코 내려지지 않을 처벌이었다.

그런데 강등처벌을 당했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직원은 여기까지만 말해주고 자세한 사정은 말해주지 않았다.

사실 대회 명단을 유출한 것만으로도 아시테르에게 엄청난 호의를 베푼 셈이기 때문에 아시테르도 더는 캐물을 수 없었다.

“나중에 보면 물어봐야 하나…? 아니 근데 괜히 물어봤다가 기분 나빠하면 어떻게 하지……?”

알렌시아와 함께 팀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참가신청을 하긴 했지만, 그녀의 상황이 그다지 좋진 않아 보였다.

강등처벌까지 당했다면 알렌시아의 마음도 현재 말이 아닐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시테르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 혹시 실수한 것이 아닐까? 그냥 2등급으로 올라갔어야 했나? 아니야. 그동안 알렌시아와 제대로 된 얘기도 못해 봤는데… 이게 어떻게 온 기회인데 이걸 놓칠 순 없었잖아……!?”

뭐가 되었든 알렌시아와 함께 있고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아시테르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복잡한 생각들이 끊이질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숙소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서고 말았다.

기분이 심란할 때마다 가는 산책로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도 숲으로 들어가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있으면 머리는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힘들 때마다 어비스 던전 밖으로 나와서 숲 공기를 마셔서 그런가……?”

오랜만에 찾아왔음에도 익숙한 이 산길을 한참을 돌아다녔다.

잠시나마 머릿속을 비울 수 있어 좋았던 시간.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 아시테르가 향한 곳이 있었다.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수련장.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상당히 늦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의 경험상 이런 시간에 수련장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역시나 아시테르가 수련장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어 보였다.

“조용하니 좋네.”

먼발치서 수련장쪽을 확인한 아시테르가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려는 때 이제 보니 수련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가 보였다.

긴 머리칼을 묶은 여인은 중심부에 홀로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따라 유난히 달빛은 밝았다.

그런 달빛이 순간 그 여인만을 비추는 것처럼 보였다.

아시테르는 저도 모르게 인기척을 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달을 올려다보던 여인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시테르 쪽으로 향했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아시테르가 헛바람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을 아시테르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알렌시아…….”

늘 먼발치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여인.

그녀가 지금은 수련장에 홀로 서 있는 중이었다.

아시테르를 확인한 알렌시아가 입을 열었다.

“수련장을 이용하시려구요?”

“네. 일단은 그러기 위해 왔었습니다만, 아직 이용 중이시라면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여기가 개인수련장도 아니고, 학생들 모두가 이용하는 곳인데 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괜찮으니까 편하게 이용하세요.”

“그, 혹시나 제가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아니에요. 전혀 그런 것 없어요.”

아시테르는 알렌시아를 알아보았지만 그녀는 아시테르를 못 알아본 듯 했다.

아시테르가 쭈뼛거리며 수련장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아시테르에게 관심이 없는 듯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알렌시아를 아시테르는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달빛을 받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그녀가 더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때 알렌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생각났다. 당신 아시테르 맞죠?”

“…? 저를 알고 있어요?”

“이쪽에서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서요. 3등급의 최약체라고 이미 소문이 자자하던데.”

“아아… 그 소문을 들었군요…….”

아시테르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하필이면 제일 먼저 들어간 소문이 그것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궁금했어요. 일부러 의도해서 모든 3등급 학생들에게 패배한 건지, 그게 아니면 정말로 실력이 그만큼 부족한 건지… 게다가 보유한 마력도 적고 속성 변환도 못 한다면서요? 그럼 소문이 사실인가요?”

알렌시아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뭔가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니 아시테르도 긴장이란 것을 하고 말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아시테르도 당황스러웠다.

아시테르가 선뜻 답을 하지 않자 알렌시아가 다시 말이 이었다.

“미안해요.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아뇨, 곤란할 것까지는…….”

“그럼 다행이구요.”

아시테르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알렌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시테르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알렌시아는 이만 발걸음을 돌렸다.

“또 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잠깐이라도 대화 상대가 되어주어서 고마웠어요.”

“또 볼 수 있을 겁니다.”

아시테르의 답에 알렌시아가 웃었다.

그녀가 떠나가고 아시테르는 슬쩍 손을 올려 가슴에 대보았다.

위협적이고 무서운 마수를 마주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와아…….”

이런 경험은 또 낯설어서 아시테르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눈에는 조금 전 알렌시아의 모습이 훤했다.

잔상이 남아 계속해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이게 뭔 일이래…….”

두 손을 뺨에 가져갔다.

얼굴이 얼마나 달아올랐는지 손바닥에 따뜻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였다.

좀 더 당당한 모습으로 말을 했어야 했는데 지금에 와 아쉬움이 남는다.

“어우… 못난아…….”

스스로를 자책하며 아시테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제는 정말 수련장에 홀로 있게 되었다.

알렌시아는 그대로 돌아가버린 모양이다.

뜻밖의 만남이 아시테르를 설레게 만들었지만, 그는 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냈다.

홍수가 범람하듯 방대한 마력이 아시테르의 몸에 흐르기 시작했다.

메마른 대지에 충만한 수분이 적셔지는 것처럼 아시테르의 몸도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마력이 온몸에 흐르기 시작하면서 아시테르의 눈도 한층 총명해졌다.

“그 사이에 마력이 더 늘기라도 한 건가?”

오늘따라 마력의 흐름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는 충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차고 넘쳐 조금만 휘둘러도 마력이 폭발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시테르가 조용히 손을 뻗었다.

이 방대한 마력 중에서도 지극히 소량의 마력을 흘려냈다.

들끓는 마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마력을 컨트롤 했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모든 것을 몸속에 기억하고 뇌리에 되새기며 아시테르가 작은 불꽃을 만들어내었다.

어둠 속에 희망이 피어나듯 조금씩 타올랐던 불꽃이 조금씩 그 몸체를 키우기 시작했다.

손톱만했던 불꽃이 곧 손바닥만큼 화세(火勢)를 키우기 시작했다.

아시테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 자신의 몸집만한 불꽃을 만들어낼 순 있었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서서히 불꽃을 키워나갔다.

불꽃에 흘러 들어가는 마력들을 섬세하게 컨트롤 해나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몸체를 키우자 아시테르가 양팔을 펼쳤다.

불꽃은 양쪽으로 나뉘며 빠르게 날아갔다.

아시테르가 손끝을 올리자 불꽃은 곧 기둥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

아레나가 주로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두 개의 불꽃기둥이 아시테르의 곁에서 활활 타올랐다.

아시테르는 이대로 멈추지 않았다.

불꽃이 모두 하늘로 솟아오르자 그가 다시 마력을 움직였다.

화르륵―!

허공에 피어난 수많은 불꽃이 장관을 그리며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렸다.

불꽃의 폭우.

아시테르가 그토록 바라고 원해왔던 마법의 이상향이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불꽃의 비.

그는 처음 비를 바라봤을 때의 그 순간을, 그 느낌을, 그 감정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이 마법에 매달려왔는지 모르겠다.

바닥에 떨어져 사그라들어가는 불꽃을 보며 아시테르가 다시 마력을 움직였다.

그의 손아귀에 화염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구체가 완성되었다.

화염으로 된 구체는 놀랍게도 제자리에서 회전을 가하고 있었다.

이는 다른 이들의 마법을 바라보며 연구한 마법이었다.

회전력을 더한 화염은 더욱 폭발적인 위력을 자랑한다.

문제가 있다면 이 마법은 아시테르조차도 컨트롤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회전력을 더했기 때문에 마법의 명중도가 상당히 낮았다.

그런 점에서 아시테르는 에스파의 능력을 새삼 대단하게 여겼다.

그는 마력 화살에 회전력을 더하면서도 상당히 멀리 있는 상대에게 정확한 일격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에스파는 그런 화살을 여러 개를 만들어 동시에 쏠 수 있었다.

“하여간 진짜 대단한 녀석이라니까…….”

자신은 이렇게 하나만 만들어도 컨트롤 하는데 상당한 애를 먹었다.

아시테르가 손아귀에 만들어낸 프레임 오브(Flame orb)를 움직였다.

활활 타오르는 오브가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한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휘리링!!

화쾅―!!

비록 원하는 곳에 정확히 맞추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근접한 곳에 닿았다.

문제는 그 위력이었다.

불꽃의 폭우는 광범위한 곳을 공격하는 대신 그 위력은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프레임 오브는 회전력을 더하니 상상이상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건… 함부로 쓰면 안 되겠는 걸…….”

박살난 수련장 벽을 바라보며 아시테르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동안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루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거기다 아시테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것보다 더한 위력의 마법을 사용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은 나… 엄청나게 재능 있었던 게 아닐까……?”

죽기살기로 노력한 지난 날을 까먹은 채, 아시테르가 자신의 손아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원하는’ 마법은 이제 됐다.

이번에는 그가 ‘잘하는’ 마법을 제대로 펼쳐 볼 차례였다.

밖으로 흘러가려는 마력을 차분히 다스린다.

몸 안에 흐르는 마력들을 하나하나 느끼며 몸속에 골고루 분포한다는 느낌을 가져간다.

그리고 다른 마력으로 몸의 피부를 덧씌운다.

천천히 흐르던 마력이 아시테르의 몸을 은은하게 감싸 안기 시작했다.

그러고나면 당장이라도 바위라고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시테르가 슬쩍 몸을 움직였다.

이토록 가벼울 수가 없다.

파앙!!

발을 구르자 아시테르의 몸이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고꾸라질 뻔한 빠르기였다.

“이렇게 빨랐었나?”

식겁한 아시테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판데아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까지 응용해 보았을 뿐인데 생각 이상이었다.

“으아……!”

아시테르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겨우 단 한 번 움직였을 뿐인데 발이 퉁퉁 부어올랐다.

“이거 대체 몸에 얼마나 무리가 가는 거야……?”

어이가 없어 아시테르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표정은 지울 수 없었다.

뜻하지 않게 또 한 번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아내었다.

“그동안 몸도 상당히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했구나. 아니면 마력 컨트롤이 미숙했거나.”

아시테르는 조금 전 자신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마수가 밟고 지나간 것처럼 수련장 바닥이 음푹 파여 있었다.

그만큼 순간의 폭발력이 엄청났다는 얘기였다.

아시테르가 그 자리에서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곤 조금 전 알렌시아가 바라보았던 밤하늘을 바라다보았다.

아름답게 스스로를 빛내고 있는 달과 밤하늘에 수놓아져 있는 수많은 별들이 보였다.

“어두운 하늘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거였구나.”

이날 아시테르의 입가엔 미소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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