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르네마리아의 vvip
그때 쓰러져 있던 랫코가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숨겨놓았던 마지막 한 방.
한쪽에 모습을 감추며 대기하고 있던 칼날이 알렌시아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채고 있던 다른 한 명이 몸을 움직였다.
“수고했… 아!?”
다리를 절뚝이며 움직였던 아시테르가 넘어지는 척 알렌시아를 잡아당겼다.
슥.
빠르게 날아왔던 칼날이 아시테르의 팔뚝을 스치며 알렌시아의 뺨까지 상처냈다.
“이게 뭐야……!?”
아시테르가 잔뜩 놀란척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능청스러워도 이렇게 능청스러울 수가 없었다.
알렌시아가 눈을 부릅뜨며 랫코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랫코가 입가를 실룩거렸다.
“아쉽네. 마지막에 큰 선물 한 번 주고 갈 수 있었는데.”
진심으로 아쉽다는 말투였다.
마르드는 기절한 것처럼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알렌시아가 말없이 랫코를 내려다보았다.
“알렌시아. 그래도 조금은 아찔했지?”
“인정해. 그동안 내가 두 사람을 너무 얕봤었네.”
“기억나? 너는 나를 방어조에 보내고 마르드를 공격조에 보냈어.”
“기억하지.”
“대체 왜 그런 거야? 이유나 좀 알자.”
“마르드는 뛰어난 공격 마법을 갖고 있고, 랫코 너는 마력의 흐름을 끊을 수 있는 특이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잖아. 그러니 두 사람에게는 그 포지션이 어울려.”
“아니 틀렸어. 그런 마법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나야 뭐 솔직히 말해 공격조를 가던 방어조를 가던 상관없었지만 마르드는 달라. 저 녀석은 예전부터 남을 다치게 하는 것보다 지켜주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이었거든. 너는 그 점을 간과한 거야. 공격 마법을 잘 익히지 않은 것은 그런 성격 때문이라고.”
“내가 틀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래. 너는 네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너는 너의 입장에서만 판단하려 했을 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선 전혀 알려고 하질 않았어. 그게 다른 팀원들이 너를 싫어했던 이유고.”
“…….”
알렌시아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랫코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우연이야?”
“네?”
“방금 그것 말이야.”
“뭐가요?”
아시테르가 딴청을 피우며 모른척했다.
그러자 랫코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연이라기엔 마치 아시테르가 이미 알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었다.
“아닌가…….”
하긴, 숨겨두었던 비장의 수는 1등급 학생들이 와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마법이었다.
아시테르의 맹한 표정을 보며 랫코가 이만 고개를 저었다.
‘하긴 3등급 최약체라 불리는 저 녀석이 알아차렸을 리 없지.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인가?’
그렇다면 랫코가 생각하기에 알렌시아는 정말 더럽게 운이 좋은 여인이었다.
어쨌거나 이번 시합은 그들의 패배로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알렌시아는 쓰러트리지 못했다.
혀를 차고 있는 랫코를 향해 알렌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는 미안했다. 하지만 그때의 내 선택에 후회는 없어. 그래도 네가 말한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게.”
“의외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랫코가 이만 가보라는 듯 손짓 했다.
알렌시아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멈춰 아시테르를 돌아보았다.
“응?”
그냥 갈 줄 알았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니, 아시테르도 우뚝 멈춰 섰다.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웠어요. 덕분에 위기를 면했어요.”
“아, 딱히 제가 한 거라곤…….”
아시테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자 알렌시아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버렸다.
그때 아시테르의 시선에 붉어진 알렌시아의 귀가 보였다.
“사실은 자존심이 센 건가?”
아시테르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런 아시테르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라빈이었다.
“어휴… 자기가 무슨 취급 받는 줄도 모르고 그저 좋아하는 여자 옆에 있다고 헤벌쭉 거리고 있는 것 좀 봐.”
“아하하하! 아시테르 평소 모습인데 왜 그래?”
“조금 전 움직임… 과연 우연일까요?”
“우연일 리가 있어? 마수들의 빠른 공격도 눈으로 보고 피하는 사람이야. 거기다 아시테르 오빠는 예전부터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어. 아마 이미 알고 있었겠지.”
“하긴… 다른 학생들은 몰라도 우리는 아시테르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동안 저 녀석이 만들어온 이미지에 속지 말자.”
에스파가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라빈이 그런 에스파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무조건 저 팀을 만날 거니까 정신 바짝 차려. 최선을 다해 뭉개주자.”
“야야 그렇게까지 해야 해?”
“응. 에스파 오빠도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았어?”
“뭘?”
“전력을 다하는 아시테르 오빠와 싸워보는 것.”
“오? 그러고 보니 궁금하기도 하네… 아시테르랑은 내기 정도만 해봤지…….”
“그치? 이번 기회에 한번 겪어보자고. 적으로 만났을 때는 어떨지.”
두 사람의 얘기에 데미리우스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건 제가 먼저 겪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보다는 데미리우스 형네가 먼저 만나겠네요.”
“그래서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드디어 아시테르와 겨뤄보겠네요.”
“맞네요. 아시테르가 다른 사람들과 다 겨뤄놓고 정작 형이랑은 대결을 하지 않았었죠.”
“그때보다 훨씬 더 좋은 무대에서 싸워볼 수 있으니 만족합니다. 그쵸 브루네 씨?”
“저도 기대돼요. 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니 아시테르라는 사람이 자꾸 궁금해진다구요. 나중에 대회 끝나면 정식으로 소개 시켜주세요.”
“후후 얼마든지요.”
“근데 조금 아쉽긴 하네요. 저분이 부상 중이라.”
브루네의 말에 모두가 아시테르의 다리쪽을 쳐다보았다.
아시테르는 걸을 때 절뚝이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부상이 다 낫진 않은 모양이었다.
“뭐, 컨디션 관리하는 것도 자기능력이니까.”
“맞아. 이런 대회에 출전하려고 했으면 몸 관리 정도는 자기가 알아서 잘 했어야지.”
“저거 설마…. 알렌시아만 믿고 그냥 맘 편히 나온 것은 아니겠지?”
“에이, 아무리 아시테르 오빠라고 해도 그렇게까진… 할 수도 있겠네…. 은근히 편한 것도 추구하는 사람이니까.”
라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시합장에선 이미 다음 시합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마르드, 랫코 팀과 시합을 치른 지 이틀만에 다음 시합 날짜가 정해졌다.
다음 시합 상대의 명단을 본 아시테르가 미소를 보였다.
알렌시아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명단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번에도 확인 안 해보시는 거예요?”
“누굴 상대하든 똑같아요. 어차피 이기는 건 나예요.”
“에이 이럴 때는 ‘나’ 말고 ‘우리’라고 해주는 것은 어때요?”
알렌시아가 곱게 눈을 흘겼다.
아시테르가 딴청을 피우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래도 그동안 팀을 이루면서 다니다 보니 두 사람 사이가 전보다 편해진 것은 확실해졌다.
거기다 알렌시아도 초반의 경계심을 풀고 이제는 아시테르와 여러 얘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오늘 뭐 해요?”
“딱히. 안에 들어가서 쉴까 생각중이에요.”
“그럼 저랑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어요.”
“당신이랑요?”
“네.”
“제가 왜요?”
“그건… 우리는 한 팀이니까?”
알렌시아의 질문에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했다.
세상 순수해 보이는 웃음에 알렌시아도 못 말리겠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자신이 아시테르에게 너무 무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있던 차였다.
랫코의 말을 듣고 난 뒤 스스로도 그동안 자신이 주위에 너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 아시테르와 대화를 이어나가려 노력해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랫코가 만들어낸 작은 파문 덕분에 알렌시아의 행동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밥 한 번 같이 먹어본 적이 없네요.”
알렌시아가 못이기는 척 수락하자 오히려 놀란 것은 아시테르 쪽이었다.
사실 지나가는 말로 그냥 해본 얘기였는데 정말로 알렌시아가 받아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그러면…! 이따가 저기 르네마리아 식당 앞에서 만나기로 해요.”
“르네마리아요?”
알렌시아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르네마리아 식당은 아카데미 밖에 위치한 음식점인데, 이곳 도시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고급 식당에 속했다.
음식들도 상당히 고가라 평민이나 천민들은 쉽게 발을 들일 수도 없는 곳이었다.
때문에 혹시나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알렌시아가 그에게 다시 물어봤던 것이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르네마리아 식당이요. 그곳에서 봐요.”
“괜찮겠어요……?”
“예? 음식 먹는 건데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요?”
“아뇨…. 아니에요.”
알렌시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마리아의 음식들이 상당히 비싸긴 했지만 그래도 알렌시아가 발을 들이지 못할 정도의 식당은 아니었다.
다만 알렌시아도 음식값이 부담돼 자주 방문할 순 없는 곳이었다.
자신 때문에 아시테르가 전보다 더한 소문에 시달리고 있으니 알렌시아는 속으로 결심(?)을 내리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거기서 봐요.”
“네!”
아시테르가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알렌시아도 그런 아시테르의 표정을 보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걸로 마음의 빚은 없는 걸로…….”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아시테르는 자리를 벗어나고 없었다.
걸어가는 뒷모습은 흥이 가득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나 좋을까…….”
고개를 흔든 알렌시아도 이만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옷만 갈아입고 곧바로 르네마리아로 향했다.
입구부터 화려한 보석들로 치장된 르네마리아.
그 커다란 건물 앞에서 아시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렌시아는 그런 아시테르의 반응을 애써 외면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십시오. 혹시 미리 예약하셨습니까?”
“아니요. 예약은…….”
“네 예약했습니다.”
알렌시아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려는 때 아시테르가 뒤에서 대답했다.
이에 알렌시아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건 말건 종업원이 아시테르에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시테르입니다.”
“아아 아시테르님 일행이셨군요. 모시겠습니다.”
종업원의 시선이 아시테르를 훑었다.
바로 앞에 있는 여인은 외모도 아름다웠지만 걸치고 있는 옷가지도 고가인 옷들이었다.
그에 반해 아시테르가 걸치고 있는 옷들은 시장통에서도 싸게 살 수 있는 옷들이었다.
솔직히 말해 아시테르 혼자 왔으면 당장 의심부터 들었을 것이다.
음식값을 부담할 수 있을 만한 경제적 여력이 있는지 말이다.
그래도 함께 온 여인이 제법 있는 집 자식 같아 보였기에 종업원은 일단 자리로 안내했다.
그가 처음 1층을 지나칠 땐 알렌시아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종업원은 2층을 지나 3층도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알렌시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까지 올라가시는 건가요? 2,3층에도 자리는 많던데…….”
“예? 모르셨습니까? 아시테르님께서 예약해두신 자리는 5층입니다.”
종업원의 말에 알렌시아의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르네마리아는 층별로 가격이 다르다.
때문에 1층 정도는 부유한 평민들도 종종 방문한다.
비교적 저렴한 자릿세와 음식들이 나온다.
하지만 2층부터는 그 가격이 상당히 뛰어버린다.
사람 많은 1층은 시끄러웠기 때문에 알렌시아도 조용히 먹을 수 있는 2층이나 3층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도 조용히 식사를 즐길 수 있는 2층과 3층을 선호했다.
2층과 3층은 그다지 가격 차이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4층부터는 또다시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하지만 5층은…….”
“네 맞습니다. 르네마리아 vvip 손님들을 위한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