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화 운명의 만남
알렌시아가 조용히 아시테르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지는 것은 기분탓만은 아닐 터였다.
알렌시아 입장에서는 천민 출신인 아시테르가 이곳에서 돈을 낼 수 있을 것이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반응에 아시테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두 눈을 깜빡였다.
“하아… 이런 식으로 갚다니…….”
“뭘요?”
“아니에요.”
알렌시아의 목소리가 어쩐지 싸늘해진 느낌이었다.
그때 종업원이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요. 문제없습니다. 마저 안내 부탁드려요!”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하자 종업원이 다시 움직였다.
중간에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어쨌든 안내는 마저 끝마쳤다.
그가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를 데리고 간 곳은 창밖이 훤히 보이는 자리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알렌시아가 말문을 열었다.
“어째서 여기로 온 거예요?”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요.”
“아니 지금 그렇게 해맑게 얘기할 때예요? 여기가 얼마나 비싼 줄은 알고…….”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에게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옆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아시테르보다 알렌시아를 먼저 알아보았다.
“이게 누구야. 알렌시아 아니야?”
“아하하!! 천하의 알렌시아를 여기서 다 보네?”
옷가지를 화려하게 차려 입은 그들은 척 봐도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아시테르의 눈에도 익은 얼굴들이었다.
“너희들이 여긴 왜…….”
“왜긴 왜야. 우리도 여기서 회식하기로 했거든. 이번에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쳐서.”
“알렌시아 양도 우리와 함께 하시겠어요?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때’ 같은 팀이었잖아요?”
“맞아. 여기서 볼 줄 몰랐는데 완전 반갑네.”
네 명의 젊은 남녀가 알렌시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알렌시아의 앞에 앉아 있는 아시테르를 흘긋흘긋 쳐다보고 있었다.
2대8로 정갈하게 머리를 정리한 사내가 아시테르를 보며 대놓고 웃었다.
르네마리아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옷차림이었다.
아무 옷이나 걸쳐 입은 것 같은 아시테르의 옷차림에 사내, 브오롱이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근데 못 보던 사이에 이상한 취미가 생겼나 봐? 요즘에는 불우이웃 돕기도 하나?”
“뭐?”
“알렌시아. 너 같은 여자가 뭐가 부족해서 겨우 이런 녀석이랑 어울려 다니는 거지?”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딱 봐도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이딴 녀석이랑 어울리려고 그때 그랬냐 이 말이야.”
“말 조심해. 앞에 있는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팀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야.”
알렌시아의 말에 네 명의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알렌시아… 그러면 지금 여기 있는 이분이 아시테르 씨라는 거예요?”
“맞아. 아시테르.”
“세상에…. 듣자하니 소문이 많이 안 좋던데… 우리는 그 대회에 나가지 않아서 정확히 모르지만 이번에 알렌시아 당신이랑 팀을 이룬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서요? 알죠? 이 바닥 소문 빠른 것.”
“…….”
딱히 부정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였으니까.
아시테르는 지금까지 줄곧 알렌시아의 뒤에서만 자리해 있었다.
그렇게 만든 것이 알렌시아이기도 했지만 사실 아시테르가 나선다고 해서 그다지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마음이 참 아리송했다.
자신이 이렇게 만든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뭐야. 그 머저리 같은 기생충이 바로 이 친구였어?”
다른 사내가 거친 말투로 말했다.
다른 이들도 아시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이런 시선들에 익숙한 아시테르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아시테르…….”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알렌시아. 친구분들과 대화가 필요한 시간이라면 잠시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아시테르가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자 한 여인이 다가와 그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저희들은 그저 알렌시아가 반가워서 인사차 이쪽으로 와봤을 뿐이니까요.”
“흐음… 아니면 우리랑 합석할래요? 알렌시아의 친구면 우리들의 친구이기도 하니까.”
“어? 차라리 그럴까? 괜찮으면 그렇게 해요! 음식값도 우리가 내줄 테니까.”
알렌시아가 조심스럽게 아시테르의 눈치를 살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지인들이었다.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올라설 때 함께 팀을 이루었던 친구들.
결국 이들은 자신 때문에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알렌시아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이들은 이곳으로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고, 아시테르도 이런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아도 되었을 터다.
아시테르도 슬쩍 알렌시아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자리라 다음에 함께 할게요.”
“그래요? 에이… 아쉬운데…….”
“그러지 말고 같이 가지. 이건 흔치 않은 기회일 텐데.”
“맞아요. 앞으로 아카데미를 이끌어갈 학생들이 모이는 자리인데… 게다가 이번 모임의 주최자는 칸이에요.”
칸의 이름이 나오자 알렌시아의 표정에 잠깐 변화가 일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알렌시아과 가장 가까이서 붙어 지낸 인물이 칸이다보니 알렌시아도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말았다.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은 온전히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요. 둘이서 나눌 얘기도 있구요.”
알렌시아가 불편해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 아시테르가 다시 한 번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브오롱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네 의사가 중요하데? 뭔데 자꾸 나서는 거야? 하찮은 네놈 따위와 함께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제발 눈치 좀 챙겨라.”
“브오롱. 말 함부로 하지 마.”
“뭐!? 야 알렌시아. 지금 너 우리가 아니라 이런 거지 같은 놈을 감싸고 돌겠다는 거냐?”
“지금 나와 팀을 이루고 있는 것은 너희가 아니라 이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 팀원을 함부로 대하지마. 더 이상 불편하게 하지 말고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알렌시아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브오롱의 옆에 있던 여인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가자. 알렌시아의 말이 맞아. 이곳의 불청객은 우리야. 함부로 일 벌이지마.”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것 좀 놔봐!”
“곧 있으면 칸도 도착할 거야.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말자.”
“반가워서 찾아와봤는데 괜히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해 알렌시아.”
그들이 돌아서서 자리로 가려는 때 종업원이 맛있는 요리들을 내왔다.
한 번에 여러 요리들을 갖고 오는데 그 양이 테이블을 꽉 채울 수준이었다.
“뭐, 뭐야……?”
알렌시아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둘이서 먹기엔 너무나도 많은 양의 음식들이었다.
아시테르도 그 음식들을 보며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말은 즉, 아시테르도 잘 모르는 일이란 셈이다.
그의 표정을 읽은 알렌시아가 빠르게 종업원을 붙잡았다.
“혹시 우리가 시킨 음식이 맞나요?”
“네. 몇 가지는 그렇고 몇 가지는 더 나온 겁니다.”
“더 나왔다고요?”
“예. 저어… 그런데…….”
종업원이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머뭇거렸다.
그러자 알렌시아가 편하게 얘기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말씀하세요.”
“아시테르님은 언제 오시는 겁니까?”
“네?”
“예약도 아시테르님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이 음식들도 아시테르님이 주문하신 건데, 정작 아시테르님이 안 오신 것 같아서 여쭤봤습니다.”
그러자 한쪽에서 쿡쿡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 아시테르와 알렌시아에게 다가왔던 귀족들이었다.
종업원의 행동에 그들 모두 대놓고 비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종업원도 당황스럽겠지. 르네마리아에서 제일 비싸다는 5층에 웬 거지새끼가 와있으니.”
“근데 겉으로 보기엔 천민 출신인 것 같은데…….”
“알렌시아가 다 계산하려나 보지. 저쪽이랑 합석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우리도 덤터기 쓸 뻔했어.”
“팀이라더니… 완전 알렌시아를 멕이는 수준 아니야?”
“쉿. 조용히 해. 알렌시아에게 들리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대놓고 들으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힘입어 종업원이 다시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여기 있는 이 음식들은 다 계산할 수 있으신 겁니까?”
“지금 그게 손님한테 할 얘기인가요?”
알렌시아가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말했다.
그러자 종업원이 오히려 뻔뻔한 태도로 나왔다.
“저도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손님은 아니어도 여기 이분은 아무리 봐도…….”
종업원이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뒤늦게 아차 싶었던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억지스러운 말이었고 괜히 이곳에 있는 아시테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튀어나온 속마음이기도 했다.
세 사람의 일은 다른 이들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제가 아시테르입니다만.”
그때 아시테르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러자 종업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버렸다.
무언가를 오해한 종업원이 곧 얼굴을 붉혔다.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닙니다. 아시테르님은 분명…….”
“걱정마세요. 제가 계산할 테니 더는 시끄럽게 하지 말고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아시테르가 대답하기도 전에 알렌시아가 먼저 끼어들었다.
불편해진 상황에 종업원이 아차 싶어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다른 귀족들과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니 눈앞의 여인은 분명 그들과 같은 귀족이었다.
어디 가문의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귀족들에게만큼은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
그러면 곧바로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귀족들도 이곳을 방문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래도 종업원은 내심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미 최상의 서비스를 자랑하는 르네마리아의 명성에 누가 되는 행동을 저질렀지만, 상대가 천민처럼 보이니 다른 사람들도 애써 문제 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사실 5층에서 천민과 같은 공간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빠 할 귀족들이 분명 있었기에, 종업원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쫓아내 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역시 알렌시아의 존재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가 나서서 수습해버리니 종업원은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계단 위로 한 사내가 올라왔다.
그를 본 다른 학생들이 반갑게 걸어 나갔다.
“어서와 칸.”
가장 가까이에 있던 브오롱이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
칸은 브오롱의 손을 잡지도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종업원에게로 향해 있었다.
“오늘 이곳은 내가 다 계산할 테니 더는 시끄럽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 칸님!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고개를 숙였다.
칸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사내였다.
프로메테, 오스카, 오르페, 레프레시아, 크실리아 가문을 일컬어 이스트 왕국의 5대 가문이라고 한다.
칸은 그중 오스카 가문 가주의 아들이었다.
그러니 종업원이 칸을 모를 리 없었다.
르네마리아에서도 각별히 신경 쓰는 손님이었으니 말이다.
종업원이 물러가고 칸이 알렌시아쪽을 쳐다보았다.
“괜찮다면 함께 자리하지 않겠나.”
“미안. 지금 나는 이곳이 더 편해.”
“그렇군. 알겠다. 그렇다면 굳이 강요하진 않겠어.”
칸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 잠시 머물렀다.
아시테르도 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가 아시테르인가?”
“네.”
“그렇군.”
칸의 말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런데 칸의 뒤쪽에서 올라온 두 사람 중 한 명이 알렌시아를 보며 말했다.
“호오, 저 사람이 바로 알렌시아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