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도발
머리칼에 보랏빛이 감도는 여인이 알렌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 한 명의 미소년이 여인의 옆에 섰다.
알렌시아의 시선도 자연스레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우와! 정말 엄청 예쁘네!! 칸 오빠가 곁에 둘만 하네요.”
여인이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시테르 쪽으로 향했다.
“아니 근데 너무 극과 극 체험 아니에요? 칸 오빠랑 어울려 놀다가 등급 조금 내려갔다고 바로 저런 남자랑… 아니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간 건가?”
“베릴니아. 그런 유치한 장난은 그만해.”
“에이, 이제 재밌어지려는데 왜요? 제가 더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베릴니아라고 불린 여인이 아시테르와 알렌시아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대놓고 알렌시아를 도발했다.
“제가 이번에 1등급으로 올라가면 칸 오빠의 팀에 들어가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이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단 말이죠? 마치 당신의 빈자리를 내가 채우러 들어가는 느낌 같아서.”
“당신이 팀에 필요하니까 칸도 뽑았겠죠.”
“맞아요. 당신보다는 제가 훨씬 더 유능하겠죠. 그런데 이 찝찝한 느낌만은 지울 수가 없더라구요. 근데 이번에 하늘이 도와준 것 있죠?”
베릴니아가 손가락으로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를 가리켰다.
그리곤 웃는다.
“두 사람이 마주칠 4강 상대가 바로 우리예요. 그러니까 8강에서 떨어지지 말고 꼭 올라와요?”
그녀의 말에 아시테르가 베릴니아와 미소년을 바라보았다.
미소년도 마침 아시테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알렌시아가 베릴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 있나 봐요?”
“당연하죠. 당신은 저 혼자만으로 충분해요. 덱스는 나서지도 않을 거니까 걱정 말아요.”
“기대할게요.”
“후후 맞아요 기대 해도 좋아요.”
베릴니아가 알렌시아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칸 오빠의 옆자리엔 당신이 아닌 내가 더욱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줄게요.”
베릴니아가 알렌시아를 향해 찡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가 알렌시아에게 무슨 말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아시테르도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혹시나 4강에서 만나게 된다면 잘 부탁드릴게요.”
“그 냄새나는 손 좀 치워줄래요? 그런 손 안 잡아요. 특히나 스스로 능력도 없는 주제에 운이 좋아 다른 사람들 옆에서 빌붙어 먹는 기생충 같은 사람이랑은 더더욱.”
베릴니아는 아시테르에게 싸늘하게 한 마디 내뱉곤 뒤돌아 가버렸다.
민망해진 아시테르를 보며 여러 귀족들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때 베릴니아의 곁에 있던 덱스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드릴게요…….”
덱스가 아시테르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베릴니아의 뒤를 쫓았다.
귀족들이 모두 자리를 비키자, 알렌시아가 슬쩍 아시테르의 눈치를 봤다.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베릴니아의 조금 전 태도는 알렌시아로서도 은근한 분노가 일어났다.
그동안 아시테르에게 대부분의 귀족들이 저런 태도를 보였을 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로서도 아시테르의 눈치가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해요.”
“사과하지 말아요. 당신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이 장소를 선택한 것도 저고, 이 장소에 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우연일 뿐이에요. 거기다 제가 기분 나쁠만한 일도 없었는데 뭐가 문제죠?”
“예? 하지만 제 친구들과 저 사람이 당신에게 무례를…….”
“전혀요.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보다 친한 친구들이었어요?”
“친구라기보다는… 함께 1등급으로 올라가기 위한 동료들이었죠.”
“그렇군요. 음식 식겠어요. 먹으면서 마저 얘기를 나눌까요?”
아시테르가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조금씩 덜어내 알렌시아에게 건네주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능숙해 보여서 알렌시아도 조금은 놀랐다.
보통 천민들이나 평민 출신의 사람들은 이런 곳에 오면 으레 긴장하게 마련이다.
익숙지 않은 장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시테르는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 조금 전 같은 상황 속에서도 아시테르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원래 그렇게 강심장이에요?”
“제가요? 저 생각보다 겁이 많은 사람이에요.”
아시테르가 슬쩍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장난기 어린 모습에 알렌시아도 굳어 있던 표정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장난치지 말고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네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나 중요한가요?”
“중요하죠.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으니까요.”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제 행동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은 나에 대한 소문을 떠드는 것을 좋아할 뿐이지, 정작 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으니까요.”
아시테르가 한입 가득 고기를 베어 물며 말했다.
알렌시아는 그런 아시테르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그런 알렌시아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 아닐까요?”
“…….”
아시테르의 말이 알렌시아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가문의 요구에,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왔던 나날들이 기억 속에 스쳐 지나갔다.
알렌시아가 생각에 잠겨 있는 때 아시테르가 말을 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본인도 한때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감정 없는 인형처럼 살아온 적이 있다고. 그런데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부터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대요.”
“…….”
“결국 내 인생의 주인은 나잖아요? 스스로가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아버지를 선택할 수 있었대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본인께서 살아 있음을,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음을 매순간 느낄 수 있었다고 하셨거든요.”
“정말… 멋진 어머니를 두셨네요.”
“당신도 할 수 있어요. 부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요.”
“아뇨. 아직 저에겐 무리예요. 하지만 나중에라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알렌시아가 씁쓸한 미소를 애써 지우며 말했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아시테르도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아직 그런 깊숙한 속 얘기를 듣기에는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어떻게 아카데미에서 지내왔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아시테르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물었다.
알렌시아는 어렵지 않게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아카데미에 들어와 알렌시아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칸과 함께 팀을 꾸렸고, 2등급까지 빠른 속도로 승급할 수 있었다.
칸과 함께하기 위해 모인 동료들 모두 엘리트 코스를 밟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알렌시아뿐만 아니라 칸과 그 동료들 모두 뛰어난 능력과 실력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아카데미 내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러다 사건이 터진 것이다.
알렌시아가 팀장을 맡은 임무에서 그녀는 팀원들이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자 던전 안에 두고 가는 주장을 내놓았다.
몇몇 팀원들이 반대했지만 칸이 그녀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면서 결국 팀원을 두고 가는 쪽으로 결론이 나버렸다.
말이 좋아 두고 간 것이지 사실은 버리고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무는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그 중간 내용이 문제가 되고 말았다.
아카데미 간부회의 결과, 임무 중 동료들을 충분히 데리고 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 알렌시아 팀장은 동료들을 사지에 내버려 두고 갔기에 총책임을 지고 징계를 받았다.
그중에는 공훈을 독차지하기 위한 알렌시아의 욕심이 아니었느냐는 의혹도 있었다.
알렌시아는 이 모든 얘기들을 담담하게 얘기했다.
그녀도 딱히 회의 결과에 반감은 없어 보였다.
“그랬군요.”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 않아요. 같은 상황을 다시 마주하게 되더라도 난 똑같은 선택을 할 거니까요.”
“뭐… 사람마다 스타일은 다른 거니까요.”
아시테르의 답에 알렌시아가 입을 열었다.
“만약 당신이었다면? 당신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저는 동료들을 두고 가지 않았을 겁니다.”
“왜죠?”
“사람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없으니까요.”
“…어쩌면 우리 둘은 서로 안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알렌시아의 말에 아시테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딱히 알렌시아의 말에 부정할 필요를 못 느꼈다.
“지금까지 서로 다르게 살아왔는데 어떻게 모든 것들이 맞겠어요. 대신 함께 하다 보면 분명 서로 맞춰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거예요. 우리는 서로 다른 거지 틀린 건 아니니까요.”
“그동안 몰랐는데. 말을 꽤 잘하네요?”
“그동안은 이렇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아시테르가 웃으며 답했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식사를 이어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럴수록 알렌시아는 아시테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말도 잘할뿐더러 자신감 넘치는 그의 모습은 지켜볼수록 괜찮았다.
거기다 아시테르는 알렌시아가 홀로 곱씹게 되는 말들도 했다.
알렌시아가 아시테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기하네요.”
“뭐가요?”
“그냥… 제가 그동안 봐왔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서요.”
“글쎄요. 다들 그런 말을 하긴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네요.”
“아마 본인만 모를걸요?”
알렌시아의 말에 아시테르가 웃었다.
그 미소가 보기 좋아 알렌시아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생각보다 좋은 시간이었어요.”
“저도 좋았습니다. 역시 사람은 대화를 나눠야 해요.”
“네?”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어떤 감정들을 갖고 있는지, 어떤 생각들을 해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건… 그렇죠.”
아시테르와 알렌시아가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칸이 슬쩍 자신의 수행인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칸님.”
“알렌시아가 있던 자리의 음식 모두 계산하고 와.”
“알겠습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불편함이 없도록 잘 말하고 오고.”
“예.”
짧막한 대답과 함께 칸의 수행인이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브오롱이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칸. 왜 그렇게까지 알렌시아를 신경 쓰는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솔직히 체르도네 가문은 기울어가는 가문이잖아? 어떻게든 발악하고 있다곤 하지만 가주부터 시작해 무능한 사람들로 가득해. 그런 가문한테 도대체 뭘 기대하냐는 말이야.”
“내가 무언가를 기대하고 행동할 사람으로 보였나?”
칸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브오롱이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해.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상대가 완벽하지 않다면 내가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
칸의 말을 들은 한 여인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그 말은 꼭 칸 네가 알렌시아를 좋아하는 것처럼 들리잖아?”
“…….”
칸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다른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놀란 표정들을 보였다.
“정말로? 정말로 알렌시아를 좋아하고 있는 거야?”
“뭐… 솔직히 이상할 건 없지. 알렌시아는 실력도 뛰어난데 외모까지도 출중하잖아.”
“그래도 가문이… 좀…….”
여기저기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칸은 홀로 침묵을 지키며 술잔을 비웠다.
그의 시선은 알렌시아가 머물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