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르네마리아의 주인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는 음식값을 계산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알렌시아가 돈을 꺼내기 위해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식사는 맛있게 드셨습니까.”
좀 전에 봤던 종업원이 알렌시아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미리 계산해두었던 것을 아시테르에게 내밀었다.
천민이라면 평생 구경도 못할 액수가 그곳에 적혀 있었다.
그만큼 5층에서 먹은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리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알렌시아도 막상 적혀 있는 가격을 보니 눈가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알렌시아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액수가 나왔다.
당장 그녀가 값을 치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기에 알렌시아의 표정도 자연스레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종업원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이제 와서 음식값을 치를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정말 이 가격이 맞나요……?”
“네. 맞습니다. 저희가 설마 음식값으로 장난이라도 치겠습니까. 근데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종업원이 이번엔 아시테르쪽을 바라보았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그가 아시테르를 보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내가 이래서 불안했다니까. 척 봐도 웬 천민 나부랭이 따위가 여기 와서 음식을 먹는다고… 주제를 알아야지 주제를. 나는 너 같은 사람들을 보면 환멸을 느ㄲ…….”
턱.
그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와 돈을 내밀었다.
상대를 확인한 알렌시아가 조금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호르밀님?”
“값은 이쪽에서 치르겠습니다.”
“네? 하지만…….”
“괜찮습니다. 칸님께서 값을 치르고 오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칸님께서 말씀은 안 하셔도 알렌시아님을 아주 아끼고 계십니다. 하루 빨리 다시 칸님의 팀으로 돌아오시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아니요, 죄송하지만 이 호의는 거절하겠습니다. 더 이상 칸과 오스카 가문에게는 신세 지고 싶지 않아요.”
“신세라니 섭섭한 말씀이시군요. 신세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호르밀의 말에도 알렌시아는 단호히 그들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녀는 일단 있는 돈부터 꺼냈다.
그때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아시테르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 자리는 제가 준비했으니 제가 내면 되는데 왜들 이렇게 싸우시는 건지…….”
아시테르가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에는 값비싼 보석들과 금화가 들어 있었다.
“아……?”
“오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알렌시아는 물론 호르밀과 종업원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헐레벌떡 뛰어 올라온 중년인이 아시테르에게 곧장 다가갔다.
“아이고…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오려고 노력해봤습니다만…….”
“다녀오셨습니까!!”
종업원이 중년인을 바라보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중년인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계신 손님께 무례하게 굴거나 하진 않았겠지? 내 분명 가기 전에 최상의 서비스를 다하라고 말하고 갔는데. 서비스 음식들도 함께 가져가고.”
“예……?”
중년인의 반응에 종업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건 말건 중년인이 아시테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아시테르님. 저는 이곳 르네마리아의 주인 사르바타라고 합니다.”
알렌시아는 작금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좀 전엔 종업원이 아시테르를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더니, 그보다 더 높은 르네마리아의 주인은 아예 아시테르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죠?”
알렌시아가 호르밀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호르밀이라고 이 상황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그도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아시테르가 사르바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기 음식값은…….”
“아닙니다. 넣어주십시오. 아시테르님이라면 르네마리아의 음식을 모두 공짜로 이용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가주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아시테르님께서 르네마리아를 이용하실 거라 하니 극진히 대접해 드리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번에 아주 큰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주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사르바타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전혀 모르셨나보군요! 이곳 르네마리아의 진짜 주인은 프라울리님이십니다.”
“아!”
아시테르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사르바타가 말을 이었다.
“아시테르님께서 원하신다면 삼시 세끼 이곳에서 식사를 하셔도 좋습니다. 이곳의 모든 서비스를 자유롭게 즐기실 수 있도록 하라는 가주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사르바타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조금 전 종업원과는 아주 상반되는 태도였다.
그의 극진한 모습에 오히려 종업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아시테르가 웃으며 답했다.
반대로 종업원은 답답할 노릇이었다.
조금이라도 언질이 있었다면 이런 실수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아시테르가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낸다면 당장 무릎 꿇고 잘못이라도 빌 텐데, 아시테르는 더욱 무섭게 웃으며 괜찮다 말하고 있었다.
물론 아시테르는 정말로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평소 그가 아카데미에서 듣던 말과 행동들에 비하면 종업원이 보여준 태도는 그저 애교 수준이었다.
그때 아시테르가 사르바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사르바타님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나요?”
“예. 말씀하십시오.”
“저기 5층에 있는 분들. 저분들 모두 제 친구의 지인분들이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오늘은 저분들께도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럴 순 없죠.”
아시테르가 주머니에서 금화와 보석을 꺼냈다.
그리곤 사르바타를 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아시테르님께서 대신 값을 치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제가 제 친구에게 빚진 것이 많아서 이렇게라도 갚고 싶어서요.”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을 살핀 사르바타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금화를 가져갔다.
“그러면 저희는 이 정도만 받겠습니다.”
“네? 하지만…….”
“우리 가문도 아시테르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렇게라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하게 해주십시오.”
아시테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사르바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호르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추가로 시키는 음식과 술은 모두 무상으로 제공하겠습니다.”
“흐음, 저희야 그러면 감사한 일이지만… 정말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은인을 대우하는 저희들만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며 아시테르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렇게까지 해줄 만큼 스스로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크로마제를 가르친 것뿐인데 뭔가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는 것 같았다.
“아무렴 어때.”
어차피 이런 생각은 오래할 필요 없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아시테르도 웃으며 넘기기로 했다.
게다가 수중의 돈도 굳었으니 기분은 좋았다.
그때 사르바타가 아시테르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프라울리님의 말씀을 따로 전하고 싶습니다.”
“제게요?”
“예. 몇 가지 말들을 전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자리를 빌려도 괜찮겠습니까?”
사르바타가 알렌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가 아시테르의 일행이다보니 잠깐 양해를 구한 것이다.
다행이 알렌시아도 크게 상관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정말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사르바타는 아시테르와 함게 잠시 자리를 이동했다.
호르밀도 이곳에서의 볼일이 끝났기 때문에 알렌시아에게 인사를 건네곤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알렌시아의 곁에 있던 종업원이 울상 짓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 망했습니다…….”
“뭐가요?”
“대체 저분은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사르바타님께서 저렇게나 공손한 대접을 하시는 걸까요?”
“그건 저도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일행이시지 않습니까? 먼발치서 들으니 함께 팀을 이룬 동료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러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동료는 맞는데 저도 저 사람에 대해선 잘 몰라요.”
“그렇군요… 그래도 부디 저분께 잘 좀 말씀 드려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저도 이번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을요…….”
종업원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의 태도가 사실 알렌시아에게도 곱게 보이진 않았었다.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크게 깨달았다니.”
알렌시아는 근처 의자에 앉아 잠시 몸을 기댔다.
정말 잠깐의 시간이면 됐던 건지 아시테르가 벌써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 갈까요.”
“벌써 온 거예요?”
“네. 긴말은 아니었거든요.”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는 곧바로 르네마리아를 나왔다.
사르바타는 아시테르를 배웅하기 위해 1층 문밖까지 나와주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공손하게 대우하는 사람은 잘 없기에 다른 손님들도 한 번씩 아시테르와 알렌시아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르네마리아에서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알렌시아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르네마리아는 루기아 가문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뭘 어떻게 했길래 저곳의 주인이 이렇게까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네?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저는 그저 루기아 가문 가주님의 손자분을 열심히 가르친 것뿐이에요.”
“개인선생 뭐 그런 건가요?”
“네. 개인선생으로 갔었죠.”
“개인선생이라면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데… 루기아 가문에서 저렇게까지 해준다구요……?”
“그러니까요.”
아시테르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크로마제를 떠올리니 괜히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반년 동안 계속 붙어 있어서인지 그 사이 정이 많이 들었었다.
“근데 그 녀석…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아시테르를 보며 알렌시아도 새삼스런 시선으로 아시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아시테르가 그저 그런 사람일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겪어보면 겪어볼수록, 얘기를 나눠보면 나눠볼수록 자신의 선입견을 반성하게 되고 있었다.
“근데 원래 둔감한 편인건가…….”
“네?”
“생각할수록 이상해서요. 보통 천민 출신 학생들은 귀족들을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거든요. 그런데 당신한테선 그런 모습들이 전혀 보이질 않아요.”
“어려울 게 뭐가 있는데요?”
“네…?”
아시테르의 말에 오히려 알렌시아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또 이렇게 말을 반문할 줄 몰랐다.
그녀가 다시 생각에 잠기는 동안 아시테르도 조금 전 사르바타에게서 들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프라울리는 아시테르에게 파격적인 약속을 했다.
그가 아카데미에 머물고 있는 동안 금전적인 부담은 루기아 가문에서 다 해결해주겠다는 얘기였다.
아시테르는 그동안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루기아 가문은 이스트 왕국내에서 엄청난 부를 자랑하는 가문 중 한 곳이었다.
그러니 아시테르 한 명쯤 지원하는 것 정도는 루기아 가문 입장에서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 그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계속해서 크로마제의 스승으로 있어주는 것.
아시테르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딱히 조건이랄 것도 없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크로마제는 내 첫 제자인데.”
“네? 뭐라고 했어요?”
“아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정신 바짝 차려요. 앞으로 남은 시합도 모두 이겨야 해요.”
“물론이죠.”
“그러니까 ‘우리’ 둘 다 힘내자구요. 특히 아까 그 여자한테만큼은 절대 질 수 없어요. 알겠죠?”
“네!”
아시테르가 알렌시아를 바라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