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오랜만의 만남
르네마리아를 다녀오고 난 후로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는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때로는 알렌시아가 먼저 아시테르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이번에 우리 상대가 누구였어요?”
“드디어 다음 상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나봐요?”
“빨리 얘기해줘요.”
“이번에 우리 상대는 저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섞여 있어요.”
“네? 그게 누군데요?”
“저와 같은 팀이었던 사람이에요. 이름은 데미리우스.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 상대입니다.”
“지금 날 못 믿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알렌시아가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못 믿어서가 아니에요. 데미리우스 형의 마법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를 만들 수 있는 마법이라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변수를 만들 수 있다고요? 무슨 마법을 사용하는데요?”
“독 마법이요.”
“독……?”
“네.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요. 만에 하나 중독이라도 되면…….”
“괜찮아요. 독이 퍼지기도 전에 시합을 끝내버리겠어요.”
알렌시아의 말에 아시테르가 허허롭게 웃었다.
하여간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그래도 아시테르는 조심에 조심을 가하자는 마음이었다.
가까이서 봐왔기 때문에 데미리우스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독 마법은 아무리 알렌시아일지라도 쉽게 당해내기 힘들 터였다.
“그러고 보니 데미리우스 형과 마법을 겨루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
3등급에 머물며 데미리우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아시테르는 그와 굳이 겨루지 않았었다.
겨뤄보지 않아도 데미리우스와 자신의 차이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팀으로 합류한 이후에도 딱히 마법을 겨뤄볼 만한 일은 없었다.
승급전이 시작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점수를 채워야 했기 때문에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적으로 만나는 데미리우스 형이라… 얼마나 강하려나…….”
남몰래 미소를 지었던 아시테르는 곧 허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대회 주최측에서 대진표를 바꿔놨기 때문이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게 쓰여져 있었다.
[기입 오류]
그 외에는 어떠한 설명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런 경우도 있나요……?”
바뀐 대진표를 본 아시테르가 알렌시아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알렌시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없죠. 기입 오류라니… 지나치게 성의 없는 이유네…….”
“맞아요. 아카데미에서 치르는 커다란 대회치고 굉장히 성의 없는 이유죠. 이런 경우에는 아마 외부의 힘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뒤에서 다른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아시테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데미리우스였다.
그는 아시테르를 보자마자 미소를 보였다.
“반가워요 아시테르 대장. 그동안 뭐 하고 지냈던 거예요?”
“데미리우스 형! 잘 지냈어요?”
“저야 잘 지냈죠. 다른 팀원들도 아시테르 대장을 보고 싶어 했는데… 특히나 라빈 양은 자신에게 말도 없이 아시테르 대장 혼자서 대회에 출전했다고 상당히 삐져 있어요.”
“아… 그건 미안하게 되었어요. 저도 갑작스럽게 결정한 거라.”
“근데 왜 대회에 나온 거예요? 어차피 대장은 승급이 확정되어 있는 상태잖아요?”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줄게요.”
아시테르가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황급히 데미리우스의 말을 막으려 했다.
그런 아시테르를 보며 데미리우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왠지 그 이유가 바로 아시테르의 옆에 있는 알렌시아 때문일 것 같았다.
데미리우스는 굳이 그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나저나 아쉽게 되었네요. 이번에야말로 아시테르 대장과 한번 붙어보나 했는데.”
“꼭 이기고 올라와요 데미리우스 형. 그러면 우리 4강에서 붙을 수 있잖아요.”
“물론이죠. 그렇지 않아도 다들 아시테르 대장과 제대로 실력을 겨루고 싶어서 기대 중이에요. 저도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죠.”
“아유 제가 뭐라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잖아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러니까 한 번 적으로 상대해보고 싶은 거예요.”
데미리우스가 슬쪽 고개를 돌려 알렌시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자 알렌시아가 두 눈을 깜빡였다.
“못난 우리 대장과 함께 하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대장이요…? 근데 왜 아시테르를 대장이라고 부르는 건가요?”
“후후 그야 우리 팀의 대장이니까요. 다음에 시합에서 만났을 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요.”
데미리우스와 알렌시아가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자 데미리우스가 먼저 슬쩍 고개를 숙였다.
알렌시아도 똑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데미리우스가 이번엔 아시테르를 보며 말했다.
“결승에서는 아마 라빈 양과 에스파 군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시테르 대장이 반년 동안 안 보일 때 두 사람 모두 엄청난 수련량을 소화해냈거든요. 반년 전의 두 사람이 아니에요.”
“아아 그거 기대되는 말이네요.”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 먼발치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머, 아시테르 씨 아니에요?”
데미리우스와 함께 가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온 브루네가 아시테르를 보며 반가워했다.
멀리서만 봤지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아시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브루네를 처음 본 아시테르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3등급에서는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아시테르의 물음에 브루네가 웃으며 인사했다.
“저는 이번에 데미리우스 씨와 함께 팀을 이루게 된 브루네라고 해요. 등급은 현재 2등급이구요. 이쪽은 알렌시아 씨 맞죠?”
“네. 저를 아시나요?”
“당연하죠! 테오도라 선배네 다음으로 빠르게 1등급으로 올라간 팀이 칸과 당신이라고 들었는걸요? 다들 칸과 알렌시아 듀오의 실력은 아카데미에서 손가락 안에 들 거라고 말해요. 테오도라 선배님과 세밀리아 선배님 상대로도 결코 뒤지지 않을 거라고요.”
“그건 지나친 과찬이네요.”
“에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동안…….”
데미리우스가 손짓으로 브루네의 말을 막았다.
그는 슬쩍 아시테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시테르의 형이 테오도라인 것을 아는 사람은 데미리우스 자신뿐이었다.
브루네가 알렌시아를 띄워주려고 한 말인 것은 알지만 얘기가 길어지면 혹시나 아시테르의 기분이 상할까 싶어 미리 말을 차단한 것이다.
이를 다른 의미로 해석한 브루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그렇지 않아도 라빈과 에스파가 아시테르 씨 얘기만 해서 어떤 사람인지 무척이나 궁금했거든요.”
브루네가 해맑은 미소로 다가와 말했다.
그녀는 아시테르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근데 생각보다 훨씬 더 키가 크시네요? 얼굴도 잘생기셨고. 다만 그 잘생긴 얼굴을 제대로 꾸밀 줄을 모르시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네요.”
“예…? 예에……?”
누가 이렇게 가까이 와서 자신의 얼굴을 살핀 것은 처음이었기에 아시테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 아시테르의 반응이 귀여웠는지 브루네가 쿡쿡 거리며 웃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알렌시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려는 때 누군가 소리쳤다.
“어어!? 뭐야뭐야! 더 이상 오빠한테 접근 금지!!”
아시테르와 브루네를 발견한 라빈이 한달음에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곧바로 아시테르와 브루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라빈?”
“이봐요 아시테르 오빠.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혼자서만 이 대회에 출전할 생각을 했어요? 같이 나가달라고 했으면 내가 여기 멍청한 에스파가 아닌 오빠랑 팀을 이뤘을 것 아녜요? 나 혼자서도 다 이길 자신 있는데.”
“뭐야!? 야 근데 왜 나는 그냥 에스파고 쟤는 오빠냐?”
“불만 있어요?”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불만 같은 거. 오히려 친근감 느껴지고 좋은 것 같아.”
라빈이 에스파를 노려보자, 에스파가 꼬리를 내렸다.
지난 번 에스파가 라빈에게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에스파는 라빈에게 잡혀 지내는 중이었다.
여전한 두 사람의 대화에 아시테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라빈의 시선이 다시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동안 어디서 대체 뭘 했던 거예요? 아카데미에서는 아예 모습을 감췄더만?”
“잠시 다녀온 곳이 있었어.”
“그게 어디인데요?”
“루기아 가문.”
“네에? 루기아 가문이면 여기서도 꽤 먼 곳인데…….”
“응. 거기서 개인선생을 하고 왔어.”
“아…!? 오빠가 누구를 가르쳐요? 뭘 가르쳐줬는데요?”
라빈이 아시테르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에스파도 궁금했는지 슬쩍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데미리우스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브루네는 모든 것들이 신기했는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모두를 바라보고 있던 알렌시아는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함께해 온 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이었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서로의 일상을,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던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칸과 함께 팀을 이루었을 땐 언제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눴다.
조금 더 발전하고 나아지기 위해 어떤 점들을 고쳐야 할지, 더욱 빠르게 임무를 수행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
필요에 의한 대화들만 오갔던 것이다.
그 외의 대화들은 주로 귀족들에 관한 얘기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아시테르와 다른 팀원들은 시시콜콜한 얘기들까지 다 나누고 있었다.
무엇보다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은, 저들의 얼굴에 핀 웃음꽃이었다.
진심으로 서로를 반가워하며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 감정들이 전달되었다.
이 감정들과 분위기가 거북하게 느껴져, 알렌시아는 슬쩍 자리를 피해주었다.
아시테르가 그런 알렌시아를 발견했지만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라빈과 에스파, 데미리우스가 그를 놓고 놔주질 않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하고 오랜만에 이렇게 만났는데 곧바로 자리를 벗어나기도 미안한 상황이었다.
“알렌시아가 자리를 벗어난 것 때문에 그래요?”
“뭐?”
“오빠의 시선이 자꾸만 그쪽으로 가있잖아요.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아아… 그래도 현재 나와 팀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니까. 신경 쓰이는 것이 당연하지.”
“하긴 그렇죠. 그래서 어때요? 저 여자와 팀을 이루는 건 할 만해요? 역시 우리만한 팀원들이 없죠?”
“후후 당연하지. 너희들 모두 소중하고 좋은 팀원이야. 그건 저 사람도 마찬가지고.”
아시테르가 라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라빈은 얌전히 서서 아시테르를 올려다보았다.
에스파였다면 난리를 쳤을 테지만 아시테르가 머리를 쓰다듬을 땐 천하의 라빈도 얌전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까이서 지내봤잖아요. 지금도 저 여자 좋아해요?”
“응. 내 마음은 여전해.”
“혹시 외모만 보고 좋아하는 것 아니에요?”
“글쎄… 첫눈에 반했을 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가까이서 지내보니 지금은 다른 것 같아. 저 사람, 아닌 것 같아도 은근하게 날 신경 써주거든. 그저 표현의 방식이 다른 것이 아닐까 생각해.”
“호오… 아주 사랑꾼 납셨네.”
라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자 에스파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랑이다 사랑이야. 지금은 알렌시아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좋게만 보일걸?”
“진짜 그런다고요?”
“그래. 너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사랑 아니겠어?”
“그러는 에스파 오빠는 사랑 해봤어요?”
“나? 나는…….”
에스파가 금방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라빈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알겠어요. 아시테르 오빠가 그런 마음이라니… 저도 그럼 이제부터 알렌시아를 좋게 바라보기 위해 노력은 해볼게요. 그래도 상대로 만났을 때는 봐주지 않을 테니 각오해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데미리우스가 마지막에 한 마디 거들었다.
그들의 말에 아시테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서로 최선을 다하자. 나도 그럴 생각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