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예상치 못한 전개
아시테르와 알렌시아가 승리를 알리며 시합장에서 퇴장했다.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관중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대부분은 알렌시아의 훌륭한 전격 마법을 칭찬했지만 몇몇은 아시테르의 순발력에 감탄했다.
“방금 전에 봤어?”
“어어! 붙잡혔을 때는 알렌시아 팀도 끝인줄로만 알았는데… 설마하니 그 아시테르가 한순간에 베네피트를 제압해 버리다니…….”
“베네피트가 너무 성급했어. 아시테르가 어떤 힘을 감춰뒀을 줄 알고 그렇게 섣부르게 접근해서 붙잡아?”
“상대가 기생충 아시테르잖아. 당연히 별 것 없을 거라 생각했겠지. 설마 단숨에 자기를 제압할 수 있을만한 반전 실력을 갖고 있을 거라 예상했겠어?”
“거기다 아시테르는 다리도 다쳤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은 못 했겠지.”
“혹시 말이야… 아시테르가 이런 상황을 노린 걸까?”
관중들이 저마다의 의견들을 내놓는 동안, 한 여인도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봤어요!? 조금 전에 봤어요 아저씨?”
“네. 저도 봤습니다.”
“설마 방금 것. 일부러 노린 걸까요?”
“제 생각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니까요.”
“와… 세상에…! 그럼 조금 전 그게 저 팀의 전략이었단 말이죠!?”
“그런 것 같습니다. 제 눈에는 마치 아시테르 군이 일부러 베네피트 군에게 붙잡힌 것처럼 보였거든요.”
“일부러요?”
“예. 초반에는 은근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를 내어주지 않았는데 종반에는 알렌시아 양과 체커드 군의 싸움에 시선을 빼앗긴 척하며 베네피트의 접근을 모른 척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중년인의 설명에 여인이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그녀의 반응에 중년인이 한 차례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마 처음부터 자신 있었을 겁니다. 본인이 부상을 입은 데다 그동안 그 어떤 마법이나 실력을 보인 적이 없으니… 상대는 분명 방심하고 자신은 신경 쓰지 않을 거라 확신했을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상대도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만에 하나라는 생각을 해두었어야 했는데.”
“끝까지 조심하지 못했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도 대단하네요. 처음부터 준비한 작전은 아닌 것 같은데…….”
“맞습니다. 상대가 어떤 식으로 전투를 치르는지 확인을 하고 순간적으로 세운 작전 같습니다.”
“와… 마냥 실력 없고 민폐인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저렇게 채워버리다니… 괜히 사람이 다시 보이네요.”
“그래도 마르체니 님께서 관심을 둘만 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그런가요? 저는 저 사람이 마음에 드는데.”
마르체니의 말에 중년인, 게벨이 웃었다.
그래도 이곳에 온 덕분에 마르체니의 웃음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아저씨, 나중에 저 사람과 자리 한 번 마련해주실 수 있나요?”
“알겠습니다.”
게벨의 말에 마르체니가 만족스런 미소를 보였다.
* * *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는 대기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8강과 4강, 결승은 하루 만에 이어진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대기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때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두 남녀가 보였다.
“축하해요. 시합은 잘 봤어요.”
보랏빛 머리칼의 여인이 알렌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전에 르네마리아에서 마주쳤던 베릴니아였다.
옆에 있던 덱스가 아시테르와 알렌시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였으면 훨씬 더 쉽게 이겼을 거예요. 겨우 그런 놈들을 상대로 그렇게 고전하다니…….”
“그런가요.”
“조금만 기다려요. 다음에 시합에 우리가 당신들을 철저히 짓밟아 줄 테니까. 그때야말로 내가 바로 칸 오빠의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일 거예요.”
“어차피 지금도 당신이 칸의 옆자리에 있잖아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중요해요. 내가 당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해내지 못하면, 나는 어디까지나 당신의 대용품에 불과할 테니까. 근데 그럴 순 없잖아요?”
베릴니아가 살짝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이번엔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요?”
“네?”
“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싫어요. 능력도 없는 주제에… 남의 등에 업혀 가는 기생충 같은 놈들…….”
“귀족이면 뭐가 다르고 천민이면 뭐가 다른 건가요?”
“물론이에요. 지금까지는 알렌시아의 뒤에만 있어서 잘 몰랐나 본데. 이번에 내가 몸소 차이를 알려줄게요. 아니 그 이전에 덱스에게 먼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어쨌든 운 좋게 그거 한 건 했다고 너무 기고만장하지 말아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는 당신들에게 지지 않을 걸요.”
“아하하하!! 꼴에 자존심 부리는 거야? 이래서 천박한 천민들이랑은 눈을 마주하기도 싫다니까.”
이만 말을 마친 베릴니아가 밖으로 향했다.
덱스도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에게 한 마디 했다.
“저 사람의 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우리는 그동안 해온 것처럼 하면 돼요.”
“네.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요.”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의 얼굴을 살폈다.
싱글벙글하고 있는 얼굴을 보니 정말로 신경 쓰고 있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돌리려 했다.
그순간 알렌시아의 몸이 휘청거렸다.
“어!? 왜 그래요!?”
놀란 아시테르가 그녀의 몸을 부축해주었다.
알렌시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을 살핀 아시테르가 시선을 돌렸다.
“혹시 어디 다친 거예요?”
아시테르는 그때서야 자신의 왼손에 뜨거운 감촉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쪽을 살펴보니 붉은 피가 옷을 적시고 있었다.
“별것 아니에요.”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더욱 억센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별것 아니기는요. 어디 상처 한번 봐봐요.”
“네… 네에!?”
알렌시아가 놀랄 틈도 없이 아시테르가 그녀의 몸을 살폈다.
이제보니 알렌시아의 허벅지에 일자로 상처가 나있었다.
아까 체커드에게 당한 상처였다.
핏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는 것을 보니 상처의 깊이도 꽤 깊어 보였다.
“이걸 지금까지 참은 거예요?”
아시테르가 곧바로 자신의 옷을 찢어 알렌시아의 허벅지에 감아주었다.
그를 말리려던 알렌시아는 아시테르의 표정을 보며 그만두고 말았다.
아시테르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더 크게 다쳤을 때도 있었는데, 그 당시의 팀원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간단하게 지혈을 끝내고 나서야 아시테르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괜찮아요 아시테르.”
“안 괜찮아요. 상처가 깊으니까 곧바로 치료를 받으러 갑시다.”
“하지만 다음 시합엔 당신의 팀원이 출전하잖아요?”
“네. 그래도 지금은 알렌시아 당신의 상처가 더욱 중요해요. 어차피 데미리우스 형도 쉽게 질 사람은 아니라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잠시 실례할게요.”
아시테르가 두 손으로 알렌시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자기 몸이 들린 알렌시아가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시테르는 알렌시아를 안아 들고 곧바로 치료 마도사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의 다급한 걸음에 알렌시아의 몸이 흔들렸다.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제 목을 감아요.”
“네……?”
“두 팔로 제 목을 감으라고요. 그러면 좀 더 편안할 거예요.”
아시테르의 말에 알렌시아가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아시테르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시테르의 숨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거기다 그동안엔 몰랐던 아시테르의 탄탄한 근육들도 느껴졌다.
아시테르와 너무도 가까워진 탓인지 알렌시아의 얼굴도 점점 화끈거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귀가 하염없이 빨개지는 것도 모르고 아시테르는 곧장 치료실로 향하는데 집중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치료실 안에는 다행히 치료 마도사가 자리해 있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상처를 봐줬으면 해서요.”
아시테르가 알렌시아를 침상에 조심히 뉘여주며 말했다.
그러자 치료 마도사가 알렌시아 곁으로 다가갔다.
잠시 알렌시아의 상처를 살핀 치료 마도사가 상처 부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마력이 알렌시아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식은땀을 흘리며 굳어 있던 알렌시아의 표정도 차츰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알렌시아를 순식간에 치료해준 치료 마도사가 아시테르에게 치료약을 건넸다.
“혹시 모르니까 이 치료약까지 함께 복용하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아시테르가 약을 받아들고 알렌시아를 바라보았다.
한결 표정이 나아진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더 누워있지 않고 왜 벌써 일어나요?”
“가서 시합 봐야죠.”
“괜찮겠어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이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알렌시아는 곧바로 치료실의 문을 나섰다.
하는 수 없이 아시테르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곧바로 선수 대기실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시합장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는 선수대기실에 도착해 시합장을 내려보자마자 얼굴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이게 무슨…….”
아시테르가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합장에는 쓰러진 브루네와 피투성이가 된 데미리우스가 있었다.
덱스가 팔을 뻗자 무언가가 움직였다.
“저건, 인형……?”
날카로운 칼날을 거머쥔 인형이 데미리우스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촤륵!
인형의 검이 데미리우스의 팔을 베었다.
이어 다른 인형이 데미리우스의 다리를 붙잡았다.
이를 본 브루네가 양 팔을 부르르 떨었다.
베릴니아의 마법도 무시무시했지만 덱스의 마법은 더욱 무서웠다.
데미리우스의 마법은 독.
안타깝게도 독 마법은 인형에게 통하지 않았다.
인형은 데미리우스가 만들어낸 독무 안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였다.
이를 막기 위해 베릴니아가 마법을 펼쳤지만, 이마저도 베릴니아에게 간단히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게 뭐야? 너무 싱겁잖아요? 대체 이런 실력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거예요?”
베릴니아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데미리우스의 위로 올라탔다.
“흐읍……!”
데미리우스가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베릴니아가 그를 쓰다듬었다.
“너무 애쓸 것 없어요. 그나저나… 재밌는 얘기를 들었는데 말이죠. 당신들 둘, 아시테르랑 알렌시아와도 관련이 있다면서요?”
“아시테르는 우리 팀의 대장입니다. 알렌시아 씨는 대장의 동료고.”
“나참, 그런 쓰레기 같은 기생충을 대장으로 여긴다고요? 당신들도 진짜 한심하네요. 그 팀의 수준이 얼마나 떨어지는진 안 봐도 알겠어요. 그치 덱스?”
베릴니아가 덱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덱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베릴니아의 말을 들은 데미리우스가 크게 웃었다.
평소 조용하던 그가 이렇게 웃는 모습은 꽤나 낯선 장면이었다.
데미리우스의 눈동자가 베릴니아를 향했다.
“아시테르를 모욕하지 말아주십시오.”
“아하하하!! 실력은 없으면서 그래도 같은 팀원을 욕하니까 기분이 나쁘긴 한가 봐요?”
“상대에 대한 존중도 없으신 겁니까?”
“존중도 상대를 봐가면서 하는 것뿐이에요. 냄새나는 천민 따위를 내가 왜요?”
“글쎄요… 악취가 나는 것은 오히려 당신 같은데요.”
“뭐……?”
“귀족 특유의 썩은 내가 진동합니다.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이 싫어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었는데 말이죠.”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