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트라우마 극복기 (1)
베릴니아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데미리우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웃는다.
“후후 그래요. 맘대로 생각하세요. 그 기대와 생각들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보게 될 테니까.”
“저도 한 마디 하지요.”
데미리우스의 말에 베릴니아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위쪽에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우리 아시테르 대장을 너무 무시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생각 이상인 일들을 해내는 사람이거든요.”
“네네. 그건 당신네들 수준에서나 그렇겠죠. 더 이상 영양가 없는 대화는 생략하죠.”
베릴니아가 재미없다는 투로 몸을 일으켰다.
덱스가 인형을 거두어들였다.
데미리우스가 심판을 불렀다.
“항복하겠습니다.”
데미리우스의 항복 선언으로 시합이 종료되었다.
덱스와 베릴니아를 향한 관중들의 뜨거운 환호가 이어졌다.
말은 안 해도 데미리우스 또한 이 대회에서 주목받는 신예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데미리우스를 압도적인 실력으로 이겼으니 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베릴니아가 시합장을 나서기 전 아시테르가 있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아시테르도 마침 그녀와 덱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려요. 다음엔 당신과 알렌시아 차례니까.”
베릴니아가 아시테르를 보며 웃어보였다.
아시테르도 그런 베릴니아를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들것에 실린 데미리우스와 브루네에게 치료 마도사가 붙었다.
덱스의 공격이 생각보다 거칠었기 때문에 브루네와 데미리우스의 부상도 심각했다.
“괜찮으십니까 브루네?”
“네. 그나저나… 상성이 너무 안 좋았네요…….”
“후후 그러게요. 설마하니 인형술사가 있었을 줄이야…….”
“독이 통하질 않는 상대이니…….”
“뭐… 어차피 인형술사 친구가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 옆에 있는 여자분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였으니까요.”
“하긴… 빙결 마법은 진짜 무서웠어요…….”
브루네가 다시 한 번 몸서리치며 말했다.
베릴니아는 실력 없이 입만 떠드는 인물은 아니었다.
분명 그녀는 말만큼이나 실력도 겸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나저나 죄송하네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팀을 이루었다면 브루네 씨도 더 높은 성적을 거두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데미리우스 씨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게다가 처음부터 데미리우스 당신의 마법이 이런 대회에서는 강점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제가 그 단점을 보완해드렸어야 했는데..”
“그래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두 사람.”
데미리우스의 웃음에 브루네도 미소를 보였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니 데미리우스로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찮아요?”
시합 대기실에서 다급히 달려 내려온 아시테르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아시테르의 얼굴을 확인한 데미리우스가 아쉬운 얼굴을 보였다.
“꼭 시합장에서 만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보다 두 사람의 몸 상태는…….”
“며칠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이번 대회에 함께 하는 치료 마도사분들도 워낙 실력 좋으신 분들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맞아요. 우리는 걱정 말아요.”
두 사람의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리우스가 그런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준결승에서 만날 순 없게 되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우리 몫까지 힘내서 꼭 베릴니아 씨 팀을 이겨주십시오.”
“물론이죠.”
“복수해줄게요.”
아시테르의 뒤에서도 대답이 흘러나왔다.
알렌시아의 목소리였다.
복수라는 단어에 데미리우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렌시아를 바라보는 브루네의 눈빛은 이미 반해 있었다.
“어차피 그 여자가 목적은 저를 이기는 거예요. 그러니 알려줘야죠. 그 여자와 나의 진짜 실력차이를.”
“와아… 역시 멋있어.”
아시테르가 알렌시아를 향해 엄지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데미리우스와 브루네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알렌시아는 분명 조금 전 아시테르의 굳은 얼굴을 보았다.
지금까지 그런 얼굴을 보였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서 그때의 아시테르 얼굴이 쉽게 지워지질 않았다.
“꼭 지켜봐요. 제가 그들을 어떻게 이기는지.”
자신이 말해놓고도 알렌시아는 스스로가 왜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저 이런 말들을 해서 저들을 안심시켜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밖에서는 시합이 한창이었는지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곧 4강도 진행되겠군요. B조의 경기가 모두 끝났으니.”
“그러네요.”
“이번 4강 첫 경기에 당신의 동료들도 나오지 않나요?”
“맞아요. 서둘러서 보러 가야겠네요.”
아시테르가 몸을 일으켰다.
알렌시아도 함께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데미리우스와 브루네에게 인사를 건네고 시합장으로 향했다.
“이름이 라빈과 에스파라고 했죠?”
“네?”
“이번 시합에 나서는 당신의 팀원들 말이에요.”
“네 맞아요.”
“데미리우스 씨는 정확히 보지 못했지만. 라빈과 에스파는 어때요?”
“강해요 두 사람 다.”
“흐음… 그래도 이번 상대는 만만치 않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번에 4강에 올라선 다른 한 팀. 그쪽은 저도 잘 아는 인물들이에요.”
“누군데요?”
“한 명은 체레드. 다른 한 명은 에이브릴이에요.”
* * *
“호오… 이게 누구야. 얼간이 에스파 아니야?”
시합장에 들어서자마자 체레드가 에스파를 알아보며 말했다.
그의 옆에는 차가운 인상의 여인, 에이브릴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을 보자마자 에스파가 마른 침을 삼켰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체레드와 에이브릴을 마주하니 과거의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손을 떠는 에스파를 보며 체레드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상대가 벌써부터 저렇게 겁을 집어먹고 있으니, 이번 시합은 한결 수월할 터였다.
“그래. 너는 그런 모습이 어울린다니까 에스파. 요즘 우리가 곁에 없다고 실실 웃고 다니는 꼬라지가 얼마나 보기 역겨웠는지 알아?”
에스파가 체레드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딱!
라빈이 그런 에스파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쳐 버렸다.
“억!”
“아, 내가 그런 한심한 모습 보이지 말라고 했지?”
“미… 미안해…….”
“그리고 또 하나. 아시테르 오빠가 아무데나 가서 고개 그렇게 숙이지 말라고 했잖아.”
라빈이 이번엔 에스파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에스파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상대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체레드보다 에이브릴의 시선을 피하는 느낌이었다.
이를 눈치 챈 라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빈의 시선이 에이브릴에게로 향했다.
“대체 이 오빠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야 ‘언니’?”
“오랜만이네.”
“오랜만은 무슨.”
라빈과 에이브릴의 대화에 에스파의 두 눈이 커졌다.
척 봐도 서로 알고 있는 사이 같았던 것이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응. 그것도 아주 잘 아는 사이지.”
“뭐? 어떻게?”
“그야. 내 언니니까. 친언니는 아니지만.”
라빈의 말에 충격받은 것은 에스파뿐만이 아닌 듯 했다.
옆에 있던 체레드도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이브릴에게 동생이 있었다고?”
“네네. 제가 바로 그 동생이랍니다아.”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들어본 적 없겠죠. 내 존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안 그래 언니?”
“…….”
에이브릴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것을 본 에스파가 또다시 마른 침을 삼켰다.
이를 본 라빈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에스파 오빠. 혹시라도 아무것도 못 하고 바보같이 서 있기만 할 거면 일찌감치 저리 비켜 있어. 거추장스러우니까.”
“그, 그럴까…? 나 몸이 잘 안 움직이는데… 이제 보니 약간 몸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하아. 진짜 머저리같이 그럴 거야? 언제는 이 트라우마를 극복해내고 싶다면서?”
“그건 그런데…….”
“지금이 바로 그 기회잖아 바보 같은 오빠야. 언제까지 그런 못난 모습 보이고 살래? 지금까지 죽기 살기로 노력해왔잖아. 좀 더 스스로를 믿으란 말이야.”
“나도 알아. 나도 아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는 걸 어떻게 해…….”
“마음의 문제야. 마음! 마음이 먼저 이겨내면 몸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라고.”
라빈이 에스파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에스파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다.
마음이 이겨내야 몸도 따라준다.
하지만 지금은 완벽히 몸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라빈이 경직되어 있는 에스파의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또 도망칠 거면 그렇게 해. 근데 그건 알아둬. 도망친다고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언제까지고 마음에 남아 오빠를 괴롭힐 거야. 저 사람들도 계속해서 오빠를 그런 멍청이로 보겠지. 그게 싫으면 용기내서 마주해.”
“…….”
“그때 아시테르 오빠가 말했잖아. 정말로 두려운 상황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려 하는 게 용기라고. 그 정도 용기는 보여줘야 앞으로 아시테르 오빠의 옆을 지킬 수 있지 않겠어? 언제는 아시테르 오빠가 자신을 좀 더 믿고 의지해줬으면 좋겠다며? 그런데 고작 이런 꼴을 보이는 아시테르 오빠가 오빠를 믿고 의지할 수 있겠어?”
“…없겠지.”
“잘 아네. 그러니까 이딴 한심한 모습은 오늘로 버려버려. 오빠가 워낙 한심하고 모자른 건 맞는데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 저기 있는 쭉정이 같은 놈보다는 오빠가 훨씬 더 강해.”
“야… 넌 그게 칭찬이야 아니면 욕이야……?”
에스파가 라빈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그녀 덕분에 한층 긴장이 풀렸다.
경직되어 움직이지 않던 몸도 서서히 움직여주고 있었다.
“누구보다 오빠가 더 잘 알잖아.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 잘 알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빠는 강해. 그동안 누구보다 노력해 왔잖아. 그건 내가 지켜봐 와서 잘 알아. 그러니까 스스로를 좀 더 믿어. 알겠어?”
“그래!!”
라빈의 말에 에스파가 힘차게 대답했다.
두 사람을 보며 체레드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쟤네 둘이 뭐 하는 거야?”
“최선을 다해 끝낸다. 체레드.”
“그럴 필요까지 있나? 어차피 상대는 얼간이 에스파잖아?”
“누구를 만나던 최선을 다해.”
“역시 동생에게도 냉정하구나.”
“저런 하등한 핏줄을 내 동생으로 인정한 적 없어.”
에이브릴의 말에 라빈이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에이브릴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여전한가 보구나? 약자는 멸시하는 것.”
“나는 약한 존재가 싫어. 그건 너도 포함이야. 뭐 하러 세상 밖으로 기어나온 거야? 가문에 박혀 있을 것이지.”
“하아… 이 언니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그리고, 누가 그래? 내가 너보다 약하다고?”
라빈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러자 에이브릴이 차갑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럼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몰랐어?”
“아하하!! 그거 재밌는 얘기네. 나한테 매번 졌던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잊었어?”
“풉…!! 언니 진짜 바보구나?”
라빈이 배꼽을 잡으며 크게 웃어젖혔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한번 에스파에게로 꽂혔다.
“근데 에스파 오빠는 왜 그렇게 괴롭힌 거야? 이유나 들어보자.”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올려다봤으니까?”
“그게 뭔 말이야? 뭐가 오르지 못할 나무인데?”
그녀의 질문에 에이브릴이 에스파를 쳐다봤다.
마치 직접 얘기해보라는 눈빛이었다.
이에 에스파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에이브릴을 좋아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