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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99화 (99/424)

099화 트라우마 극복기 (2)

“뭐어어어어―!!?”

라빈이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소리치고 말았다.

덕분에 시합을 준비 중이던 다른 사람들도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왜!? 뭐 때문에?”

라빈이 에스파의 가까이로 다가가 물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

에스파가 슬쩍 에이브릴을 쳐다보며 말했다.

“예쁘잖아. 거기다 마법 실력도 뛰어나고.”

“근데 성격은 지랄 맞잖아? 성격은 안 보는 거야? 그냥 예쁘면 다야?”

“그때는 잘 몰랐어…….”

에스파의 말에 라빈이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 있었다.

라빈이 고개를 돌려 에이브릴을 쳐다보았다.

“뭐야? 근데 이게 왜?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마음은 가질 수 있는 것 아냐?”

“나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야. 주제를 알아야지. 거기다 멋대로 함께하고 싶다 찾아와선 나의 앞길까지 방해했어. 이것만으로 이유는 충분하지 않아?”

“하아, 내가 왜 알렌시아를 보고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했는데 이제 알겠다. 바로 너 때문이었구나. 너랑 비슷한 면이 보여서.”

라빈의 시선이 이번엔 체레드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체레드가 슬쩍 웃어보였다.

“뭘 실실 쪼개? 당신은 왜 에스파 오빠를 괴롭힌 건데?”

“그냥. 재밌었으니까?”

“뭐……?”

“아무것도 못하는 쓰레기가 내 발밑에서 발버둥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흥분되고 재밌잖아?”

“야. 너 말 다 했냐?”

라빈의 눈초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를 본 체레드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저 쓰레기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왜 이딴 일에 그렇게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네.”

“너…….”

삐이이익―!

라빈이 체레드에게 뭐라 말을 하려는 때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라빈의 시선이 체레드에게로 꽂혔다.

“재밌어서 괴롭혔다고? 고작 그딴 이유로?”

그녀의 전신에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체레드가 그런 라빈을 보며 조소를 흘렸다.

“그래.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그의 주변으로 수은 방울들이 떠올랐다.

이어 에이브릴에게서 두 개의 사슬이 뻗어나왔다.

두 사람의 마법을 본 에스파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머리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정작 몸은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수은 마법과 사슬 마법을 보자마자 과거의 기억들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멈췄던 손의 떨림이 다시 격하게 시작되었다.

“아아…….”

두려움.

공포.

불안감.

갖가지의 감정들이 파도처럼 한꺼번에 밀려와 에스파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게 자리했는지 에스파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긴장된 배는 통증까지 일으켰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라빈에게로 향했다.

“미… 미안해 라빈. 나…….”

“아무 말 하지 마. 그냥 거기 두 발 똑바로 딛고만 서 있어. 주저앉거나 고개 숙이지도 마. 똑바로 이 싸움을 응시해. 그게 지금부터 오빠의 싸움이야 알겠어?”

“으응… 도움이 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됐어. 이럴 때 도와주라고 있는 게 동료고 친구지 뭐.”

라빈은 에스파가 안심할 수 있도록 일부러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체레드와 에이브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라빈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체레드가 수은 방울들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 되었네. 하필 같이 팀을 이룬 게 저런 놈이라니. 근데 뭐 어쩌겠어. 그게 네 운인걸.”

“너 같이 인성 빻은 놈보다야 에스파 오빠가 훨씬 더 낫지.”

“뭐… 뭐라고……?”

체레드가 인상을 구겼다.

에이브릴이 라빈을 향해 말했다.

“지금이라도 항복해. 어차피 너 혼자서는 우리 못 이겨.”

“하아… 진짜 개빡치네. 아시테르 오빠가 욕하지 말랬는데 욕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니까.”

두두둑!

라빈이 손을 뻗자 그녀의 몸에서 커다란 뼈가 튀어나왔다.

그 기괴한 광경에 관중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기저기 비명이 터져나왔다.

놀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체레드와 에이브릴, 두 사람도 너무 놀라 토끼 눈이 되어 있었다.

“야 언니야. 너도 내 마법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겠다?”

커다란 뼈를 거머쥔 라빈이 싸늘하게 웃어보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체레드가 수은 방울을 날렸다.

라빈이 뼈를 휘둘러 가볍게 수은 방울들을 막아내었다.

에이브릴의 손짓에 따라 사슬이 움직였다.

두 개의 사슬은 빠르게 뻗어나가 라빈의 움직임을 묶으려 했다.

휘릭!

탁.

라빈은 가벼운 움직임으로 사슬들을 피해냈다.

그 움직임에 많은 관중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결국 마법을 드러냈구나.”

먼발치서 홀로 시합을 보고 있던 사내, 자비토가 홀로 중얼거렸다.

그는 라빈의 마법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자비토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긴장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뼈를 휘두르는 라빈을 보며 관중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반응들 때문에라도 그동안 레프레시아 가문에선 라빈의 존재와 마법을 감춰왔으리라.

그래도 이렇게나마 라빈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알릴 수 있게 되어 자비토는 홀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래. 가문의 감옥 속에 갇혀 있기에는 네 존재가 아깝긴 하지.”

라빈은 체레드와 에이브릴 두 사람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싸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두 사람을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캉!!

사슬을 쳐낸 라빈이 곧바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수은 화살이 라빈의 곁을 스쳤다.

라빈이 체레드를 향해 뼈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뼈에서 쏟아져나간 뼛조각들이 체레드를 노렸다.

“헙!?”

놀란 체레드가 반응하기도 전에 옆에서 날아온 사슬이 뼛조각들을 막아주었다.

에이브릴의 사슬이었다.

“고… 고마워 에이브릴.”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마.”

“알겠어.”

체레드가 옆에 수은 덩어리를 형성해내었다.

이어 그가 다시 수은을 움직여 라빈을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드드득!!

라빈의 피부를 뚫고 튀어나온 뼈가 몸집을 불리며 커다란 방패를 만들어내었다.

“뭐 저딴 마법이 다 있어?!”

체레드가 놀라 소리쳤다.

반면 에이브릴은 조용히 라빈의 빈틈을 찾았다.

그녀의 사슬이 대지쪽에 낮게 깔리며 날아갔다.

라빈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청!!

그녀가 대지에 뼈를 꽂으며 사슬들을 그대로 묶어버렸다.

이어 사슬을 밟고 단숨에 에이브릴과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

“어림없지!”

체레드가 수은 방패를 만들어 에이브릴에게로 가져갔다.

그 순간 라빈이 들고 있던 뼈를 휘둘렀다.

슈슉! 슉!!

뼈에서 튀어나간 뼛조각이 또다시 체레드를 노렸다.

놀란 체레드가 수은 방패를 다시 가져왔다.

파방! 팍!

뼛조각이 그대로 수은 방패에 박혔다.

그 사이 라빈은 에이브릴의 지근거리까지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후웅!!

그녀가 에이브릴을 향해 있는 힘껏 뼈를 휘둘렀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라빈의 뼈를 막아내었다.

“호오. 그 사이에 다룰 수 있는 사슬이 더 늘어났네?”

“건방지게 굴지 마.”

“아쉽네. 그 도도한 얼굴에 시원하게 한 방 갈기고 싶었는데.”

라빈이 몸을 튕기며 에이브릴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단숨에 거리를 조절하는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관중들은 넋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들 틈에 섞여 있던 마르체니가 두 눈동자를 빛냈다.

“우와…! 방금 봤어요 아저씨?”

“네.”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요? 대단해요…! 저것도 마법인가요?”

“요즘에는 보기 드문 근접 전투형의 마도사로군요.”

게벨이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확실히 이스트 왕국에선 많이 사라진 타입의 마도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라빈의 존재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뼈를 사용하는 기괴한 마법에다 근접전까지 가능한 마도사.

이는 시합을 보러 온 다른 윗선의 마도사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게벨의 생각은 정확했다.

상석에서 지켜보던 마법기사단장 중 한 명인 아그리나 단장이 그녀를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밌는 아이네.”

“그러게요. 저렇게 화끈한 방식으로 싸우는 마도사는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마력을 컨트롤 하는 것도 제법이야. 근데 아직 2등급이라고?”

“네. 함께 팀을 이루는 녀석들이 영 시원치 않은 모양입니다.”

“뭐, 그건 상관없어. 어차피 저 아이는 곧 1등급으로 올라올 아이니까.”

“저도 그 생각엔 동의합니다.”

“저 아이에 대해 알아봐. 드래프트에 올라오면 바로 데려갈까 하니까.”

“네!”

아그리나의 말에 곁에 있던 수하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여인이 입을 열었다.

“웬일이십니까? 아그리나 단장님께서 먼저 관심을 보이고.”

“너도 저 아이가 탐나나?”

“아닙니다. 저는 먼저 관심을 둔 친구가 있어서요.”

“그래. 그러면 됐다.”

“저 아이도 운이 좋네요. 들장미 기사단장께서 눈독을 들이시다니.”

아그리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시합장을 내려다보았다.

라빈은 뼈를 휘두르며 에이브릴과 체레드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미 뼛조각에 몇 번 당한 체레드가 핏물을 흘리고 있었다.

반면 에이브릴은 멀쩡한 상태로 사슬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두 사람을 상대로 호각 이상을 이루고 있는 라빈을 보며 에스파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뭐 하냐 에스파… 지금 여기까지 와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에스파……!”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핏물이 흘러내렸다.

에스파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퍽! 퍽!

그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얼마나 긴장한 것인지 다리에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동안에도 라빈은 에이브릴과 체레드, 두 사람을 상대로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방해만 될 순 없잖아…! 그럴 순 없다고!!”

에스파가 울부짖다시피 하며 소리를 질러대었다.

그가 갑자기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는 관중들은 여기저기 수군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맞아요! 전 시합 때처럼 멋지게 화살을 쏴달라고요!!”

“나는 당신 시합 보려고 아직 집에도 안 가고 여기 있는 거야!”

“아까 그 멋진 활 실력 좀 보여달라고!!”

에스파의 근처에 앉아 있던 관중들이 소리쳤다.

그제서야 에스파가 관중들을 둘러보았다.

라빈과 에이브릴, 체레드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에스파를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에게 에스파의 시선이 꽂혔다.

“힘내라 아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입모양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본 에스파가 이를 악물었다.

“이겨낼 수 있다. 이겨낼 수 있다. 이겨내자. 이겨냈다.”

스스로의 말을 되뇌이고 곱씹는다.

감정이 사람을 속이듯, 자신도 감정을 속일 수 있다.

그렇게 에스파가 천천히 굽었던 몸부터 일으켰다.

그는 가슴을 활짝 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금 이 순간, 머릿속을 괴롭혔던 복잡한 생각들과 감정들이 조금씩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시합장의 무거운 공기가 이제야 폐부를 찔러온다.

그것을 온전히 느끼며 에스파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무겁다.

이렇게 팔이 무거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들어야 한다.

손끝으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마력으로 활을 형성하고 있는 그의 시선에 아시테르의 얼굴이 보였다.

알렌시아와 함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시테르가 그를 보며 웃었다.

“그래 그거야 에스파.”

아시테르가 에스파를 향해 엄지를 치켜 올렸다.

이를 본 에스파가 웃는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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