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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104화 (104/424)

104화 칸의 꿈

단번에 사라진 아이스 골렘을 보며 베릴니아는 허탈함에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덱스가 자세를 고쳐잡으며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화염 마도사였다니… 그동안 우리를 속였던 겁니까?”

“에이, 속이기는요. 그동안 아무도 제 마법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으셨던 것뿐입니다. 물어보지도 않는데 어디 가서 ‘전 화염 마법을 사용합니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않아요?”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했다.

양옆에서 그를 향해 인형들이 달려들었다.

대화를 유도하며 빈틈을 노리는 전략.

그러나 아시테르에게 이러한 잔꾀가 통할 리 없었다.

어비스 던전의 마수들이 영악하기로는 몇 배는 더 영악했으니 말이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불길이 치솟으며 인형들을 불태웠다.

“말도 안 돼…….”

이 모든 것을 가까이서 지켜본 알렌시아가 충격 받은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라빈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그래! 아시테르는 분명 화염 마도사였어……!”

“아니 그걸 왜 지금 알려주냐고! 그리고 저 오빠는 왜 지금까지 우리를 속여먹은 거야!? 이건 기만이야―!”

라빈이 노발대발하는 동안 시합장은 아시테르가 만드는 불길로 뒤덮이고 있었다.

아시테르는 가만히 서서 덱스가 조종하는 인형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치잇…….”

덱스가 이를 악물었다.

벌써 여러 개의 인형들이 불타 없어졌다.

아시테르의 시선이 덱스에게로 향했다.

“이제 인형은 몇 개나 남았어요?”

그가 웃으며 묻자 덱스의 표정이 굳었다.

너무나도 여유로운 표정.

1등급도 아닌 3등급 학생이 자신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니 화가 치솟았다.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된 시합은 이제 시작이니까.”

덱스가 손아귀를 펼치자 네 개의 인형이 튀어나왔다.

각기 다른 무기들을 들고 있는 인형이었다.

“이 녀석들은 제가 부릴 수 있는 인형들 중 가장 강한 녀석들입니다. 당신을 상대로 보여주기엔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하는 수 없죠. 당신과 나의 차이를 확실히 알려줘야겠습니다.”

“그래요? 근데 어떻게 하죠? 벌써 하나는…….”

아시테르가 가장 오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순간 바닥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오른편에 있던 인형을 불태워버렸다.

덱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만만하게 보지 마십시오!!”

덱스가 남은 인형들을 움직였다.

하나는 벌써 불타버려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세 개.

그가 생각하기에 아시테르를 쓰러트리는 데 이 세 개의 인형이면 충분했다.

덱스가 갖고 있는 인형들 중 가장 높은 능력을 지닌 녀석들이기 때문.

하지만 이는 곧 덱스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말았다.

아시테르의 손에 화염구가 만들어졌다.

화염구는 곧 세 개로 나뉘며 인형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팡!! 파방!!

두 개의 화염구가 정확히 인형을 맞췄다.

어찌나 위력이 강한지 화염구에 맞은 인형들이 형체를 못 알아볼 정도로 파괴되고 말았다.

가까스로 화염구를 피한 남은 한 개의 인형이 아시테르의 가까이로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이를 본 덱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됐어!!”

그가 마력을 불어넣자 인형의 손에서 커다란 칼날이 튀어나왔다.

덱스는 아시테르에게 단번에 치명상을 입혀 이 시합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한순간에 무산되고 말았다.

아시테르가 슬쩍 움직인 것만으로 인형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1등급에 있는 학생들도 덱스의 인형들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

거기다 덱스의 인형들은 마법 내성도 강한 편이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1등급도 아닌 고작 3등급에 머물러 있는 학생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덱스의 인형들에 쩔쩔매며 패배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맞았다.

헌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상대는 자신을 농락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로 덱스의 인형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거기다 크기도 작은 화염구에 인형들이 박살나 버리니 자존심까지 철저히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덱스의 머릿속에선 더이상 아시테르를 이길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더 없어요?”

아시테르가 덱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덱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베릴니아가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를 향해 마법을 사용했다.

“짜증나는 새끼들!! 죽어버려!!”

허공에 맺힌 얼음 덩어리가 두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이를 본 아시테르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아시테르의 마력이 움직였다.

그의 손에 맺힌 화염구가 빠르게 날아가 단번에 얼음 덩어리를 깨트려 버렸다.

“두 사람의 실력으로는 절 이길 수 없어요.”

아시테르의 주변에 다섯 개의 화염구가 생성되었다.

이를 본 덱스가 마른 침을 삼켰다.

크기는 별 것 아닐지라도 자신의 인형들을 파괴할 정도면 사실은 엄청난 위력을 담은 화염구들이었다.

그런 화염구가 무려 다섯 개.

베릴니아는 물론 자신도 저것들을 모두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난 거야…….”

덱스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알렌시아의 실력을 봤을 때만 해도 그는 충분히 이 시합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실력이 낮은 것은 아니었지만, 베릴니아가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자신까지 붙으면 승산은 높았다.

어쨌든 일대일 승부를 펼치며 베릴니아가 생각 이상으로 알렌시아의 힘을 많이 빼놓았으니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마지막에 변수가 생겼다.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던 아시테르가 사실은 최종 보스처럼 나타나 상황을 정리해버리고만 것이다.

그가 지금 느끼기에 알렌시아보다 아시테르가 더더욱 무섭고 버거운 상대였다.

덱스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땀이 축축하게 그의 손바닥을 적셨다.

다리가 굳어버렸는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압도적인 실력차이에 몸이 먼저 반응하고 느끼고 있었다.

“이건 뭐… 어림없겠네…….”

벌써부터 두려움에 몸이 굳어 있는데 이 시합을 더 이어가봤자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덱스가 순순히 시합을 포기했다.

“저희가 졌습니다.”

“야 지금 무슨!”

“인정해 베릴니아. 우리가 무슨 수를 쓰던 저 괴물은 이길 수 없어.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거짓말… 거짓말 치지 마 덱스! 너라면 이길 수 있잖아?”

“방금 봤잖아. 내가 데리고 있는 최강의 인형들로도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어. 무지막지한 화염 마법이야. 내 인형들을 저렇게 쉽게 태우는 걸 보면…….”

덱스는 순순히 아시테르의 실력을 인정했다.

반면 베릴니아는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아시테르가 덱스를 향해 다가왔다.

“수고했어요.”

“전 시합의 일은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을 도발하기 위해 동료분들을 좀 더 괴롭힐 필요가 있었거든요.”

“아아 그거라면… 데미리우스 형이 용서했으니 괜찮아요. 시합 중에 벌어진 일이니 너무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요.”

“그랬나요? 다행이네요.”

“그보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네. 그 인형 마법이 너무 신기해서요. 나중에 다시 한 번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사실 좀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예에……?”

아시테르의 말에 덱스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일부러 놀리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시테르가 이번엔 베릴니아를 보며 말했다.

“빙결 마법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솔직히 너무나도 아름다운 마법이기도 했어요.”

“쳇…….”

평소 같았으면 한 마디 했을 테지만 베릴니아는 그러지 않고 그냥 시선을 피했다.

아시테르가 그런 베릴니아를 아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덱스가 아시테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요.”

“네?”

“그래도 악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어요. 베릴니아의 행동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지금 당신과 알렌시아에게 패배한 것에 부끄러워서 그런 것 같으니까.”

덱스가 이 말만을 남기고 베릴니아의 뒤를 따랐다.

시합장을 완전히 나서자 베릴니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나 분해?”

“당연하지. 오늘 완전 최악이었잖아.”

“바보 같은 소리. 너는 최선을 다했어. 아이스 골렘을 그렇게 성공적으로 소환한 것도 처음이잖아.”

“하지만… 그러면 뭐해? 그래도 져버렸잖아. 솔직히 나도 알아. 네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내가 먼저 쓰러졌을 거라는 거…….”

“다음이 있잖아. 한 번 졌다고 너무 기죽지 말아.”

“시끄러…….”

베릴니아가 눈물을 훔쳤다.

덱스는 그런 베릴니아의 곁을 지켜주었다.

힘없이 걷는 두 사람의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수고했다.”

“칸……?”

“좋은 경기였다.”

“혹시 오늘 경기를 본 거야……?”

“우리 팀원의 경기인데 봐야 하질 않겠나.”

“미안해…. 네 앞에서 부끄러운 꼴을 보였네…….”

“아까운 시합이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알렌시아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마.”

“뭐?”

“1등급에 올라서는 순간 각오해둬라. 두 번의 패배는 없어야 하니까.”

“응……!”

칸의 말에 베릴니아가 미소를 보였다.

덱스가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베릴니아의 감정을 어떻게 맞춰줘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칸 덕분에 단번에 해결되었다.

칸의 시선이 이번엔 덱스에게로 향했다.

“너도 마찬가지다.”

“응?”

“너도 두 번의 패배는 없어야 한다. 그동안 1등급에서 네 실력이 꽤 먹힐 거라 자부했겠지만 이번에 알았겠지. 아직 네 마법은 부족하다.”

“쳇… 나도 알고 있어. 너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참담하게 깨질 줄은 몰랐네.”

“그 녀석은 강하다. 그동안 왜 그렇게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시합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놈은 널 상대로 제대로 된 실력조차 발휘하지 않았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나를 봐주기라도 했다는 말이야?”

덱스의 말에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덱스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실력차이가 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난다고?”

“괜찮아. 이제부터 강해지면 되니까. 나와 함께 가자.”

칸의 말에 덱스와 베릴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칸은 이런 일로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그에겐 덱스와 베릴니아가 필요했다.

물론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알렌시아였다.

그녀가 팀에서 빠짐으로써 전력에 커다란 공백이 생겼다.

“알렌시아…….”

칸의 시선이 알렌시아가 사라진 쪽으로 향했다.

그가 만들고 있는 팀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알렌시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와라.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니까.”

칸의 주변으로 다른 학생들이 다가왔다.

모두 칸과 함께 팀을 이루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덱스랑 베릴니아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이런 일로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재들이다.”

“하긴, 둘 다 마법 실력은 뛰어나니까.”

“나는 우리 기사단에 그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 찬성이야.”

“아하하!! 근데 진짜 멋있다 칸. 벌써부터 자기 마법기사단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그러니까. 역시 다른 녀석들이랑은 다르다니까.”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쳐다보며 말했다.

칸이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내 마법기사단을 꾸릴 거다. 갑자기 단원들이 바뀌는 그런 기사단 말고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온전히 내 동료들로만 이루어진 기사단을 말이야. 그런 최강의 기사단을 만드는 것이 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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