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빈민가의 여인
아시테르의 부름에 워크라가 인상을 쓰며 돌아보았다.
그때 아시테르가 품에서 보석을 몇 개 더 꺼냈다.
이에 워크라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보석들을 드릴게요. 그러니 더 이상은 이 마을을 건드리지 말아주시겠어요?”
“하! 이유가 뭐냐?”
“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고 있는 거다. 보아하니 어디 있는 집 자식의 귀족 같은데 왜 천민들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너희들은 천민들을 경멸하잖아?”
“아이들이 무서워하잖아요. 당신들이 찾아올 때마다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게 할 순 없어요.”
아시테르가 간단하게 답했다.
그리곤 화적떼에게 보석을 건넸다.
“나야 뭐… 돈만 챙기면 되니까.”
워크라가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얼굴로 이만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떠나자 화적떼도 함께 자리를 떠나버렸다.
화적떼가 빈민가에 찾아와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떠나간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벌벌 떨고 있던 빈민가의 사람들이 하나둘 나와 아시테르에게 감사 인사를 표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이 찾아와 아시테르에게 연거푸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시테르는 별일 아니었다는 얼굴로 그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그런 아시테르를 후드인이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오늘 처음 본 아이들 아니에요?”
“맞아요.”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있나요?”
“아니요.”
“그런데도 그런 큰돈을 왜 서슴없이 내놓은 거예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잖아요. 모두가 무사히, 아무 일 없이 해결 되었으니까 잘 된 것 아닌가요?”
아시테르가 후드인을 바라보며 웃었다.
화적떼에게 큰돈을 주고도 그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웃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
후드인이 바라본 아시테르의 인상이었다.
빈민가 아이들을 위해 음식들을 챙겨오더니, 이번엔 큰돈까지 주며 화적들을 물리(?)쳤다.
“그런데 당신… 마법기사 아카데미의 학생 아니었어요? 마법 실력으로 저 사람들을 쫓아내도 됐잖아요.”
“아, 우리 학생들은 밖에서 함부로 마법을 사용해선 안 돼요.”
“그런 규칙이 있었군요…….”
“거기다 마법을 잘못 사용했다간…….”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어서요?”
“네. 아이들뿐만 아니라 당신도요.”
아시테르의 말에 후드인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아시테르는 자신을 위해서도 큰돈을 냈다.
의도치 않게 빚을 진 셈이다.
아시테르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 사람들과 전투를 벌이면 혹시 모르게 일어날 잔인한 장면들을 아이들이 적나라하게 보게 될지 모르잖아요. 그런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 머릿속에 자리 잡거든요. 저는 아이들에게 그런 기억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요. 좋은 것들을 보고 좋은 것들만 먹고 자라야 하잖아요.”
아시테르의 말에 후드인의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것이 있었다.
그리곤 무언가 결심한 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후드인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새하얀 피부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눈매.
짙은 눈썹과 넓은 이마.
갸르스름하면서도 선명한 턱선에 붉은 입술까지.
한눈에 봐도 엄청난 미인이었다.
그녀가 손으로 머리를 올리자 기다란 흑발이 찰랑거렸다.
여인이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우왁!”
깜짝 놀란 아시테르가 갑자기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그를 보며 여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실례인가요?”
“여… 여자였어요!?”
“아니 어떻게 그런 실례되는 말을…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지 않나요?”
“얇은 목소리의 남자인가 싶었죠…….”
“아하하하… 은근히 바보 같은 구석도 있으시네요?”
여인이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얼굴을 알고 나서 보니 너무나도 아름다운 섬섬옥수였다.
귀족들 중 간혹 여성스러운 손을 갖고 있는 남자들이 몇 있어서, 아시테르는 여인이 토흐를 치료할 때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여기엔 그동안 봐온 치료 마도사가 모두 남자였던 것도 은근히 한몫 했다.
여인이 아시테르를 보며 물었다.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돼요?”
“아, 저는 아시테르라고 합니다.”
“저는 린이라고 해요.”
린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아시테르는 순간 넋을 놓고 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어머니인 아레나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으로는 알렌시아를 꼽았다.
그런데 오늘 그 순위를 다시 뒤집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만큼 린의 외모는 독보적이었다.
아시테르가 순간 멍해질 만큼 아름다웠으니 말이다.
“네 그렇군요.”
정신을 다잡은 아시테르가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흔들자 린이 물었다.
“어디 몸이 안 좋은 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시테르가 웃으며 답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이제 돌아가봐야 할 시간이에요.”
“아… 그렇네요. 벌써 해가 지다니…….”
“린 씨는 이쪽에서 지내시는 거예요? 아니면…….”
“저는 이쪽에서 지내고 있어요.”
린의 답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만 가져온 것들을 챙기며 몸을 일으켰다.
보따리와 그릇들은 다시 르네마리아에 돌려줘야 했다.
그때 린이 아시테르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어…….”
“네?”
“내일도 이곳으로 오시는 건가요?”
“네. 그럴 생각이에요.”
“설마 또 음식들을 들고……?”
“당연하죠. 마을 사람들의 음식들을 넉넉히 챙겨 올 생각이에요. 마침 아는 가게에서 저를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세상에나…….”
밝은 표정으로 말하는 아시테르를 보며 린이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조금 전 그 많은 돈을 빼앗기고도 아시테르는 음식들을 가져와 이곳에 나눠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곳에 와서 처음 봐요.”
“저요?”
“네. 일단 돌아가보셔야 한다니 내일 다시 얘기해요.”
“아… 네. 알겠어요.”
얼떨결에 내일도 볼 것을 약속했다.
아시테르는 곧바로 아카데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떠나자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이 아쉬워했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들을 챙겨주고 화적떼를 간단히 돌려보내기까지 했으니, 마을사람들에게 아시테르는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형 내일 또 와요?”
“물론.”
“와아―! 그럼 내일은 같이 놀아요!”
“그거 좋겠다.”
아시테르가 아이들의 말을 다 받아주며 걸었다.
그 모습에 린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리곤 이내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어느 노파가 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기… 우리 아이의 목숨을 살려주셨다고 들었어요.”
“네? 아 저는…….”
“혹시 괜찮다면 오늘 하루 저희 집에서 머물다 가시지 않겠어요? 제 손자를 살려주신 은혜를 꼭 갚고 싶어서 그래요.”
노파의 손을 붙잡고 있던 토흐가 린에게 다가갔다.
토흐가 가까이 다가와 작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린이 저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 같이 가요 예쁜 누나. 우리 집에 맛있는 옥수수가 있어요.”
“정말?”
“네! 거기다 형이 주고 간 빵도 있어요.”
토흐가 품에서 빵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 아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린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노파가 기쁜 얼굴로 린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한편 순순히 마을을 떠나간 화적떼는 본채로 돌아가고 있었다.
“워크라 대장.”
“뭐냐?”
“정말 이렇게 순순히 돌아가실 겁니까?”
“그럼?”
“아까 그 녀석 말이에요. 엄청 돈이 많아 보이던데.”
“그렇겠지. 세상에 이 많은 돈을 직접 가지고 다니는 놈이 얼마나 되겠냐?”
워크라가 아시테르에게 건네받은 보석과 골드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수하 중 한 명이 워크라에게 다가왔다.
“그럼 가서 더 뜯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좀 더 협박하면 뭐가 더 나오지 않을까요?”
“그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야.”
“하지만 대장. 아까 그 녀석 너무 순순히 돈을 내주지 않았어요? 사실은 별 것 아닌 놈 아닐까요? 우리들한테 겁먹은 것 같던데… 일부러 태연한 척하면서 연기하다 돈만 주고 끝낸 거죠.”
“맞아! 그럴 수도 있잖아?”
“아! 생각났다 아까 그거 아카데미 학생 옷 아니었나?”
“아카데미 학생이 여길 왜 와?”
“그러게.”
“근데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 아카데미 학생은 아카데미 밖에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말이야.”
“뭐? 그런 게 있었어?”
“그래. 그래서 그놈이 순순히 돈을 내줬던 것이 아닐까?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면 그 놈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잖아?”
수하들의 대화를 듣던 워크라가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때는 못 알아봤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시테르의 옷이 마법기사 아카데미 학생 옷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제기랄… 그런 거였나……?”
“대장. 그러고 보니 그놈 주위에 음식들이 놓아져 있었어.”
“챙겨줄 가족이라도 있었나?”
“에이, 아카데미 학생이 저런 빈민가에?”
“근데 그런 게 아니라면 굳이 그 많은 돈을 낼 필요 없잖아? 원래 귀족들은 우리 같은 천민들은 신경도 안 쓰니까.”
“거참 묘하네…….”
돌아가는 길에 수하들은 아시테르에 관해 끊임없는 얘기를 나눴다.
그들의 얘기를 듣던 워크라가 근처 수하들을 불렀다.
“부르셨어요, 대장?”
“무슨 일입니까?”
“너희들은 내일부터 아까 그 마을을 주시해라.”
“예? 하지만 그 마을은 건드리지 않기로 했잖아요?”
“누가 건드리래? 그게 아니라 지켜보라는 거잖아. 아까 그 아카데미 학생 놈이 또 오는지 안 오는지 말이야.”
워크라가 슬쩍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돈냄새를 맡았을 때마다 짓는 표정이었다.
“오오 대장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신 겁니까?”
“그래. 내 생각이 맞다면 그 녀석은 분명 마을에 자주 찾아올 거다.”
“그러면요?”
“적당한 때를 봐서 그 녀석과 다시 거래해야지.”
“네? 어떤 거래요?”
“후후 그것까지 너희들이 알 필요는 없다. 너희는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그리고 티다드에게도 연락을 취해. 조율 마법기사단원들이 언제 순찰을 도는지 몰래 정보를 알아 와라.”
워크라가 수하들에게 골드를 주며 말했다.
티다드는 조율 마법기사단의 일원으로 평민 출신의 사내였다.
그는 화적떼에 돈을 받고 마법기사단의 정보를 팔기도 했다.
지금까지 화적떼가 마법기사단의 눈에 들지 않고 잘 활동하고 있는 것도 티다드의 덕분도 있었다.
떠나가는 수하들을 보며 워크라가 웃었다.
* * *
화적떼가 수상한 일들을 꾸미는 동안 아시테르는 르네마리아에 들리고 있었다.
그는 가져갔던 보따리와 그릇들을 다시 돌려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이들 모두 너무나 맛있다며 잘 먹었습니다.”
“으하하하!! 아이들이 음식 먹을 줄 아는 군요. 기절한 녀석들은 없었습니까?”
“네?”
“너무 맛있어서요!”
“아하! 기절 직전까지 간 아이들은 있었어요.”
“그렇군요!! 혹시 내일도 그곳으로 가십니까? 혹시 몰라 식재료들을 주문해 두었습니다.”
“네. 내일도 갈 생각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시테르님. 내일은 가져가시는 음식의 양도 많으니 따로 일꾼도 붙여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르바타님.”
“뭘 이 정도 가지고요. 좋은 일을 하시는데 한 손 거들게 되니 저도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제 아이도 이제 8살인데… 아들 생각도 나구요.”
아시테르는 사르바타에게 인사를 건네며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그리곤 다음 날 다시 찾아와 준비된 음식들을 가져갔다.
사르바타가 따로 붙여준 일꾼 다섯 명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