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화적과의 전투 (1)
“걱정하지 마라. 모두 잘 있으니까.”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응? 날 못 믿겠다는 거냐?”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아시테르의 말에 워크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못 믿겠다면 확인시켜주면 그만이었다.
그가 손짓하자 수하들이 몇몇 마을 사람들을 끌고 나왔다.
“아시테르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시테르님…….”
“위험한데 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등 뒤로 팔이 묶여 있는 사람들이 아시테르를 보며 말했다.
그들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아시테르가 그들에게 표정을 풀며 말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아이들이… 아이들이…….”
한 여인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은 어떻게 돼도 좋으니, 아이들만은 꼭 구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들의 표정을 보며 아시테르의 마음도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시테르가 워크라를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흐흐, 그보다 먼저. 확인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확인해 두어야 할 것?”
“그래. 이번에는 네 수중에 얼마나 있지?”
“돈 말입니까?”
“그래.”
“50골드 정도 갖고 있습니다.”
“확인시켜줘 봐라.”
워크라의 말에 아시테르가 순순히 골드를 품에서 꺼내 보였다.
그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워크라가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나와 다시 거래를 하지 않겠나?”
“무슨 거래를요?”
“어차피 너는 이번에도 네 수중의 돈을 모두 보이진 않았겠지. 그래서 말이다. 네가 지금 가진 전부를 우리에게 주면 아이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마.”
“아이들의 목숨만이라니…….”
“그래. 그리고 여기서 나는 네게 한 가지 더 재밌는 제안을 하나 할 거다.”
워크라의 손짓에 다른 한 명이 감옥으로 다가가 린을 붙잡아왔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아시테르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인지 린은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가 가진 전부를 주면 아이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마. 하지만 이 여자는 데려가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네가 이 여자를 택한다면, 이 여자를 살려주고 나는 아이들을 갖겠다.”
“갖겠다니… 아이들이 무슨 소유물도 아니고…….”
“아하하 상품이니 갖겠다는 말이 맞지. 요즘 노예상들이 굶주려있는데 노예로 팔아버리면 값이 조금 나가거든.”
“당신들……!!”
아시테르가 인상을 썼다.
그때 린이 메마른 입술로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아시테르…….”
“하지만 린…….”
“그보다… 저보다 아이들을…….”
린이 눈가에 눈물을 보였다.
이에 아시테르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시테르가 워크라를 보며 물었다.
“아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저쪽에 가둬놓았다.”
“직접 보고 싶습니다.”
“하? 왜. 우리가 너를 속이기라도 할까 봐?”
“아이들이 무사한지부터 봐야겠습니다. 그래야 거래도 있는 겁니다.”
아시테르는 단호했다.
이에 워크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수신호에 수하들이 감옥으로 다가갔다.
“모두 나와라.”
감옥 문을 열자, 겁을 집어먹은 아이들이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한 녀석이 미동조차 하질 않는다.
“야. 일어나.”
사내가 쓰러진 아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래도 아이는 움직이질 않는다.
결국 사내가 몸을 숙여 아이를 건드렸다.
“근데 이 녀석이…….”
사내는 그때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아이가 숨을 쉬질 않았던 것이다.
“토흐…….”
“토흐 오빠…….”
아이들이 토흐를 보며 훌쩍거렸다.
사내는 하는 수 없이 다른 아이들부터 밖으로 데려갔다.
아이들을 본 아시테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얼굴 여기저기 멍들어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화적들이 기어코 아이들에게까지 손을 댄 것이다.
“그런데 토흐는…….”
조금 전 마을을 둘러봤을 때 아이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헌데 아이들 사이에도 토흐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혹시나 토흐만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는 아시테르의 바람일 뿐이었다.
아이들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형아… 토흐가… 토흐가…….”
“토흐가 움직이질 않아…….”
“계속 잠만 자고 있어 토흐는…….”
아이들의 말에 린이 끝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토흐는 결국 화적의 무자비한 폭행에 숨을 거두고만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라고 멀쩡한 몰골들은 아니었다.
린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기 힘겨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마음이 계속해서 무거워져만 갔다.
“뭐……?”
아이들의 말을 들은 아시테르가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린을 바라보았다.
“린! 토흐는… 토흐를 직접 봤어요?”
그의 물음에 린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토흐는…….”
린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새하얀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확인한 아시테르의 얼굴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아시테르의 마음을 뭉개버리듯 화적 한 명이 축 늘어진 토흐를 업고 나왔다.
“뭐야? 그 녀석은 왜 그렇게 된 거야?”
“아무래도 말도날도 녀석이 애를 때린 모양입니다.”
“쯧… 상품에 흠집 내지 말라니까 그 자식이…….”
워크라의 반응은 이게 다였다.
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짓했다.
“저쪽에다 치워버려라.”
워크라의 말에 아시테르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아이들과 린. 양쪽 중 누굴 택할 거냐고 물었죠.”
아시테르의 물음에 워크라가 미소를 보였다.
이 일은 그에게 단순한 여흥에 불과했다.
어차피 워크라는 처음부터 아시테르를 순순히 보내 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가 돌아가면 분명 귀족들이 이 일을 알게 될 테고, 그러면 자신들을 뒤쫓기 위해 마법기사단이 파견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런 일들이 순순히 벌어지게 가만히 두고 볼 워크라가 아니었다.
워크라가 슬쩍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이 천천히 아시테르의 주위를 포위했다.
아시테르가 눈치채지 못하게 일부러 워크라가 앞으로 걸어 나가며 입을 열었다.
“그래. 선택해라. 네가 구할 수 있는 것은 단 한쪽뿐이다.”
“제 선택은.”
아시테르의 차갑게 식은 눈동자가 워크라를 싸늘하게 응시했다.
그의 시선을 본 워크라의 등줄기에 순간 오한이 드는 느낌이었다.
“모두를 다 구하는 겁니다.”
“그런 선택지는 네게 주어지지 않았어. 잘 생각하고 말해라.”
“왜 같은 인간에게 이런 짓까지 하는 겁니까?”
“뭐?”
“같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당신들은…. 그래, 당신들은 모두 마수보다도 못한 존재들이니까.”
아시테르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순식간에 안쪽까지 파고든 아시테르가 아이들을 붙잡고 있던 화적의 몸을 때렸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적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이어 아시테르가 다른 화적의 검을 단번에 빼앗았다.
스릉.
검은 깔끔하게 아이들을 묶고 있던 밧줄을 잘랐다.
아시테르의 검이 멈추지 않고 옆으로 향했다.
스각.
린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도 잘려나갔다.
몸에 힘이 풀려 있었던 린이 주저앉았다.
“얘들아, 지금부터 모두 눈 감아.”
아시테르의 말에 아이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흐느끼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손으로 귀도 막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네.”
“응……!”
아이들이 순순히 손으로 귀를 막았다.
다행히 린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그 순간 아시테르와 린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기는 걱정 말아요.”
그녀의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워크라가 아시테르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모두를 구한다는 선택이 결국 이거였냐!?”
“당신들과 거래를 할 마음 따윈 없습니다.”
“멍청하긴! 그냥 돈만 주고 누구라도 구해갔으면 됐을 것을…! 괜히 너 때문에 모두 다 죽게 생겼구나.”
수십 명의 화적들이 아시테르를 에워쌌다.
그들을 보며 아시테르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당신들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순순히 보내 줄 생각 따윈 없었잖아요.”
아시테르의 말에 워크라가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생각보다 아주 멍청한 놈은 아니었나보구나. 근데 아카데미 학생은 밖에서 마법을 못 쓰지 않나? 대체 무슨 수로 우리들을 상대하려고 그러지? 응?”
아시테르가 워크라와 주변 화적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워크라는 벌써부터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는 다른 화적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시테르가 우두커니 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워크라가 말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봐라. 네가 가진 것, 그것에 더해 이제는 네 목숨까지 돈으로 값을 치른다면 나도 다시 생각해주마. 참고로 우리 화적단에도 마도사들이 있다. 설사 네가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이 많은 인원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을 거란 말이지.”
그때 아시테르의 뒤에서 린이 말했다.
“검술을 익혔죠?”
린의 물음에 아시테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을 휘두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검을 휘둘러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단번에 밧줄을 그렇게 자르겠어요? 대부분 혹시나 다칠까 봐 조심히 검을 사용하죠.”
“그렇군요.”
“아무 생각 없이 당신이 이렇게 일을 벌였을 거라곤 생각지 않아요.”
“물론입니다. 저는 모두를 구하고 빠져나갈 겁니다.”
“저도 서포트 해드릴게요.”
“네?”
“용서할 수 없어요. 저 사람들… 마을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아이들까지도…….”
그녀의 말에 아시테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린뿐만 아니라 아시테르도 분노가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린이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그녀의 양손에서 환한 빛이 일었다.
린이 영창을 외우자 그녀를 중심으로 새하얀 마법진이 펼쳐졌다.
우우웅―!
빛무리와 함께 마법진 안에 있던 아이들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광경에 화적들은 물론 아시테르까지 놀라고 말았다.
“치료 마도사!!”
“대장! 저 여자 치료 마도사였어요!”
“크하하하!! 그 귀하다는 치료 마도사가 여기에 있었어!”
워크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치료 마도사만큼 귀한 존재가 없다.
노예시장에 팔면 상상 이상의 거금까지 챙길 수 있다.
팔지 않더라도,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쓸모가 있는 것이 바로 치료 마도사였다.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저 여자는 못 넘겨줄 것 같구나!”
워크라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아시테르가 검을 움켜쥐었다.
그때 린이 다시금 마법을 사용했다.
“어쨌든 검술을 할 수 있다니 다행히네요.”
그녀의 하얀 마법진이 아시테르의 밑에서 펼쳐졌다.
그러자 아시테르의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
거기다 힘까지 마구 솟는 느낌이었다.
“이건…….”
놀란 아시테르가 린쪽을 바라보았다.
린이 아시테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은 걱정 마요. 제가 곧바로 치료해드릴 테니까요.”
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시테르가 먼저 움직였다.
상대가 당황하고 있는 틈을 노린 것이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평소보다 훨씬 더 움직임이 빨랐다.
스각! 스가각!!
그는 단번에 마을 사람들 쪽의 화적들을 베어버렸다.
그리곤 마을 사람들의 밧줄을 잘랐다.
“아이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 있으세요.”
“네……!”
“예…….”
마을 사람들이 황급히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동시에 아시테르는 검을 겨누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크하하!! 검을 들고 뭘 하겠다고!!”
“장난치나. 마법을 사용해도 모자를 판에?”
“우리가 너무 만만하게 보였나보네!”
화적들이 아시테르에게로 달려들었다.
아시테르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검이 사선으로 움직였다.
스걱!
이어 수직으로 내리친다.
캉―
부드럽게 검이 회전하며 수평을 그렸다.
검에 베여 비명을 지른 화적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간단히 베어버릴 생각이었는데 화적의 몸이 완전히 반으로 잘렸다.
그 광경에 아시테르가 두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