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왔습니다만-116화 (116/424)

116화 특별교류단

화적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거나 도망쳐버렸으니 남아 있던 돈은 아시테르가 가져와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

마을을 재건하는데도 돈이 필요하다.

거기다 당장 먹을 것, 입을 것들도 필요하니 이 돈이면 충분하겠다 싶었다.

돈을 아무리 준다고 한들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까 싶었지마는, 그래도 일단 없는 것보다 나았기에 아시테르는 남김없이 전해주었다.

마을엔 놀란 사르바타가 일꾼들과 함께 달려와 있었다.

“아이고…! 아시테르님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대체 어떤 간덩이 부은 녀석들이 감히……!”

사르바타는 아시테르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물었다.

덧붙여 아시테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루기아 가문에도 전할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만약 그랬으면 루기아 가문에서도 아시테르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섰을 터였다.

다행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기에 아시테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르바타는 곧바로 아시테르에게 입을 옷가지와 먹을 것을 전해주었다.

피가 잔뜩 묻어 말라붙은 아시테르의 옷을 보고 사르바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일부러 아시테르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진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아시테르를 챙겨줄 뿐이었다.

한편 아시테르를 본 아이들이 달려와 린의 행방을 물었다.

아시테르는 린도 가족들을 보기 위해 떠났다고 말했다.

몇몇 아이들이 눈물을 보였으나, 아시테르의 위로에 곧 씩씩한 모습들을 보였다.

그렇게 마을에서의 일들은 그럭저럭 잘 해결되었다.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아시테르님께서는 들어가 쉬십시오.”

사르바타의 말에 아시테르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만 아카데미로 향했다.

아시테르가 일주일이나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아카데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시테르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누운 그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사람을 베던 감촉이 생생하다.

그래도 전처럼 몸이 떨리거나 하진 않았다.

마냥 긴장되던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진짜 신기한 사람이야…….”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때, 린의 도움으로 스스로를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아시테르는 린을 떠올리며 웃었다.

아시테르가 꺼내는 얘기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들어주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했다.

“그러고보니 그때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지냈던 것 같네…….”

이스트 왕국에 도착한 이후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애써 외면하던 생각들도 한 번씩 머릿속을 비집고 나와 아시테르를 괴롭히곤 했었다.

그런데 린과 지내는 동안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그 전에 화적들을 몰살시킨 충격적인 경험을 했으니, 그 여파가 남아 그랬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린과 함께 지낸 시간은 돌이켜보니 아시테르에게도 즐거움이었다.

“자기 얘기를 워낙 안 하는 바람에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못했네…….”

아시테르는 누워서 생각에 잠기다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누군가 그의 숙소를 방문했다.

“아시테르 학생 있습니까?”

“네. 누구십니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이요?”

“네.”

손님이라는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를 찾아올만한 사람이 누굴지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몸을 일으킨 아시테르가 바깥으로 향했다.

접객실로 들어선 그의 앞에 처음 보는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중년인은 아시테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의 모습부터 살폈다.

“흐음… 이렇게 보니 새롭군. 그동안 어디에 있었나? 아카데미에 보이질 않던데.”

“사정이 있어 바깥에 외출해 있었습니다.”

“그랬군.”

“그런데 저어… 누구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게벨이라고 한다.”

“게벨… 이요?”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내 이름은 몰라도 상관없다. 그보다 너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니 곧바로 나와 함께 가야겠다. 옷도 잘 갖춰 입었으니 따로 준비할 것은 없겠어.”

“네? 갑자기 어디로 간다는 말씀이세요?”

“왕궁이다.”

게벨의 말에 아시테르가 눈만 꿈뻑거렸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 왕궁으로 가자고 하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왕궁에서 저를 왜 찾는 겁니까?”

“정확히는 왕실이 아니다. 너를 찾는 분이 왕궁에 계실뿐.”

“아…….”

“그분께서 대회 우승자인 네가 궁금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따라오도록.”

“왕실에 있는 분이시면… 높은 분이시겠죠……?”

“그렇다.”

누가 자신을 보고자 하는 것일까.

선뜻 생각나는 사람도 없었다.

게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네게 선택권은 없다.”

“아… 알겠습니다.”

“가지.”

게벨은 다른 말도 없이 준비된 마차로 아시테르를 이끌었다.

아시테르도 순순히 마차에 오르며 게벨과 함께 왕궁으로 향했다.

이스트 왕국에 와서 왕궁으로 향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잘 만들어진 가도를 한참이나 지나자 커다란 왕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기가 왕궁…….”

왕궁의 모습을 눈에 담아 두려 아시테르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게벨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가만히 있어라. 정신 사납다.”

“아, 알겠습니다.”

“마법기사가 되면 자주 오게 될 테니 그리 둘러볼 것 없다.”

“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시테르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게벨은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어… 그런데 저를 만나고자 하시는 분이 누군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만나보면 안다.”

“아…….”

“마침 다 왔으니 내려라.”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멈춰섰다.

게벨은 아시테르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별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왕궁안에 있는 작은 성.

그 성을 보며 아시테르도 함께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커다란 접객실이었다.

“어서 와요 게벨 아저씨.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했어요.”

“별말씀을요 아가씨.”

접객실에 앉아 있던 것은 붉은머리칼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아시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테르도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

“저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하하, 내가 누군 줄 알고 영광이래?”

“왕궁에 계시는 분이면 높은 분이 아니신지…….”

아시테르가 멋쩍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자 여인, 마르체니가 웃었다.

아시테르는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붉은색 물감으로 물들인 것 같은 색감이었다.

“앞에 계신 분은 이스트 왕국의 공주이신 마르체니님이시다. 예를 갖춰라.”

공주라는 말에 아시테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아시테르라고 합니다.”

“그래. 알고 있어. 이번 대회에서 우승했잖아?”

“그걸 어떻게…….”

“나도 그 자리에 있었거든. 진짜 대단한 마법이었어. 하늘에서 내리는 불꽃의 비라니… 태어나서 그런 마법을 본 것은 처음이야. 그래서 더더욱 네가 기억에 남았나봐.”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고 있지 말고 앉아.”

마르체니가 자리를 권하자 그때서야 아시테르는 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된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밥은 아직 안 먹었지?”

“네? 네에…….”

“그럴 것 같아서 준비했어.”

마르체니와 아시테르의 사이로 맛있는 음식들이 놓아졌다.

그녀는 그동안 아시테르의 얼굴을 빤히 살피고 있었다.

아시테르도 마찬가지로 마르체니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감히 공주님을 그런 시선으로…….”

“그만해요 게벨 아저씨. 솔직히 말만 공주일 뿐이잖아요 저.”

“하지만 아가씨…….”

“괜찮아요.”

마르체니의 말에 아시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그가 눈동자를 굴리자 마르체니가 먼저 시원하게 얘기를 털어놓았다.

“내 어머니는 이스트 왕국 사람이 아니야.”

“그러면…….”

“노스 왕국 사람이지.”

“예에……?”

“흔히 있는 일이야. 왕국의 화친을 위해 그 나라의 공주와 왕자를 결혼시키는 것 정도는.”

“그 말씀은 어머니께서 혹시…….”

“맞아. 노스 왕국의 공주였어. 영향력 있는 공주는 아니었고 한… 다섯 째 정도 되었나?”

마르체니가 게벨을 바라보며 물었다.

게벨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게다가 어머니도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은 아니야. 왕위도 정실 왕비의 아들인 오르카 오빠가 물려받을 거고. 나는 왕권과는 관련이 없어. 혹시 나에 대해 더 궁금한 것 있어?”

마르체니는 갑자기 자신의 얘기들을 꺼내놓았다.

아시테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마르체니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르체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제 내가 널 왜 보고자 했는지 말할 차례네.”

“아, 네.”

“얼마 후면 노스 왕국으로 가는 특별교류단이 출발할 거야. 정확히는 특별교류단이라기보단… 내가 잘 살아 있는지 노스 왕국에 확인시켜주는 의미가 더 크지만.”

“예……?”

“아무튼 그런 일이 있어. 어쨌든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네가 특별교류단에 합류했으면 좋겠어.”

“제가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나를 지켜줘.”

마르체니의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의 반응을 살핀 마르체니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지? 나는 왕권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반대로 얘기하면 왕권이 미치는 사람들은 다 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얘기야.”

“설마 왕국 내에 마르체니님의 신변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까?”

“많지. 여기는 왕국의 또다른 전쟁터야. 강하면 살아남고 약하면 잡아먹히는 곳이 바로 왕궁이라고. 적은 꼭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

“아마 이번에 노스 왕국으로 가는 특별교류단을 습격하는 자들이 있을지 몰라. 없다면 다행이지만 항상 만약의 상황은 준비해둬야 하는 거니까.”

“그들로부터 마르체니님을 지켜달라는 말씀이십니까?”

“맞아. 물론 너 혼자만 그 일을 맡는 것은 아니야. 게벨 아저씨와 왕실기사단 몇몇도 특별교류단에 함께 할 거야. 그럼에도 이렇게 너를 부르려는 이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늘리기 위해서야. 물론 실력 있는 사람으로.”

마르체니의 말에 아시테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 믿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백 프로는 아니야. 하지만 왕실의 사람들이 이제 막 1등급에 올라선 천민인 네게까지 벌써 손을 뻗쳤을 거란 생각은 안 해. 게다가 네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최근이고. 안타깝게도 마법기사단원들은 이번 특별교류단에 합류시킬 수 없어. 그래서 아직 아카데미 학생이지만 그만한 실력을 지닌 네게 이렇게 부탁을 하는 거고.”

“그렇군요.”

“물론 선택은 네 몫이야.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인 만큼 강요는 하지 않겠어. 대신 특별교류단에 함께하지 않더라도 오늘 일은 함구해야 할 거야.”

마르체니가 경고하는 어조로 말했다.

게벨이 일부러 곁에서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아시테르가 다른 곳에 가서 오늘 일을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경고 같았다.

이에 아시테르가 생각에 잠겼다.

겉으로는 평온한 척 했지만 사실 마르체니는 초조함에 몰래 손가락을 꼬물거리고 있었다.

아시테르의 고민이 길어지자 마르체니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아, 물론 이 일에 대한 보수도 주어질 거야. 돈은 물론 노스 왕국의 많은 것들을 구경할 수 있을 거야. 이스트 왕국과 다르게 노스 왕국은 자연을 섬기는 곳이라 정령들의 힘을 빌리는 정령술사도 있고 무투를 즐기는 투사들도 있어.”

“정령술사와… 투사요……?”

아시테르가 관심을 보이는 듯 하자 마르체니가 옳다구나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실제로 정령 본 적 있어?”

“아니요… 그런데 정령이라는 건 뭔가요?”

“궁금하면 직접 가서 보자! 거기다 투사들도 굉장해! 게벨 아저씨도 투사 중 한 명이야.”

아시테르의 시선이 게벨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게벨이 입을 열었다.

“투사는 육체를 극한까지 단련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우와…….”

어느새 아시테르의 두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