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게벨
“힘들진 않나?”
바위에 걸터앉은 아시테르의 곁으로 게벨이 다가왔다.
그는 아시테르에게 물을 건넸다.
물을 받은 아시테르가 곧바로 목을 축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호오. 과연 체력이 좋구만.”
게벨이 웃으며 곁에 앉았다.
아시테르는 특별교류단이 움직이는 내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도 힘든 기색 한번 없었다.
그런 모습이 게벨의 눈길을 끌었다.
게벨이 아시테르의 몸을 훑었다.
자세히 보니 온몸에 탄탄한 근육들이 붙어 있었다.
그때 특별교류단을 관리하던 마르체니가 두 사람 가까이로 다가왔다.
“여기서 뭐하고 계시는 거예요?”
“잠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마르체니가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는 짐꾼들의 짐이 놓여 있었다.
짐꾼들이 지쳐하자 아시테르가 그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처음 짐꾼들은 아카데미 학생인 아시테르가 자신들을 도와준다고 하자 한사코 거절했다.
그들은 아시테르를 귀족 가문의 자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시테르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결국 짐꾼들의 짐을 나눠 짊어지는데 성공했다.
아시테르는 이것도 수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짐꾼들의 생각은 달랐다.
“진짜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이야…….”
“정말 감사하네. 이거라도 좀 드릴까?”
“야 이 사람아. 저분이 이런 걸 드시겠어?”
“그래도 허기지실지도 모르는데…….”
짐꾼들 중 한 명이 아시테르에게 먹을 것을 건넸다.
감자를 집어든 아시테르가 인사를 건넸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이보게. 내 건 없나?”
게벨이 짐꾼에게 묻자, 짐꾼이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하필 아시테르에게 건넨 것이 남은 하나였다.
아시테르는 들고 있던 감자를 반으로 쪼개어 게벨에게 건넸다.
“여기 드시겠습니까?”
“으하하. 고맙군.”
게벨이 감자를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감자를 입안에 오물거리며 말했다.
“이건 어렸을 때부터 내가 자주 먹던 음식이라네.”
“그렇습니까?”
“그래. 우리 마을의 주식이었거든. 오랜만에 먹으니 너무나 맛있구만.”
“저도 감자를 좋아합니다.”
아시테르와 게벨이 너무나도 맛있게 먹자 마르체니가 슬쩍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감자에 꽂혔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선뜻 건넸다.
“마르체니님도 드셔보시겠습니까?”
“시… 싫어. 드럽게 내가 그걸 왜 먹어?”
“진짜 맛있습니다.”
“됐어. 그것보다 훨씬 더 맛있는 것들을 살 수 있는 돈도 있는데 내가 왜? 내가 자주 먹는 음식 중에는…….”
마르체니의 배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아시테르가 웃으며 다시 감자를 건넸다.
“드시겠습니까?”
“으흠…….”
마르체니가 못 이기는 척 아시테르가 건넨 감자를 받았다.
그녀는 감자를 입으로 가져가 살짝 깨물었다.
마르체니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
“어때요? 맛있지 않아요?”
“아니. 맛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르체니는 감자를 한입에 넣어버렸다.
그 모습에 게벨과 아시테르가 미소를 보였다.
마르체니는 감자를 입안에 오물거리며 다시 돌아다녔다.
그녀의 모습에 몇몇 짐꾼들이 웃음을 보였다.
“왜… 왜 다들 웃는 거야!? 다 쉬었으면 출발하자!”
“예!”
“예에!”
쉬고 있던 짐꾼들이 몸을 일으켰다.
마르체니는 특별교류단이 노스 왕국으로 향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말을 걸었다.
그들도 처음엔 이를 어색해하면서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마르체니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공주라고 짐꾼들과 왕국 기사단원들이 자신을 어렵게 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내가 공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나는 공주가 싫어.”
그녀가 이번에는 아시테르를 붙잡고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그저 배부른 소리쯤으로 들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시테르의 반응은 달랐다.
“그럼요?”
“그냥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고 싶어. 부모님과 함께 밥도 먹고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보고…….”
“저는 어렸을 때 항상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었어요. 아, 할아버지도 같이.”
“진짜? 그럼 이참에 네 가족들 얘기 좀 해주면 안 돼?”
마르체니가 아시테르의 곁에 붙으며 물었다.
아시테르는 길을 걷는 동안 자신의 옛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는 것은 마르체니뿐 만이 아니었다.
짐꾼들과 왕국 기사단원들도 아시테르의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아시테르의 얘기가 이어지고 있는 동안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게벨이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 멈춰라.”
그의 명령에 특별교류단이 멈췄다.
왕국 기사단원들이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얘기를 멈춘 아시테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으하하!! 이게 웬 횡재냐!”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크게 웃었다.
사내의 시선이 향한 곳은 짐꾼들이 있는 곳이었다.
“형님! 이거 완전 대박 아닙니까!?”
“보아하니 어디 귀족 가문의 행렬 같은데…….”
“저기 가운데 있는 여자. 괜찮아 보인다.”
그들의 시선이 중앙에 있는 마르체니에게로 꽂혔다.
적들을 살핀 게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할라는 아닌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이 근처 화적단쯤 되나 보네요.”
마르체니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 눈치였다.
게벨이 아시테르를 돌아보았다.
“혹시 모르니 자네는 마르체니님 곁에 있어주게.”
“네. 알겠습니다.”
아시테르가 대답과 동시에 마르체니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동안 게벨은 화적단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길을 비켜라.”
“당신 같으면 이렇게 맛있는 먹잇감을 두고 비켜서겠나?”
사내가 게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손짓에 화적들이 움직였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십수 명의 화적들 뒤로 더 많은 숫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왕실 기사단원들이 검을 뽑았다.
팡!
게벨이 단숨에 뛰어오르며 화적들의 대장을 노렸다.
그의 주먹이 상대의 머리에 꽂혔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상대가 쓰러졌다.
단 일격이었다.
“크학!”
피를 토하며 사내가 경련을 일으켰다.
게벨의 실력을 본 화적들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대장이 단 한 번에…….”
“말도 안 돼…….”
“주먹질 한 번에 저렇게 된다고?”
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게벨이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는 거냐!? 겁도 없이 덤벼든 이놈들을 모두 죽여라.”
기사들이 게벨의 명령에 움직였다.
5명은 검을 들고 있었고 다른 5명은 마도사들이었다.
검을 든 기사들이 가까이에 있는 화적들을 죽였다.
마도사들은 도망치려는 화적들을 노렸다.
“으아!”
몇몇 화적들이 기사단을 향해 돌진했다.
그중 두 명의 화적이 마르체니를 노렸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은 아시테르였다.
화륵.
아시테르가 불꽃을 일으키며 화적들을 막아섰다.
“아……!”
놀란 화적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 사이 아시테르의 화염이 멀리서 날아온 화살들을 불태워버렸다.
이어 아시테르가 손을 휘두르니 작은 화염탄이 화적들의 몸을 때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화적들이 곧장 무기를 버리며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졌어요…….”
“살려… 살려주십시오! 너무 배가 고파서 그만…….”
그 사이 가까이 다가온 기사들이 그들의 몸에 검을 쑤셔 넣었다.
“크훅…….”
피를 뿜은 화적들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들을 지켜보는 아시테르의 표정도 그다지 좋진 않아 보였다.
이에 마르체니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처음 보지?”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그래? 표정을 보니까 딱 아닌데.”
“그냥… 전의를 상실한 이들까지 모두 죽여야 하나 싶어서요.”
“나 때문에 그래.”
“마르체니님 때문에요?”
“응. 저들이 도망쳐서 우리 행렬에 대한 소문을 퍼트릴까 봐. 예전에 내 부탁 때문에 화적들을 놓아줬다가 더 많은 적들이 몰려와서 위험할 뻔한 적이 있었거든.”
“아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날 이후로 게벨 아저씨도 적들에게 자비를 두지 않아.”
그녀의 말처럼 게벨은 선두에 나서서 화적들을 모두 죽이고 있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닌 일방적 학살에 가까웠다.
제대로 된 전투 경험도 없이 숫자로 밀어붙이는 화적들에게 게벨은 막을 수 없는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두 주먹으로 눈앞에 보이는 화적들을 모조리 쓰러트렸다.
“그나저나 대단하네요…….”
아시테르는 게벨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다른 기사단원들과 다르게 게벨의 싸움 방식은 특이했다.
그는 다른 무기는 들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신체로만 전투를 이어갔다.
“저게 바로 투사들의 전투 방식이야.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에 도달하면 투사들의 육체엔 검이나 마법으로도 흠집을 낼 수 없다고 들었어.”
“과연…….”
아시테르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게벨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그의 두 주먹에 마력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마력이라기엔 조금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적들을 모두 처리한 게벨이 돌아왔다.
그의 옷은 적들의 피로 흥건했다.
“옷만 갈아입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게벨이 여분의 옷을 꺼내며 말했다.
마르체니는 화적들의 죽음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한다.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으면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일까.
아시테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왕실기사단의 마도사들이 다가왔다.
“조금 전 마법. 제법이던걸?”
“아카데미 학생이라길래 마도사인 줄은 알았다만 화염 마도사인줄은 몰랐군.”
“호오… 마력을 다루는 솜씨가 아주 예사롭지 않았어. 마르체니님께는 불꽃이 닿지 않도록 정확하게 화적들의 공격만 막았더군.”
아시테르의 마법을 살폈던 기사단 마도사들이 그에게 흥미를 드러내었다.
반면 검을 들고 싸웠던 기사들은 아시테르를 일부러 무시하며 지나쳤다.
처음엔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아시테르도 알 수 있었다.
왕실 기사단은 현재 두 가지의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검술의 명맥을 잇는 검술기사단과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기사단이었다.
지금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 왕실기사단이라고 부르지만 조만간 둘로 나뉘어질 거라는 설명이었다.
“이해가 되질 않아. 어째서 검술 같은 낙후된 걸 연마하는 건지.”
“내 말이 그 말이다. 결국 마법이 최고인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고집이야. 쓸데없는 고집.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아시테르?”
마도사들이 아시테르를 붙잡고 말했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검술이든 마법이든 우위는 없다고 생각해요.”
“뭐……?”
“그게 무슨 말이냐?”
마도사들이 슬쩍 언짢아 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반면 검사들은 아시테르 입에서 나온 의외의 대답에 슬쩍 귀를 열고 있었다.
“무엇을 익혔는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아닐까요? 그것에 우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처럼 마르체니님을 지키고 왕국을 지키는데 사용되는 숭고한 노력의 힘이니까요.”
아시테르의 답에 게벨이 박수를 쳤다.
그는 아시테르의 가까이로 다가와 말했다.
“그게 바로 네가 검술을 익힌 이유인가?”
“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너는 마법도 할 줄 알지만 검술도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다면서?”
“그걸 어떻게…….”
“판데아에게 들었지. 네 칭찬이 자자하더군. 훌륭한 검술 실력을 지녀서 자신도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말이야.”
“아… 판데아님과 아는 사이셨군요.”
“그 친구가 얘기하더군. 세월을 뛰어넘어 자네는 자신의 검술 스승이자 제자였으며, 때로는 좋은 검술친구였다고.”
게벨의 말에 아시테르가 쑥스러움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동안 다른 검사들은 이미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으하하!! 판데아님과 아는 사이였다니!”
“판데아님과 그런 사이라면 우리랑도 이미 친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쩐지 마도사치고 체력이 좋더라니 그런 이유였나!?”
갑자기 살갑게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아시테르가 웃었다.
그 사이 마도사들은 슬쩍 아시테르와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