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이국 땅의 친구
그물거리는 하늘과 추적추적 내리는 비.
빗물을 잔뜩 맞은 여인이 아시테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시테르는 멍한 눈으로 새하얀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신에게 손을 내민 여인.
얼굴은 흐릿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시테르는 자신의 그을린 손을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내밀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무거운 것인지.
팔을 내미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여인은 말없이 따스한 손길로 그런 아시테르의 손을 어루만져주었다.
어째서인진 모른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져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아시테르를 괴롭혔다.
그것은 무겁고 어두웠으며, 저 깊은 심연에 자리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떨고 있을 때, 따스한 온기가 몸을 덮었다.
놀란 아시테르가 고개를 들었다.
저 깊은 심연까지 추락하던 그의 감정이 따스함에 이끌렸다.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따뜻함.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느낌이었다.
아시테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안간힘을 써도 두 눈은 떠지질 않았다.
“으아아―!”
아무리 용을 써도 눈이 떠지질 않자 아시테르가 괴성을 질렀다.
그가 발작하며 몸을 일으키자, 곁에 있던 마르체니가 더욱 놀랐다.
“깜짝이야!”
“아… 하아…하아…….”
식은땀을 잔뜩 흘린 아시테르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곧바로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검게 그을린 손이 아닌 평소 자신의 손이었다.
새하얀 이부자리가 그때서야 눈에 들어왔다.
“꿈이었나…….”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그렇게 요란하게 일어나는 거야?”
“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아시테르는 아직도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호흡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대체 무슨 내용의 꿈이었을까.
또 가슴은 왜 미치도록 저리고 아팠을까.
자신의 앞에 있던 여인은 누구였을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아시테르의 곁으로 마르체니가 다가왔다.
“아직 더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해.”
“예……?”
그때서야 아시테르는 온몸에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전신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대체 왜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싸운 거야? 이그트 오빠는 노스 왕국의 상위 전사야. 아카데미 학생인 네가 감히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고.”
“상위 전사면… 높은 겁니까?”
“당연하지. 이스트 왕국으로 따지면 부단장급이야.”
“아…….”
그렇게 들으니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시테르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그런 어마무시한 사람을 이겨보겠다고 미친 듯이 싸웠으니…….’
몸이 남아나질 않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끝까지 지기 싫어 이그트의 주먹을 악으로 깡으로 받아냈다.
그렇게 전투를 이어가면서 여실히 깨달았다.
그의 주먹은 무겁고 파괴적이었다.
솔직히 말해 주먹을 맞을 때마다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던전 바닥을 굴러온 몸이었다.
나름 스스로를 강골이라 생각했는데도 이그트의 주먹은 끝내 버텨낼 수 없었다.
“이그트 오빠의 주먹을 그렇게 맞고도 이렇게 살아 있는 걸 보면 너도 진짜 너다.”
“아하하, 사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아픕니다.”
“웃어? 너 아직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인데. 너 말이야, 거기서 더 했으면 진짜 죽을 수도 있었다고! 하다가 안 되겠으면 적당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이게 뭐라고 그렇게 목숨까지 걸어!?”
마르체니가 소리를 지르자 아시테르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그때 뒤편에서 커다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 마르체니 그만해라. 이제 깨어난 사람을 붙잡고 너무 뭐라고 하는 것 아니냐?”
“이그트 오빠……?”
이그트가 하얀 이를 잔뜩 드러내며 들어왔다.
아시테르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즐거워 보였다.
“아, 이그트님.”
“대단했다 이국의 마도사!”
“예!?”
이그트가 아시테르에게 다가가 악수를 내밀었다.
이에 아시테르도 얼떨결에 그의 우악스런 손을 붙잡았다.
이그트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아시테르에게 머물러 있다.
“솔직히 놀랐다. 멀리서 마법이나 쏘아댈 줄 알았는데, 그토록 배짱 있게 나와 싸울 수 있는 녀석이었을 줄은 몰랐어.”
“이그트님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결국 제가 패배하고 말았어요.”
“아니. 너는 지지 않았다. 우리들의 승부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어.”
“예?”
“네가 기절했을 때 나도 몸에 힘이 풀려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꼴 사나운 모습이 될 때까지 나는 내 몸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말은 즉, 내 상태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너와의 싸움에 뜨겁게 흥분해 있었다는 얘기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어떻게 되든 생각않고 정말 최선을 다해 부딪쳤습니다. 정말 후회 없는 대결이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그것도 마법이냐? 너의 신체 능력을 강화시키며 몸에 불꽃을 일으켰던 것 말이야.”
“예.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계속 연구하고 있는 마법입니다.”
“그게 아직 미완성이라고……?”
이그트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시테르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직은 펼치는 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몸에 따르는 반동도 심하고요.”
아시테르의 설명에 이그트도 적지 않게 놀란 듯 했다.
그가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놀랍구나. 그게 아직 미완성인 마법이었다니. 그럼 제대로 펼칠 수 있게 되면 지금보다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겠지?”
“물론입니다. 그때는 꼭 이그트님을 이겨 보이겠습니다.”
“크흐흐. 그거 재밌구나. 아주 재밌어.”
이그트가 진심으로 기뻐 웃었다.
자신과 뜨겁게 싸울 수 있는 사내.
당장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비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사내가 바로 눈앞에 있는 아시테르였다.
그런 아시테르가 아직 자신의 힘은 미완성이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힘을 완성시켰을 때, 자신을 뛰어넘을 것이라 감히 말하고 있다.
이것만큼이나 이그트의 가슴을 뜨겁게 타오르게 만드는 말은 없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을 것 같나? 나 또한 더욱 정진할 거다. 그리고나서 네게 가르쳐주겠다. 너와 나의 차이를 말이야.”
“지지 않을 겁니다.”
아시테르가 뜨거운 시선으로 이그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그트는 그런 아시테르의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강인한 신념과 믿음이 담겨 있는 눈이었다.
그는 정말로 그 힘을 완성시켜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꼭 실현될 것이다.
아시테르를 보고 있으면 그런 느낌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그트의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잔뜩 흥분한 그가 미소를 흘렸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동안 나는 정체기였다. 슬럼프에 빠져있었어. 그런데 이번에 너와의 싸움이 정말로 좋은 자극이 되었다. 더욱 강해지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른다.”
이그트가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말했다.
그의 큼지막한 주먹에 아시테르가 입가를 실룩거린다.
저 주먹에 흠씬 두들겨 맞은 뒤라 괜히 상처난 곳이 더 아픈 느낌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르체니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시테르를 다시 보고 있었다.
그가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그트와 동수를 겨룰 줄은 몰랐다.
그 사이 게벨과 파쿠황이 안으로 들어섰다.
파쿠황의 등장에 모두가 예를 갖췄다.
“몸은 좀 어떤가.”
“다행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파쿠황의 물음에 아시테르가 답했다.
그는 일부러 몸을 움직여보였다.
여기저기 욱씬 거리는 통증은 있었지만, 몸은 문제없이 잘 움직였다.
마력의 흐름도 원활하다.
이 정도면 하루이틀 푹 쉬면 평소처럼 다닐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동안 신체를 단련했었나?”
“예. 꾸준히 단련해왔습니다.”
“단순한 마도사인줄 알았더니… 검술까지 익혔더군.”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검술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보여준 그것은 무슨 마법이지?”
“예?”
“신체에 마력을 두르고 불꽃을 피워내다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마법이다.”
“아, 어렸을 때부터 워낙 마나가 희박한 곳에서 지내다보니…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힘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마수들과 싸워왔거든요…….”
아시테르는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마법을 연구하다 알게 된 것도 아니었다.
마수들과 숱한 싸움을 거치다보니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익히게 된 마법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는 건가… 그 어떠한 말보다 납득이 되는 말이로군.”
파쿠황이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잠시 파쿠황을 바라보던 이그트가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말하라.”
“이번에 결심이 섰습니다.”
파쿠황의 시선이 이그트에게로 향했다.
이그트의 눈빛이 전보다 더 생기를 띠었다.
아마 그만큼 아시테르의 존재가 이그트에게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페시무스의 시련에 도전하겠습니다.”
“정말이냐?”
“예.”
“그렇게 하라.”
짧막한 대화였다.
아시테르는 두 사람이 어떤 얘기를 나누는지 몰라 그저 눈알만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게벨을 포함한 다른 인사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빠! 정말로 페시무스의 시련에 도전하려고?”
“그래. 결심했다.”
이그트는 아시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테르도 이그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더욱 강해지기 위해 나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거다.”
“아…! 응원하겠습니다!”
“크하하하!!! 그래. 고맙다.”
“강해지시면 그때도 저와 한 수 겨뤄주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너와 나는 이미 뜨겁게 주먹을 주고받은 사이다. 나는 너를 이미 인정했다.”
이그트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인정이 아시테르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이그트는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어 아시테르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더욱 강해져 있어라. 내가 유일하게 승패를 못 가린 것은 네가 유일하니까. 그런 남자가 변변치 않은 놈으로 남아 있다면 내가 먼저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살벌한 말씀이시네요.”
“나는 노스 왕국 상위 전사이자, 국왕 파쿠황의 아들 이그트다. 정식으로 묻지. 너는 이름이 뭐냐?”
“아시테르라고 합니다.”
잠시 말을 멈췄던 아시테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비스 아시테르. 제 이름입니다.”
“어비스 아시테르라, 기억해두겠다. 너와는 어쩐지 좋은 친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니.”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이그트는 한결 편안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그만큼 이그트는 아시테르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그트가 이렇게나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처음 보는 지라 마르체니로서도 의외였다.
거기다 이그트는 살아남은 자가 파쿠황을 포함해 몇 없다는 악명 높은 페시무스의 시련까지 도전하겠다 말하고 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심의 계기는 분명 아시테르와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이 이그트 안의 무언가를 자극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동안 그토록 두려워했던 페시무스의 시련에 갑자기 도전하겠다 나설리 없었으니까.
이를 파쿠황이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아시테르에게 말했다.
“몸이 다 나으면 날 찾아오거라.”
“예? 예……!”
“너에게는 신세를 졌으니, 그것을 갚아주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