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파쿠황의 가르침
파쿠황이 다녀간 뒤 삼일 만에 아시테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놀란 마르체니가 아시테르에게 더 휴식을 취하라 말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물의 정령사라고 불리는 분들은.”
노스 왕국에서 물의 정령은 치유와 회복을 상징한다고 한다.
상급 물의 정령과 계약한 정령술사가 하루종일 아시테르의 곁에 붙어 보살피니 몸이 정말 말끔히 나았다.
린의 회복마법과 비교했을 때 전혀 뒤처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파쿠황이 특별히 신경 써서 보내준 약도 효과가 뛰어났다.
덕분에 아시테르는 그 어느 때보다 몸의 상태가 가볍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그 마법을 쓰고 나서 한 달은 넘게 통증에 시달릴 줄 알았는데, 벌써 다 나았습니다.”
아시테르는 그 말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내가 말없이 앞장섰다.
아시테르는 그의 뒤를 조용히 따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거대한 경관 속의 호수가였다.
산들바람이 아시테르의 코끝을 간질였다.
상쾌한 공기에 아시테르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가 깊게 내뱉는 것을 보며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몸은 벌써 괜찮아진 거냐.”
“예. 덕분에 빠르게 나을 수 있었습니다.”
아시테르가 사내를 향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사내는 팔짱을 낀 채로 아시테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파쿠황.
한 왕국의 정점에 있는 사내였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발산하는 그를 보며 아시테르가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오늘 너를 부른 이유를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신세를 갚아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은 기억이 납니다.”
“그래. 그거다.”
파쿠황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커다란 호수였다.
파쿠황의 손짓에 곁에 있던 왕의 사자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반응에 아시테르가 두 눈을 깜빡인다.
“서… 설마 이번에는 파쿠황님과 겨루게 되는 겁니까?”
“건방떨지 말거라.”
“아…….”
“너는 아직 나와 손속을 겨룰 수 없다. 그러니 보아라.”
파쿠황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호수를 바라보며 섰다.
거대한 산 같은 사내.
대지를 딛고 선 그가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느낌이었다.
파쿠황이 천천히 윗옷을 벗었다.
그러자 우람한 체격에 자리한 탄탄한 근육들이 보였다.
큼지막한 근육들은 선명하고 굵직한 선들로 나뉘어져 있다.
그것들을 보며 아시테르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시테르 몸만큼이나 파쿠황의 몸에도 무수히 많은 상처들이 보였다.
“왕께서도 마수들과 싸워오신 겁니까?”
“노스 왕국에는 수많은 마수들이 산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기 힘든 극악 지대도 존재한다. 그곳에서 버텨내고 살아남는 것이 우리들이 말하는 ‘시련’이다.”
“아…….”
“강한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시련을 견뎌내고 이겨내야 한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지.”
“파쿠황님께서도 시련을…….”
“노스 왕국의 누구라도 예외는 없다. 강인한 전사가 되고자 한다면 시련을 겪어야 하고 이겨내야 한다. 상처는 오롯이 내 몸에 새겨진 나의 길인 셈이다.”
파쿠황의 말에 아시테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의 상처를 보면 그때의, 그날의 기억이 난다.
그것들이 내가 걸어온 하나의 길을 이룬다.
파쿠황은 아마 그러한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아시테르가 그의 말을 곱씹는 동안 파쿠황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 일대 공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이 변화에 아시테르도 두 눈을 크게 떴다.
단지 호흡을 고르고 갈무리하던 기운을 발산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온몸이 저릿해 진다.
대기가 무겁게 전신을 옥죄는 것 같다.
그 순간 파쿠황이 슬쩍 왼쪽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자세를 낮추며 오른 주먹을 천천히, 몸 깊숙한 곳까지 당겼다.
슈와아아―!!
거대한 투기가 파쿠황의 전신에서 발산했다.
그 모습에 아시테르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힘을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의 절학이 담겨 있는 하나의 기술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
파쿠황은 자신과 싸우는 대신, 기술을 보여줌으로써 가르침을 주려는 것일지도 몰랐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평생 갈고닦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동작들을 저렇게 구분구분 나눠서 할 리 없었다.
전신에 두른 투기가 파쿠황의 주먹에 응집되기 시작했다.
무형의 기운이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죽음.
두 글자가 순간 스쳐 지나갔다.
저 주먹에 맞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아시테르는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전에 봤던 이그트의 주먹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주먹을 접했을 때는 싸워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조건 피해라.
피하지 못하면 죽을 뿐이다.
막아낸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
그것이 눈앞에 있는 절대자와 자신의 간극.
아득히도 멀어 언제쯤 닿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는 깊이.
단지 투기가 주먹에 응집하는 것만으로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른 침을 삼킨 아시테르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파쿠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잘 봐라. 이것이 바로 노스 왕국의 진정한 힘이니.”
파쿠황이 허리를 비틀며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터질듯한 근육이 한계까지 부풀어 올랐다.
그의 눈빛에서 형형한 아지랑이가 흘러나왔다.
슈파아아앙―!!!
촤라랑―
파쿠황의 주먹에 대기가 일렁이는 착각이 들었다.
평온하던 호수의 물이 해일이라도 일어난 듯 일시에 몸을 일으켰다.
하늘 높이 치솟은 물줄기를 거친 투기가 시원하게 갈랐다.
그 모습에 아시테르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콰앙!!!
반대편에 있던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쓰러졌다기보다 부서졌다는 표현이 맞았다.
호수를 가로질러 반대편에 있는 나무까지 부수는 힘.
파쿠황이 보여준 단 한 번의 일격만으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주먹을 휘둘러왔을까.
저런 굉장한 일격을 휘두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가해왔을까.
감히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언젠가 자신이 도달하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파쿠황이 몸을 돌렸다.
“봤느냐?”
“예.”
“두 눈에 똑똑히 새겨두었느냐?”
“물론입니다.”
“그럼 됐다.”
파쿠황은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짧은 설명조차 없다.
아시테르에게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 어떠한 것들을 깨닫게 해주고 싶은 건지.
일언반구의 말도 없었다.
하지만 대화가 필요 없는 것은 아시테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두 눈을 감고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파쿠황의 일격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머릿속에 떠올리고 다시 떠올리느라 주변은 전혀 신경 쓸 수 없었다.
골몰히 생각에 잠기는 그를 보며 파쿠황이 웃음을 보였다.
그의 곁에 선 왕의 사자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다른 말씀은 전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나는 이미 녀석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을 전했다. 여기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하지만 아직 마법기사도 아닌 이스트 왕국의 아카데미 학생일 뿐입니다. 어쩌면 파쿠황님의 힘에 겁만 집어먹기라도 하는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그게 저 녀석의 그릇이겠지. 하지만 너도 보았질 않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저 녀석의 표정을 말이다. 그게 어디 겁먹은 놈의 표정 같더냐?”
“…아닙니다.”
“그래. 놈은 분명 나의 일격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의 숨소리조차 선명히 담아가겠다는 듯! 무서울 정도로 집중했을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어디까지 깨닫고 얻어내는지는 오롯이 저 녀석에게 달려 있다. 본래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아는 만큼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이국의 아이에게 말까지 전하며 가르칠 정도로 나는 친절하지 않다.”
파쿠황의 말에 왕의 사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그가 이렇게 직접 나서는 것부터 이미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파쿠황이 아시테르의 앞에 나서서 자신의 힘을 몸소 보여준 것에서부터, 아시테르에게는 엄청난 기회이자 영광이나 다름없었다.
노스 왕국 최강자로 불리는 파쿠황의 진정한 힘.
그것을 눈앞에서 보았으니 말이다.
거기다 파쿠황은 일부러 아시테르가 사용하는 힘과 비슷한 기술을 보여주었다.
사용하는 힘의 원천은 달랐다.
마력과 투기.
다른 듯 하지만 결국 궁극에 다다르는 본질은 같다.
노스 왕국 최고 투사가 투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제대로 보여주었으니, 아시테르로서도 분명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시테르가 그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긴 것도, 그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하고 있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노스 왕국의 미래를 더욱 단단히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다. 그리고 저 아이 또한 더욱 성장해야 한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 아들 이그트는 말이다.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해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즐긴다. 지금까지 이그트에게 나와 너희들은 아직 높은 차원의 존재들로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저 아이는 다르다. 그토록 자신의 실력을 자신했음에도 비슷한 또래의 녀석을 넘어서지 못했으니까. 그것이 이그트에게는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녀석이 더욱 성장해나가려면 그만큼 좋은 경쟁 상대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파쿠황이 아시테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아시테르가 분명 이그트의 좋은 경쟁 상대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작금의 신분은 전혀 중요치 않다.
그보다는 그가 직접 본 것을 믿는다.
자칫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투지를 굽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
마법뿐만 아니라 검술까지 훌륭히 사용하는 특이한 솜씨까지.
파쿠황 나름대로 이그트를 수준 높은 인물로 키워왔다 생각했다.
“하지만 저 녀석도 좋은 스승을 둔 모양이야.”
파쿠황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새로운 힘을 탐구하고자 하는 순수한 호기심이 파쿠황에게도 전해졌으니까.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저 아이를 그렇게 좋게 바라보시는지 선뜻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제 눈에는 그저 실력 좀 좋은 이국의 마도사일 뿐입니다.”
“후훗. 내가 아는 녀석을 좀 닮아서 말이다.”
“아는 녀석이라니…….”
“이스트 왕국에 있는 오랜 친구 말이다. 내게 한번도 이기지 못했으면서 끝도 없이 도전해오던 그 멍청이가.”
파쿠황이 미소를 보였다.
그가 근래 이렇게 즐겁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파쿠황과 왕의 사자들이 떠나고, 홀로 남아 있던 아시테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것들을 전신에 감싼다.
파쿠황이 보여준 일격.
아시테르는 그가 했던 움직임을 따라했다.
작은 호흡도 놓치지 않는다.
마력의 움직임에 신경쓰면서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주먹을 말아쥐어 마력을 그 끝에 모았다.
마력의 속성이 변하며 불꽃이 일어났다.
“흐아아압!!!”
그가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훙―
잠깐 일렁이던 불꽃은 그 자리에서 타오르기만 할 뿐.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아…. 그럼 당황하지 않고……!”
주먹에 맺혀 있던 불꽃에 다시 다른 방식의 마력 컨트롤을 곁들인다.
마력을 폭발시키는 순간.
화쾅―!
불꽃이 전방을 향해 쏘아져나갔다.